감독 : 권칠인
주연 : 김민희, 이미숙, 안소희
예전 비디오 대여점에서 얻었던 기쁨
지금은 전부 사라졌지만, 몇 년전만해도 동네에 비디오 대여점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저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영화 고르기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물론 새로 출시된 신작 비디오도 저를 설레게했지만, 제가 진정 좋아했던 것은 구석진 곳에서 제가 놓친 구작 비디오를 발견했을 때입니다.
워낙 많은 영화들이 개봉하다보니 아무리 기대작이었다고해도 한번 놓치고나면 신작에 밀려 자꾸 영화 보기가 뒤로 미뤄집니다. 그러다가 제 기억 속에서 조용히 사라진 영화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렇게 잊혀졌다가 우연히 비디오 대여점의 구석진 곳에서 발견을 하면 무슨 보물 상자를 발견한 것 마냥 설레고 기뻤습니다. 이젠 그러한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곳에서 예전 비디오 대여점에서 얻었던 기쁨을 다시 발견했습니다.
요즘 저는 스마트폰으로 영화 보기에 빠져있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극장에 갈 시간이 없다보니 시간적 제한이 자유로운 스마트폰으로 영화 보기는 제게 새로운 대안이 되고 있습니다. 이미 네편의 영화를 감상했고, 스마트폰을 구입할때 받은 무료 코인도 거의 0에 치닫고 있을 때쯤 저는 무료 영화관을 발견한 것입니다. 개봉한지 꽤 된 영화들, 거의 대부분 제가 봤거나 관심이 없는 영화들 뿐. 그런데 그 영화들 사이에서 [뜨거운 것이 좋아]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뜨거운 것이 좋아]는 2008년 1월에 개봉한 영화로 개봉 당시만해도 제게 [스위니 토드 : 어느 잔혹한 이발사의 이야기]와 더불어 기대작이었습니다. 저는 2008년에 볼 첫번째 한국영화로 [뜨거운 것이 좋아]를 점찍었었는데, 어쩌다보니 볼 시기를 놓쳤고, 이렇게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너무 너무 너무 반가웠다.
반가운 마음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뜨거운 것이 좋아]를 너무 재미있게 봤습니다. 세 명의 여성 이야기를 솔직발랄하게 담은 영화라서 남성인 제가 공감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었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싱글즈]를 연출한 권칠인 감독은 영화 자체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남성인 제가 봐도 결코 거부감이 들지 않은 여성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특히 [화차]로 패셔니스타 김민희가 아닌 배우 김민희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던 김민희가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도 좋은 연기를 선보여 [화차]의 연기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님을 증명했습니다. 걸그룹인 '원더걸스'의 멤버인 안소희의 연기가 조금 눈에 거슬렸지만 이미숙의 카리스마 연기도 볼만했고, 특히 반가운 얼굴들인 김성수, 김범, 김흥수도 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반가웠습니다.
사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인 아미(김민희), 영미(이미숙), 강애(안소희)가 겪고 있는 갈등은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기에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낄낄거리며 영화를 감상했지만, 영화를 본 이후의 여운도 꽤 짙은 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불투명한 미래와 안정된 미래, 아미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뜨거운 것이 좋아]의 화자인 아미는 아직 입봉을 하지 못한 시나리오 작가입니다. 제작이 될 수 있을지 불투명한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몇 년째 매달리고 있는 그녀는 언니인 영미의 집에서 엊혀 살고 있습니다. 애인인 원석(김흥수)은 가수 지망생이지만 아미나, 원석이나, 미래가 불투명한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안정된 미래를 제공할 승원(김성수)이 다가옵니다. 조금은 썰렁하기는 하지만 외국계 회사의 회계사이며, 아미에게 헌신적일 정도로 잘 해줍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원석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게된 아마. 그녀의 마음은 더이상 불투명한 미래가 아닌 안정된 미래, 즉 승원에게 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승원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미국 비자를 받아야 하는 상황. 아미는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해 한국의 학원 강사라는 거짓말을 해야 하고 승원이 송금해준 삼천만원의 통장 잔고를 증거로 제출해야 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미는 깨닫습니다. '이건 내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가끔 회사에서 여성 사원들이 불이익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윗사람들의 논리는 '여자는 결혼하면 끝이지만, 남자는 계속 돈을 벌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영화 속의 제작사 대표도 아미를 그런 식으로 비꼽니다. 하지만 여성이라고 모든 꿈이 현모양처일리가 없습니가.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싶고, 하는 일에서 최고가 되고 싶고...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러한 꿈이 짓밟히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아미는 지금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안정된 삶 속에서 현모양처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꿈을 위해 불투명한 미래 속에서 외로운 싸움을 벌일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선택은 그녀 스스로의 몫입니다.
나이? 그건 숫자에 불과하다.
영미는 사회적으로 안정된 위치의 여성입니다. 잘나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사회적으로 인정받았고, 비록 아빠 없이 키웠지만 딸 강애도 잘 커줬습니다. 단지 아직도 허깨비같은 꿈을 쫓아 제 밥값 못하는 동생 아미만이 유일한 걱정거리일 뿐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연극 극단에서 만난 연하남 경수(윤희석)가 적극적으로 대시합니다. 처음엔 쿨하게 즐기다가 끝낼 생각이었습니다. 일에서 개인적인 감정이 끼어들면 복잡해진다는 사실을 영미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수와의 만남이 즐겁습니다. 이성적으로는 경수에게 '우리 내일부터 쌩까자.'라고 선언을 하지만 경수가 젊은 여자들과 히히덕거리는 것을 보면 이유없이 짜증이 납니다. 그런 그녀에게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바로 이른 폐경기입니다. 다시말해 여성으로서의 신체적 기능이 끝나버린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CF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선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 CF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는데, 사실 저는 어느 제품의 광고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광고 카피만이 기억에 남습니다.
맞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숫자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나이가 가지고 있는 힘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폐경기 등 신체적 변화는 물론이고, 나이 차가 많은 커플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도 결코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경수는 말합니다. 그냥 느끼라고... 폐경기? 사회적 시선? 그딴건 무시하라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영미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나이라는 새로운 적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정과 사랑 사이.
나이보다 성숙한 고등학생 강애. 너무 바빠 가정을 챙길 정신이 없는 엄마 영미와 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나잇값 못하고 있는 이모 아미 사이에서 강애는 언젠나 바쁩니다. 하지만 그러한 그녀도 아직 미숙한 것이 있으니 바로 사랑입니다.
강애에게는 잘생긴 남자 친구 호재(김범)가 있습니다. 강애의 절친인 미란(강해인)은 그러한 강애에게 남자를 꼬시는 법을 열심히 강의합니다. 강애와 호재의 첫 키스를 위한 열형 강의를 하던 도중 그만 우발적으로 강애와 미란은 키스를 하고 맙니다.
그 이후로 강애와 미란의 사이는 서먹해집니다. 처음에는 호재와의 키스를 위해 연습삼아 한 것이라 서로가 서로를 이해시키지만 그러한 거짓이 통할리가 없습니다. 미란이 다른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만 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화가 나는 강애. 이것은 우정일까요? 사랑일까요?
아직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에 대한 편견은 꽤 뿌리깊습니다.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동성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편견이 남아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강애와 미란의 사이를 동성애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호재보다는 미란에게 더욱 마음이 끌리는 강애는 스스로 그러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쏟습니다.
속마음을 감추고 살면 행복할 수 있을까?
[뜨거운 것이 좋아]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의 속마음을 감춰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아미는 시나리오 작가로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을 감추고 승원과 결혼을 하려 하고, 영미는 경수에게 향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쿨한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 행세를 하려 합니다. 동성 친구인 미란을 향한 마음을 감춰야 하는 강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그러한 속마음을 감추고 살아야 남들이 보기에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미는 회계사의 아내고 미국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고, 영미는 여전히 쿨한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며, 강애는 호재라는 멋진 남친을 둔 여고생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남들이 보기에 성공한 인생이고, 행복해 보인다고 해서 자신도 그렇게 느낄 수 있을까요? 과연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얻은 행복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있을까요? [뜨거운 것이 좋아]는 결코 무겁지 않은 방식으로 가볍게 툭하며 그러한 질문을 관객에게 던집니다. 지금 당신은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살고 있나요? 라고...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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