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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주먹] - 최선을 다해서 싸운 당신이 바로 전설이다.

쭈니-1 2013. 4. 17. 08:06

 

 

감독 : 강우석

주연 : 황정민, 유준상, 윤제문, 이요원, 정웅인

개봉 : 2013년 4월 10일

관람 : 2013년 4월 15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내 학창시절의 전설을 이야기해줄까?

 

남자들은 가끔 자신의 힘자랑을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혈기왕성한 육체를 가졌지만, 대학입시라는 사회 제도에 묶여 혈기왕성함을 억지로 억눌러야 하는 고등학교 시기에 그러한 힘자랑은 절정에 달합니다. 그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비폭력주의자입니다. 폭력이라는 행위 자체를 상당히 싫어하고 경멸합니다. 그랬던 제가 고등학생 시절 딱 한번 싸움에 휘말린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반에서 소위 노는 녀석에게 덤빈 것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타고난 범생이 스타일 덕분에 (공부는 그다지 잘 하지 못했습니다.) 조용히 학창 시절을 보냈던 저는, 어느날 제 뒷자리의 소위 노는 녀석의 시비를 받았습니다. 그 녀석은 학교 일진과 함께 몰려 다니던 녀석이었습니다. 처음엔 저도 꾹 참았지만 쉬는 시간 내내 제 등을 툭툭 치면서 킥킥거리는 것에 그만 저도 모르게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저는 반 아이들이 모두 들을만큼 큰 소리로 "하지마! XXX야!"라고 버럭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순간 교실 분위기를 '쏴~'해지더군요. 제가 그 녀석의 예상과 다르게 강하게 나오자 그 녀석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하지만 그 녀석도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저를 제압하지 못한다면 반에서, 아니 학교에서의 자신의 위상이 치명타를 입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녀석은 제 멱살을 잡으며 저를 한대칠 기세였지만 그 순간 다행히 수업종이 울려서 일단 위기는 넘어갔습니다.    

 

수업종이 울리자 그 녀석은 제 멱살을 놓으며, '"너, 오늘 수업 끝나고 남아!"라며 경고를 했습니다. 수업 끝나고 남으라는 것은 결국 조용한 곳에 가서 한판 싸워보자라는 의미입니다. 

싸움이라는 것을 해 본적이 없는 저는 수업 시간 내내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갔습니다. '이를 어쩌지? 까짓거 한판 싸워봐? 그냥 도망갈까? 미안하다고 사과할까?' 제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다 들더군요.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수업이 끝난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될런지 상상하는 것으로도 제 머릿속은 복잡해졌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하고 해봐도 결과는 정해져있었습니다. 싸움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저는 그 녀석에게 죽도록 맞을 것이 분명했고, 만에 하나 이긴다고 하더라도 그 녀석과 함께 다니는 일진 녀석들에게 보복을 당할 것입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갑자기 온 몸이 오들오들 떨렸습니다. 뒤에 앉은 녀석에게 이렇게 떠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이를 악물었지만 분명 제 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자! 과연 저는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겼을까요? 다행히도 저희 반의 일진 중 한명이 중간에서 중재에 나섰습니다. 그는 범생이를 건드려봐야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제게 녀석에게 사과하라고 정중하게 요청했고, 저는 마지못해 사과하는 척하며 결국 "미안해!"라는 말을 남기고 얼른 학교를 벗어났습니다. 이게 무슨 전설이냐고요? 전설 맞습니다. 일명 사시나무 전설... 제가 사시나무 떨듯이 너무 떨어서 만들어진 전설입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제가 너무 떨어서 학교 전체가 지진이 난것처럼 덜덜 떨렸다는... -_-;

 

 

여기 전설이라 불리우는 세 남자가 있다.

 

[전설의 주먹]은 저와 같은 가짜 전설이 아닌 고등학생 시절 싸움의 전설이라 불리웠던 세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복싱 챔피온이 꿈인 임덕규(박정민)와 사당고 짱인 이상훈(이정혁), 남서울고의 독종 미친개 신재석(박두식). 그리고 재벌 3세인 손진호(이정혁)은 필연같은 우연으로 절친한 친구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학교의 전설이 됩니다.

하지만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그들은 각자의 길을 걷습니다. 덕규(황정민)는 복싱의 꿈을 접고 아내의 죽음 이후 홀로 중학생 딸을 키우며 손님이 거의 없는 국수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상훈(유준상)은 대기업 부장이라는 화려한 명함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의 출세를 위해서 한때 친구였지만 지금은 대기업 회장인 진호(정웅인)에게 자존심을 버리면서 아부해야하는 비참한 샐러리맨에 불과합니다. 재석(윤제문)은 3류 깡패가 되어 있습니다. 후배 깡패들에게도 무시당하는...

그러한 그들을 한데 모은 것은 '전설의 주먹'이라는 케이블 TV쇼입니다. 학창 시절 전설이라 불렸던 사람들을 한데 모아 놓고,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싸움을 잘하는가?'라는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기 위해 서로 대결을 시키는 이 프로에서 덕규, 상훈, 재석이 만난 것입니다.

 

[전설의 주먹]은 이 세 남자의 이야기를 현재와 25년 전 과거로 교차 편집하여 보여줍니다. 왜 그들의 인생은 이렇게 엇갈릴 수 밖에 없었는지, 강우석 감독은 집요하게 그들의 과거 이야기를 파고듭니다. 그러한 강우석 감독의 집요함은 이 영화의 러닝타임이 2시간 30분이 훌쩍 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캐릭터는 생생해졌고, 드라마는 풍성해졌습니다. 특히 덕규, 상훈, 재석이 엇갈린 길을 걷게 되는 과거의 이야기는 현재의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 넣습니다. 

88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당시 부패한 심판들에 의해 아쉽게 탈락한 덕규의 방황. 아버지가 진호 집안의 운전기사로 있기에 아버지를 생각해서 진호에게 잘해주는 상훈의 사정. 그리고 재석이 3류 깡패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사건 등은 성급하게 관객 앞에 펼쳐 보이지 않습니다. 어른이 된 덕규, 상훈, 재석의 캐릭터가 영화 전반에 걸쳐 완성되는 동안 그들의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도 상황에 맞게 조금씩 펼쳐 보여주는 것이죠.

그렇게 캐릭터가 완성되면서 강우석 감독은 마지막 한방을 준비시킵니다. 캐릭터에 흠뻑 빠진 상황에서 지켜봐야 하는 중년 파이터들의 8강 토너먼트 장면은 단순한 액션을 넘어서 쾌감과 감동을 안겨줍니다. 나도 모르게 덕규, 상훈, 재석의 싸움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응원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모두 긴 러닝타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캐릭터의 힘이 컸습니다. 

 

 

그들의 전설은 모두에게 환영받을까?

 

[전설의 주먹]은 한때 전설로 불리웠지만, 지금은 평범한 중년이 되어 그 무엇보다도 힘든 세상과의 싸움을 펼치고 있는 세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이상의 더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덕규가 '전설의 주먹'으로 유명해진 이후 동창회에 갔다가 옛 친구들의 질타를 받는 장면입니다. 덕규의 행동은 제 3자에게는 전설이지만, 당한 사람에게는 폭력이고, 상처였던 것입니다.

따지고보면 저 역시 학창시절 싸움의 전설이라 불리우던 녀석들에게 당한 상처가 꽤 있습니다. 녀석들은 단순한 장난에 불과했지만, 당하는 제겐 오랜 세월 잊을 수 없는 치욕이었던 것입니다. 덕규와 상훈 역시 사당고의 전설로 불리웠지만 그들에게 당한 친구들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이 행사한 폭력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놀고 싶지만 아무도 그들을 끼워주지 않아 결국 자기네들끼리 놀 수 밖에 없는 덕규, 상훈, 재석의 모습은 멋있기보다는 안쓰러웠습니다. 결국 그들의 전설은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인상적인 것은 상훈과 진호의 관계입니다. 학창시절에는 힘이 우선입니다. 하지만 사회에 나오면 힘보다는 돈이 우선이됩니다. 고등학교 시절 1인자와 2인자의 관계였던 상훈과 진호. 하지만 사회에 나와서 진호는 대기업의 CEO로, 상훈은 그 밑에서 일하는 부장으로 관계가 역전이 되어 있습니다. 덕규의 동창회 에피소드와 상훈, 진호의 뒤바뀐 처지는 학창 시절의 싸움의 전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임을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상훈이 아들을 해외 유학을 보내고, 기러기 아빠가 된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비록 동창인 진호의 밑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지만 자신의 아들만큼은 그런 굴욕적인 삶을 살게 하지 않기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학창 시절, 싸움을 잘해서 일진 대접을 받고, 친구들이 무서워 벌벌 떨었어도 그것은 학창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결국 사회라는 정글에 나오면 경제적 능력이 강자와 약자를 결정짓습니다. 상훈은 그러한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덕규가 '전설의 주먹'의 PD인 홍규민(이요원)의 끈질긴 요청에도 불구하고 '전설의 주먹' 출연을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는 주먹이 얼마나 부질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전설의 주먹'에 출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돈입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딸의 꿈을 지켜주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결국 학창시절 전설적인 주먹으로 불리웠던 덕규와 상훈은 주먹의 부질없음을 잘 알면서도 결국 돈 때문에 다시 주먹을 휘두르게 됩니다. 그들이 서는 무대는 파이터들의 정정당당한 무대가 아닌, 돈 2억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판이 되어 버립니다. 그 속에는 그들의 처절한 싸움을 통해 시청률을 얻으려는 방송사의 이기심과 승부를 조작해서 거액의 돈을 거머쥐려는 불법 스포츠 도박의 검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피가 쏟아지고, 살이 터지고, 부상을 당해도 그들은 싸웁니다. 돈을 위해서... 그렇게 학창 시절 '전설의 주먹'이라 불리웠던 이들은 돈이라는 거대한 힘에 제압되어 버립니다.

 

 

최선을 다해 싸운다는 바로 당신이 전설이다.

 

[전설의 주먹]은 여러가지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영화입니다. 이제 막 40대에 접어든 저는 덕규와 상훈의 처지가 이해가 되었습니다. 2천만원의 돈 때문에 '전설의 주먹'에 참가하는 덕규. 진호의 명령 때문에 '전설의 주먹'에 참가하는 상훈. 이 모든 것은 우리 시대의 중년이 겪어야 하는 사회 생활의 한 단면입니다. 그래서 서글펐습니다.

덕규가 딸을 괴롭히는 학교 일진들을 혼내주는 장면에서는 굉장한 쾌감이 느껴졌습니다. 사실 그것은 판타지입니다. 40대의 몸으로 혈기왕성한 10대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당장 저만해도 집근처 작은 공원에 10대 아이들이 모여 있으며 덜컥 겁부터 나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덕규는 멋지게 그들을 혼내줍니다. 속이 뻥하고 뚫리더군요.

그리고 돈의 논리가 아닌 순수하게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전설의 주먹'에 참가한 재석의 모습은 멋있었습니다. 비록 학창 시절, 잘못된 선택으로 인하여 지금은 3류 건달로 살고 있지만, 어쩌면 그는 돈의 논리에 물들지 않은 아직은 순수한 40대일지도 모릅니다. (그가 결혼을 하지 않은 미혼이라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전설의 주먹]은 [친구]와 비슷한 마초 영화에서부터, [즐거운 인생]과 같은 중년의 현실적인 서글픔을 대변하기도 하고, [주먹이 운다] 식의 파이터 영화의 육중한 쾌감을 안겨주며 [전설의 주먹]은 영화의 장르를 이리 저리 넘으며 맹활약합니다. 영화가 끝나고나서도 여전히 사회라는 정글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일 것이 분명한 그들을 응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리고 바로 우리들이 사회라는 정글에서의 힘겨운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학창 시절의 얼뜨기 전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전설이 아닐까요?

 

[전설의 주먹]은 확실히 흥행의 마술사인 강우석 감독의 영화답게 상업 영화적 재미로 꽉 채워진 영화입니다. 서강국(성지루)을 내세워 영화의 부족한 코미디도 잡아주고, 덕규의 딸인 수빈(지우)을 통해 진한 부성애에 의한 감동도 안겨줍니다.

절대악이 부족한 상황에서 속칭 거북이라는 파이터를 내세운 것 역시 흥행 마술사다운 결정이었습니다. 거북이라는 캐릭터 덕분에 파이터쇼 장면의 쾌감과 박진감, 그리고 긴장감이 잘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특히 홍규민이라는 캐릭터가 단순 소모된 것은 굉장히 아쉽습니다. 이요원이라는 인지도가 있는 배우를 내세운 만큼 시청률 지상주의에 빠진 방송국의 이면을 잘 풍자할 수 있었을텐데, 홍규민은 남성만이 가득한 이 영화에서 카리스마를 잃지 않고 존재감을 드러낸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아도 긴 러닝타임에 홍규민이라는 캐릭터마저 부각시키면 걷잡을 수 없을만큼 러닝타임이 길어지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강우석 감독의 항변 또한 이해하는 바입니다.

최강 파이터를 정하는 8강 토너먼트의 마지막 결승전 장면이 너무 허무했던 것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결국 돈보다 중요한 것이 남자의 자존심과 우정이라는 선택은 당연하지만 그러한 선택의 장면이 너무 서둘러 마무리짓는 느낌이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샐러리맨의 융통성은 미소짓게 되는...) 암튼 그러한 작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영화가 끝난 새벽 12시 30분, 집으로 향한 제 발걸음은 결연해졌습니다. 저 역시 사회라는 정글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싸우겠다는 다짐을 다시한번 해봅니다.

 

오늘도 나는 사회라는 정글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는 중이다.

힘이 아닌 돈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이름의 정글.

이 곳에서 행복을 획득하는 자가 진정한 전설이 아닐까?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