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지운
주연 : 아놀드 슈왈제네거, 포레스트 휘태커, 저니 녹스빌, 에두아르도 노리에가
개봉 : 2013년 2월 21일
관람 : 2013년 2월 27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추억의 종로 거리
거의 한달 가까이 저를 괴롭혔던 회계결산 자료를 드디어 세무사 사무실에 맡기고 종로 거리를 거닐었습니다. 항상 이맘때면 그러한 일상이 반복됩니다. 학창 시절의 추억이 있는 종로 거리. 이제 자주 찾지 못하지만 저희 회사와 거래 관계에 있는 세무사 사무실이 종로에 있는 덕분에 저는 최소한 1년에 한번씩은 종로 거리의 추억을 만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 학창 시절의 종로는 영화의 거리였습니다. 당시에는 용돈이 부족해서 거의 대부분의 영화를 비디오 대여점을 이용해서 봤지만, 최신 영화의 정보는 종로 거리의 극장 간판들을 통해 얻곤 했었습니다. 제가 주로 다니던 코스는 종로 2가의 허리우드 극장부터 시작해서 종로 3가의 서울극장, 피카디리 극장, 단성사, 그리고 피카소 극장, 그리고는 을지로로 넘어가서 국도 극장과 명보 극장을 경유해서 명동의 중앙 극장과 충무로의 대한 극장으로 마무리를 짓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가끔 용돈이 넉넉한 날이면 충동적으로 영화 티켓을 끊어 영화를 보기도 했었죠.
요즘은 멀티플렉스 시대가 열리며 웬만하면 집 근처에 멀티플렉스 극장 하나쯤은 거의 있습니다. 저만해도 영화를 보기 위해 종로가 아닌 집 근처 멀티플렉스를 이용하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가끔은 종로 거리에서 극장의 간판을 보며, 운이 좋으면 영화 전단지를 얻을 수 있었던 그때의 추억이 그립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회계 결산 때문에 종로에 올때마다 종로 거리의 극장이 내뿜는 유혹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아티스트], [다우트], [주노], [어톤먼트] 등이 제가 종로 거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본 영화들입니다.
올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무사 사무실에 자료를 넘겨주고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 쌀쌀하던 날씨는 성큼 다가온 봄을 알리듯이 따스해졌고, 나른한 제 마음은 학창 시절의 그때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저는 또다시 종로 거리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습니다.(아니 어쩌면 그러한 유혹을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멀티플렉스인 롯데시네마에 편입된 피카디리 극장 앞에 선 저는 영화 티켓을 끊고, 영화 시작전 남는 시간동안 종로가 내다보이는 커피 전문점에서 향긋한 아메리카노 한잔의 여유를 즐겼습니다. 그날 제가 선택한 영화는 김지운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 [라스트 스탠드]였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종로 거리에서 제가 선택한 영화들은 집 근처 멀티플렉스에서는 상영하지 않는 잔잔한 영화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영화들에 비해 할리우드 액션 영화인 [라스트 스탠드]는 조금 동떨어져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라스트 스탠드]는 의외로 종로 거리와 굉장히 잘 맞아 떨어지는 영화였습니다. 비록 미국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흥행 참패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지만, 종로 거리의 분위기에 흠뻑 빠진 제게 [라스트 스탠드]는 아주 제격인 영화였습니다.
노인을 위한 액션은 있다.
제가 [라스트 스탠드]를 상당히 인상깊게 본 이유는 영화를 볼 당시의 극장 분위기도 한 몫을 했습니다. 평일 낮의 종로 극장. 한산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극장 안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관객들로 제법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 분들 역시 젊은 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극장을 찾으신 것이겠죠.
젊은 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극장을 찾은 할아버지, 할머니 관객들에게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대리만족을 주기에 충분한 배우입니다. 그는 1982년 [코난 : 바바리안]을 통해 액션 스타로 등극한 이후 [터미네이터], [코만도], [프레데터]. [토탈리콜] 등 수 많은 영화에서 근육질의 액션을 과시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세월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1994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트루 라이즈]를 정점으로 그의 인기는 점차 하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레이저], [배트맨 앤 로빈], [앤드 오브 데이즈], [6번째 날], [콜래트럴 데미지] 등이 기대이하의 흥행 성적을 올렸고, 결국 그는 2003년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되며 정치인으로 변신, 잠시 영화계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불륜, 아내와의 이혼 등 각종 스캔들에 휩쓸리며 정치 인생이 끝장나고, 결국 다시 고향과도 같은 영화계로 복귀했지만 그의 주연 복귀작인 [라스트 스탠드]가 미국에서 흥행에 참패하며 그의 앞날이 예전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음을 예고하기도 했습니다.
[라스트 스탠드]는 그러한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묘하게 맞물리는 영화입니다. [라스트 스탠드]에서 그가 맡은 캐릭터는 멕시코와 맞닿은 미국의 한적한 국경지대 마을의 보안관 레이 오웬스입니다.
그러나 그의 과거는 화려합니다. 한때 LA마약단속반에서 근무하며 화려한 경력을 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화려한 나날을 뒤로 하고 한적한 마을의 시골 보안관의 인생을 선택합니다.
보기만해도 위압감을 주던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근육은 66세라는 그의 나이에 갈맞게 자잘한 주름과 세월의 무게에 짖눌린 표정으로 대체되었습니다. 화려했던 액션 스타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모습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모습. 그것이 레이 오웬스입니다.
그러한 레이 오웬스가 세계적인 마약왕 코르테즈(에두아르도 노리에가)를 맞이하며 180도로 변합니다. 마치 '노장은 죽지 않았다.'라고 외치듯이 기세등등하던 코르테즈를 아예 박살냅니다. 재미있는 것은 관객들의 반응입니다. 레이가 코르테즈를 맞이하여 노익장을 발휘할때마다 극장을 채운 할아버지, 할머니 관객들은 박수를 치고, 호탕하게 웃으며 너무나도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솔직히 [라스트 스탠드]는 올드한 분위기의 액션 영화입니다. 요즘 액션 영화들이 빠른 편집과 최첨단 무기들을 내세워 끊임없이 때리고 부수는데 반에 [라스트 스탠드]는 서부극을 연상시키는 흙 바람이 나부끼는 조용한 긴장감으로 액션을 채워나갑니다. 어쩌면 그러한 올드한 분위기가 흥행 실패로 연결되었는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오히려 나이가 지긋한 관객들에겐 잊었던 쾌감을 되살리는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올드한 분위기가 오히려 독특하게 느껴지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라스트 스탠드]는 상당히 올드한 분위기의 액션영화입니다. 사실 요즘 액션영화는 현란함을 주로 내세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들을 정신없이 내몰며 액션이 줄 수 있는 극한의 쾌감을 관객에게 선사하곤 합니다. 그래서 요즘 액션영화를 보고나면 극장을 나서며 '우와'라는 감탄사와 함께 영화로 인하여 흐트러진 머리속을 한동안 정리해야합니다.
하지만 [라스트 스탠드]는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상당히 느릿느릿하게 진행됩니다. 이 영화에서 빠른 것은 코르테즈가 타고 미국을 횡단하는 슈퍼 스포츠카뿐입니다. 코르테즈가 운전하는 슈퍼카 ZR1은 헬기보다 빠르다고 합니다. 실제로 영화에서 헬기로 코르테즈를 쫓던 FBI가 ZR1을 놓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ZR1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이 느릿느릿합니다. 할리우드의 여느 액션영화가 그렇듯 [라스트 스탠드]에서도 미국의 자랑하는 FBI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느릿한 영화의 분위기에 맞춰져서인지 FBI조차 상당히 느릿느릿합니다. 특히 코르테즈의 극비호송 작전을 맡은 존 베니스터 요원 역을 포레스트 휘태커가 맡으며 그러한 느릿함이 더욱 강조됩니다.
날렵한 이미지의 다니엘 헤니도 FBI요원으로 출연하지만 느릿함이 강조된 이 영화에서 오히려 그의 존재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라스트 스탠드]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느릿함입니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유일하게 빠른 코르테즈와 그의 슈퍼카 ZR1이 더욱 돋보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레이를 코르테즈를 막기 위한 팀을 꾸려야합니다. 느릿한 영화답게 코르테즈를 막기 위한 병력을 보내는 것마저 느릿하기만 FBI. 레이가 믿을 것은 FBI가 아닌 시간이 정지한 듯한 변두리 마을의 사람들 뿐입니다.
결국 [라스트 스탠드]는 최첨단 무기와 스피드로 무장한 코르테즈 일당과 올드함과 느릿함을 간직한 레이 일행의 한판 대결이 됩니다.
레이가 꾸린 팀을 보면 여전사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여자 보안관 세라, 세라의 전 애인이자 마을의 말썽꾼인 프랭크, 그리고 겁쟁이 부보안관과 무기 매니아인 괴짜 루이스 딩컴(조니 녹스빌)뿐입니다. 하지만 코르테즈의 부하인 버렐(피터 스토메어)는 최첨단 무기와 강력한 용병들을 앞세워 레이를 압박합니다.
이 말도 안되는 대결이 쾌감이 될 수 있는 것은 옛 것이라 무시당하는 것들의 대반격입니다. 2차 세계대전에 쓰였다는 구식 따발총이 난사되며 악당들을 물리칠 때의 놀라움, 꼬부랑 할머니가 자신의 집에 침입한 용병을 한방에 처리해버리는 장면의 코믹함 등은 올드한 것의 대반격이라는 쾌감을 제대로 전해줄 수 있는 명장면이었습니다.
결국 케케묵은 서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코르테즈와 레이가 1대1로 맞대결을 펼치는 장면에 와서는 김지운 감독은 코르테즈에게도 느릿함을 선사합니다. ZR1의 스피드가 발휘되지 못하는 옥수수밭 장면은 느릿함에 갇힌 코르테즈의 당황스러움이 엿보입니다. 스피드에는 익숙하지만 느릿함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코르테즈의 모습은 마지막까지 느릿함의 쾌감으로 영화를 마무리짓습니다.
나는 가끔 느릿함을 꿈꾼다.
우리는 스피드를 강조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TV 광고에서 '빠름 빠름'을 외치듯이 우리의 삶 자체가 정신없이 빠릅니다. 2013년이 시작된 것이 엊그제같은데 벌써 2월이 끝나가는 것을 보며 내가 세월의 빠름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종로 거리에 서면 어느새 그러한 빠름은 잊혀집니다. 종로의 공원을 가득 채운 노인들의 움직임은 마치 멈춘 듯이 느릿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가끔 저는 그런 느린 움직임이 그립기도 합니다. 다니던 고등학교가 있는 자하문 터널에서 광화문을 거쳐 집인 석관동까지 느릿 느릿 걸으며 종로 거리 풍경을 감상하던 제 학창 시절의 느릿함. 이제는 남들보다 빠르지 않으면 뒤쳐지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가끔 저는 그날이 그리워집니다.
종로의 거리, 학창시절의 추억, 그리고 느릿한 액션 영화인 [라스트 스탠드]의 분위기와 극장 안을 가득 채웟던 느릿한 노인 관객들의 환호. [라스트 스탠드]는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새로웠던 영화입니다. 올드한 분위기의 영화를 봤지만, 영화를 보고 나온 제 느낌은 굉장히 새로운 느낌의 영화를 본 듯했습니다.
[라스트 스탠드]는 개봉 첫 주에 3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9위를 차지했습니다. 이 영화의 스크린 수와 상영횟수를 감안한다면 흥행 참패라는 말이 딱 알맞은 성적입니다. '빠름 빠름'을 외치는 시대에 찾아온 느릿한 액션. 아쉬운 것은 이 영화의 흥행 실패로 느릿한 액션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빠름의 시대에 느릿함을 내세운
김지운 감독의 뚝심이 돋보였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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