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3년 영화이야기

[스토커] - 인디아의 잔인한 본능을 일깨우는 성인식

쭈니-1 2013. 2. 22. 11:40

 

 

감독 : 박찬욱

주연 : 미아 바시코브스카, 매튜 구드, 니콜 키드먼, 더모트 멀로니

개봉 : 2013년 2월 28일

관람 : 2013년 2월 21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박찬욱 감독과 미아 바시코브스카의 레드카펫은 포기!

 

2월 20일 <마리끌레르 필름&뮤직 페스티벌>에 초대되어 그 머나먼 CGV 청담까지 가서 [안나 카레니나]를 보고 왔었습니다. 저녁 식사도 건너 뛴채 영화를 보고, 영화를 본 후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부지런히 집으로 향했지만 집에 도착하니 시간이 거의 새벽 1시가 다 되었더군요.

요즘 계속된 야근으로 혓바늘이 날 조짐이 보였었는데, [안나 카레니나]를 본 다음날 혓바늘이 제 입안 깊숙한 곳에 결국 자리잡고 말았습니다. 입 안의 따끔거리는 고통을 느끼며 저는 '앞으로 시사회는 되도록 안갈거야!'를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안나 카레니나]를 본 그 다음날에도 저는 CGV 여의도로 급하게 향하고 있었습니다. [스토커] 시사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안나 카레니나]를 본 후 얻은 혓바늘의 고통은 여전했지만 [스토커]라는 매혹적인 영화 앞에서 그깟 혓바늘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일주일만 기다리면 집 앞의 멀티플렉스에서 내가 원하는 시간대에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 있었을테지만, [스토커] 앞에서는 그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너무나도 길게만 느껴진 것입니다.

 

회사에서 칼퇴근을 하고 CGV 여의도에 도착한 시간은 7시가 채 안된 시간이었습니다. 시사회 시작은 8시 10분이니 시간이 넉넉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시사회 티켓을 받으니 제가 받을 수 있는 자리는 맨 앞에서 세번째 자리 뿐이었습니다.(그나마 맨 앞 좌석이 아닌 것에 감사해야했었습니다.) 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스토커]를 보기위해 일찌감치 CGV 여의도에 도착한 것입니다.

사실 그날은 박찬욱 감독과 주연 배우인 미아 바시코브스카의 레드카펫 등 다양한 행사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행사장에 몰려든 인파를 보며 저는 일찌감치 레드카펫 행사 관람은 포기했습니다. 작년 이맘때 [디스 민즈 워]의 리즈 위더스푼 레드카펫 행사에서 당한 굴욕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죠. 

레드카펫 행사 관람은 일찌감치 포기하고(그래도 아쉬움에 멀찌감치에서 사진 몇 장은 찍었습니다.) 구피와 너무나도 비싼 푸드코트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비싼 동네는 밥값도 비쌉니다.) 화장실 찾아 삼만리를 하고나서(길치는 CGV 여의도에 가면 안될 듯. 전 길 잃어버릴뻔 했습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스토커] 관람을 시작하였습니다. 

 

 

제목이 왜 '스토커'인가?

 

[스토커]를 보기 전에 언론 매체의 리뷰를 통해, 내용은 모호하고, 이미지는 난무하며, 스토리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보다는 상징에 의한 관객의 상상력에 맡기는 영화라는 평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토커]를 보기 전에 바짝 긴장을 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영화를 보고 영화 이야기를 쓸 때 제가 가장 민망할 때가 영화가 전혀 이해되지 않을 경우입니다. 영화를 이해못했는데 영화 이야기가 제대로 나올리 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본 [스토커]는 분명 이미지가 난무하고, 상징에 의한 관객의 상상력에 맡기는 영화는 맞지만 내용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제가 [스토커]를 보고 이해한 것에 대한 제 주관적인 시선을 영화 이야기 속에 풀어 넣을 생각입니다.

[스토커]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영화의 제목인 '스토커'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스토커'를 'stalker'로 이해하실지도 모르겠네요. 'stalker'는 남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다른 의미로는 슬그머니 접근하는 사냥꾼이라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스토커'는 'stalker'가 아닌'stoker'입니다. 영어 사진을 찾아보니 'stoker'의 뜻은 선박, 증기 기차의 화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의미하는 '스토커'는 주인공인 인디아(미아 바시코브스카)의 성입니다. 그러한 '스토커'라는 영화의 제목은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압축하고 있습니다. 제목이 주인공의 성이듯, [스토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가족, 혹은 핏줄입니다.

 

[스토커]의 시작은 인디아가 18세가 되는 생일날 아버지인 리차드(더모트 멀로니)가 죽으면서부터입니다. 아버지가 죽자 존재조차 몰랐던 삼촌 찰리(매튜 구드)가 나타납니다. 인디아의 어머니인 이블린(니콜 키드먼)은 매력적인 시동생 찰리를 반기지만 인디아는 찰리에게 풍기는 알수없는 위험성을 감지하고 경계합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인디아와 이블린, 그리고 찰리의 관계입니다. 인디아는 찰리를 경계하고, 이블린은 찰리를 반기지만, 찰리의 시선은 이블린이 아닌 인디아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디아는 자신과 같은 핏줄이기 때문이죠.

인디아와 이블린, 그리고 찰리를 엮는 것은 바로 가족입니다. 하지만 인디아와 찰리는 같은 핏줄을 가지고 있지만 이블린은 엄밀하게 따지면 이방인입니다. 그녀가 '스토커'라는 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핏줄에 의해서가 아닌, 리차드와의 결혼을 했기 때문이죠. [스토커]에서 이블린의 비중이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낮아지고, 인디아와 찰리의 관계와는 달리 조금은 겉도는 느낌이 드는 것은 그러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디아는 '스토커'의 핏줄을 가지고 있지만 이블린의 핏줄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찰리에게 이블린은 같은 핏줄이 아닌 완벽한 이방인이지만, 인디아에게 이블린은 이방인이 아닌 가족이죠. 그러한 가족의 의미는 영화의 마지막 인디아의 선택을 결정짓습니다.

 

 

꽃은 자신의 색을 결정지을 수 없다.

 

이 영화에서 핏줄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인디아의 캐릭터 때문입니다. 18세 소녀 인디아. 하지만 다른 18세 소녀의 생기발랄함과는 달리 인디아는 음침한 분위기를 몸 전체에서 뿜어 냅니다. 인디아의 학교 생활에서 드러나듯이 그녀는 우등생이지만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분위기는 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풍깁니다. 찰리는 친절한 미소와 매력적인 행동으로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감추고 있지만 그의 표정에서 언뜻 풍기는 분위기는 인디아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인디아가 본능적으로 찰리를 경계하면서도 그가 자신에게 다가서는 것을 분명하게 거부하지 못하는 것은 찰리가 자신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인디아는 이런 말을 합니다. '꽃이 자신의 색을 결정지을 수 없듯이, 내가 무엇이 되던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영화의 초반에는 그러한 말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모든 것이 뚜렷해집니다. 인디아의 핏줄 속에 내포된 잔인한 본능. 그것은 인디아의 잘못이 아닙니다. 꽃이 자신의 색을 선택하지 못하듯이 인디아 역시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인하여 '스토커'라는 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 뿐입니다. 결국 인디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핏줄 속에 잠자고 있던 잔인한 본능을 깨우게 됩니다.

영화의 초반에는 무언가에 갇힌 듯,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던 인디아가 찰리와 만나고, 그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본능 깊숙히 잠자고 있던 잔인한 본능을 깨닫습니다. 흙 묻은 옷을 벗어버리고 샤워 도중 자위 행위를 하는 인디아의 모습은 자신을 가두었던 단단한 벽을 그녀 스스로 결국 부셔버렸음을 뜻합니다.

 

리차드는 인디아에게 사냥을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인디아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린 가끔 나쁜 짓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더 나쁜 짓을 막을 수 있다.' 

결국 인디아를 가두고 있었던 것은 아버지인 리차드였습니다. 리차드는 인디아에게 찰리의 모습을 본 것이죠. 아무런 죄책감없이 살인을 할 수 있는 잔인한 본능. 리차드가 인디아에게 사냥을 가르친 것은 결국 그녀의 잔인한 본능을 해소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 되지만, 동물을 죽이면 사냥이 되는 것이니까요.

[스토커]는 인디아가 자신을 가두고 있던 두꺼운 벽을 깨고 자신 안에 잠들어 있던 잔인한 본능을 깨닫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의 시작이 그녀가 성인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18세 생일날인 것도 그렇기에 의미심장합니다. 그녀의 잔인한 본능을 억누르려했던 아버지 리차드의 죽음과, 반대로 그녀의 잔인한 본능을 일깨워주려는 삼촌 찰리의 등장 역시 그녀의 잔인한 본능을 일깨우는 성인식을 위한 장치인 것이죠.

이쯤되면 영화의 제목과 같은 음을 지닌 'stalker' 역시 이 영화에서 의미를 갖게 됩니다. 'stalker'는 슬그머니 접근하는 사냥꾼이라는 의미도 지닌 단어입니다. 인디아는 찰리와의 만남을 통해서 은밀하게 접근하는 진정한 사냥꾼이 된 셈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말합니다. '꽃이 자신의 색을 결정지을 수 없듯이, 내가 무엇이 되던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스토커('stalker' 혹은 'stoker')이기 때문에 자신의 잔인한 본능은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하는 것이죠.

 

 

인간의 잔인한 본능은 박찬욱 감독의 특기!

 

많은 분들이 [스토커]를 보고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보나 딱 박찬욱 감독의 영화이다.'라고... 네 맞습니다. 할리우드에서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것을 했다는 박찬욱 감독. 인간의 잔인한 본능을 표현하는 것이 그에겐 특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박찬욱 감독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복수 3부작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의 경우를 보죠. 박찬욱 감독은 사람들의 잔인한 본능을 일깨우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복수심을 선택합니다. 남을 향한 복수심.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복수를 꿈꿉니다. [복수는 나의 것]의 동진(송강호)이 그러합니다. 그는 평범한 중소기업체 사장이었지만 딸의 죽음으로 인하여 잔인한 복수를 하게 됩니다.

제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올드보이]의 경우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복수'에 대한 박찬욱 감독의 탐구가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이우진(유지태)이 오대수(최민식)에게 한 복수는 무려 1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에 완성된 상상 이상의 잔인한 복수였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복수를 하는 자(이우진)가 아닌 복수를 당하는 자(오대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관객에게 복수의 쾌감이 아닌, 복수의 잔인함을 느끼게끔 만듭니다.

 

박찬욱 감독이 잔인한 본능을 드러내는 대상으로 여성을 선택하기 시작한 것은 [친절한 금자씨]부터였습니다. 이영애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친절한 금자씨]는 가냘픈 여성이 잔인한 본능을 드러냈을 때의 섬뜩함을 감각적으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스토커]와 닮은 것은 [박쥐]입니다. 복수라는 매개체가 아닌, 그냥 인간의 깊숙한 본능에 잠들어 있는 잔인함을 끌어냈던 [박쥐]는 비록 뱀파이어라는 초현실적인 소재를 끌어다 썼지만 자신의 본능을 애써 억누르던 신부 상현(송강호)의 변화를 통해 인간의 잔인함을 충격적으로 그려냈습니다.

특히 [박쥐]에서 김옥빈이 연기했던 태주라는 캐릭터의 잔인함은 [스토커]와 교묘하게 연결됩니다. 자신을 억누르는 것으로부터의 탈출, 그리고 그 이후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잔인한 폭주. 태주와 인디아는 이렇게 닮아있었던 것입니다.

[스토커]는 자기 자신이 거부할 수 없었던 핏줄로 물려 받은 잔인함을 이야기합니다. 복수라는 감정을 통한 잔인함, 뱀파이어가 되어 어쩔수없이 억누룰수 없게된 잔인함을 거쳐 [스토커]는 가족이라는 관계에서 물려 받은 잔인함으로 발전시킨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스토커]는 할리우드라는 거대 시스템에서도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는 박찬욱 감독의 뚝심이 돋보였던 영화입니다.

 

 

'Who are you?' 이블린은 이 질문을 초반에 찰리와 후반에 인디아에게 한다.

물론 이블린의 억양은 같은 질문이지만 굉장한 차이가 있다.

찰리에겐 놀라움이, 인디아에겐 두려움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내 가족이라 생각했던 이가 낯설게 느껴졌을때의 공포.

니콜 키드먼은 [스토커]에서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희박했지만

'Who are you?'라는 질문를 하던 장면에서만큼은 그녀의 존재감은 빛났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