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조 라이트
주연 : 키이라 나이틀리, 애론 테일러 존슨, 주드 로
개봉 : 2013년 3월 21일
관람 : 2013년 2월 20일
등급 : 15세 관람가
<마리끌레르 필름&뮤직 페스티벌>에 초대되다.
며칠 전, <마리끌레르 필름&뮤직 페스티벌>의 개막작인 영화 [안나 카레니나]의 시사회에 초대한다는 메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마리끌레르 필름&뮤직 페스티벌>이라는 영화제 자체가 낯설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 라이트 감독의 [안나 카레니나]는 예전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였기에 시사회 참가를 심각하게 고려해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사회 일자가 너무 촉박했고, 장소 역시 회사에서 멀어 평일에 퇴근하고 시사회에 참가하기 무리가 따랐습니다. 결국 아쉽지만 시사회 참가가 불가능하다는 답장 메일을 써야만 했습니다. 그 이후부터였을 것입니다. [안나 카레니나]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아쉽게 놓쳤기 때문인지 [안나 카레니나]에 대해서 '보고싶다'라는 제 감정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마리끌레르 필름&뮤직 페스티벌>에서 다시 메일이 왔습니다. 이번엔 시사회가 아닌 영화제에 초청을 해준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영화제에서 상영될 19편의 영화 상영시간표와 장기하와 얼굴들, 클래지콰이 프로젝트 등 뮤지션 공연일정을 보내줬습니다. 제가 원하는 영화, 공연을 맘껏 고르라는 내용과 함께.
순간 저는 감동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안나 카레니나] 시사회에 초대해줬지만 결국 가지 못한 저를 위해 <마리끌레르 필름&뮤직 페스티벌>에서 보여준 저에 대한 배려는 그야말로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게다가 <마리끌레르 필름&뮤직 페스티벌>에서 준비한 영화의 상영 목록도 굉장히 독특했습니다. 개막작인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하여 현재 상영중인 영화 [더 헌트], 그리고 2012년 10월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서칭 포 슈가맨], 단편영화인 [손님], [초대], [주리], [존재의 심연], 그리고 미개봉작인 영화들과 슬래셔 무비인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까지...
대부분의 영화제는 어떠한 특정한 주제가 있는데 <마리끌레르 필름&페스티벌>은 국내에서 보기 힘든 다양한 영화들을 상영한다는 목적 아래, 말 그대로 어느 한 장르를 특정할 수 없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리끌레르 필름&뮤직 페스티벌>이 열리는 곳은 청담 CGV. 제가 사는 집과 제가 다니는 회사에서 멀어도 너무 멀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동네 멀티플렉스에서는 절대 볼 수 없을 다양한 영화의 향연들과 함께 <마리끌레르 필름&뮤직 페스티벌>을 맘껏 즐기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제가 선택한 것은 시사회에서 놓친 후 두고 두고 아쉬워한 [안나 카레니나] 뿐이었습니다. 비록 <마리끌레르 필름&뮤직 페스티벌>이 열리는 청담 CGV는 이전에 [안나 카레니나] 시사회 장소보다 훨씬 멀었지만, 그래도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제 기대감 때문인지, 아니면 저를 배려해준 <마리끌레르 필름&뮤직 페스티벌>에 대한 감동 때문인지, 청담 CGV로 향하는 제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습니다. 혹시 시간되시면 <마리끌레르 필름&뮤직 페스티벌>에 참여해보시길... 2월 26일까지 청담 CGV에서 다양한 영화들과 뮤지션들의 공연이 준비되어 있답니다.
내가 주목한 것은 톨스토이의 원작이 아닌 조 라이트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그 동안 수도 없이 많은 영화화가 이루어졌고, 그레나 가르보, 비비안 리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배우들이 비운의 여성 '안나'를 연기했었습니다.
하지만 제 기억 속의 '안나'는 소피 마르소가 안나를 연기한 1997년작 [안나 까레리나] 뿐입니다. [불멸의 사랑]에서 베토벤의 사랑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덕붙여 감각적 미스터리로 완성시켰던 버나드 로즈 감독의 [안나 까레리나]는 소피 마르소 외에도 숀 빈이 브론스키 역을, 알프레드 몰리나와 미아 커쉬너가 레빈과 키티 역을 연기했던 영화입니다.
하지만 원작이 지금으로부터 130여년 전인 탓인지 영화 속에서 그려낸 '안나'의 가슴 아픈 사랑은 제게 잘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영화 자체는 장대한 러시아의 설원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고, 제가 좋아했던 소피 마르소가 주연을 맡았건만 '안나'가 안타까운 최후의 선택을 하는 장면에서도 저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안나 카레니나] 역시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가 아니라면 그저 '고전을 원작으로 한 또 한편의 영화가 개봉하는구나.'라는 정도의 기대감만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감독이 조 라이트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특히 그가 고전을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그에 대한 기대감은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조 라이트... 그의 영화를 처음 만난 것은 2005년 [오만과 편견]이었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만과 편견]은 키이라 나이틀리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진정으로 조 라이트 감독을 좋아하게 된 것은 2008년 [어톤먼트]를 본 이후입니다. 한 남자를 동시에 사랑한 자매로 인한 처절한 비극을 담은 [어톤먼트]는 한동안 제게 먹먹함이라는 마음 속의 부작용을 안겨주기도 했을 정도로 슬펐던 영화입니다.
이후 조 라이트 감독은 [한나]를 통해 다시 한번 자신의 연출력을 발산시킵니다.(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솔로이시트]는 빼겠습니다. [솔로이스트]는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 중에서 제가 유일하게 지루하게 봤던 영화입니다.) 킬러로 키워진 열여섯 소녀 '한나'(시얼샤 로넌)의 액션을 담은 [한나]는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답게 무한 질주 액션이 아닌 조 라이트 만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액션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개봉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오만과 편견], [어톤먼트]에서 함께 했던 조 라이트와 키이라 나이틀리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게 되었고, [어톤먼트]에서 느꼈던 그 먹먹함을 다시금 느끼고 싶었습니다.
고전을 원작으로 한 실험극?
드디어 영화가 시작했습니다. 영화가 시작한지 한참이 지났지만 뒤늦게 입장하는 관객들 탓에 영화에 대한 초반 몰입에 애를 먹었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제게 당혹감을 안겨줬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 당혹감을 느낀 이유는 제가 기대했던 형식의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만과 편견], [어톤먼트]처럼 고전적인 분위기와 아름다운 화면의 영화를 기대했지만 조 라이트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답습하는 것에 대해 분명한 거부감을 드러냈습니다. 그 결과 [안나 카레니나]는 매우 독특한 영화가 되었습니다.
첫 장면부터 그러합니다. 안나(키이라 나이틀리)의 바람둥이 오빠가 가정교사와의 관계를 아내에게 들키는 장면은 마치 연극 속의 한 장면처럼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춤 추는 듯한 동작을 취하는 배우들과 하나의 무대 위에 몇몇 장치만으로 무대 효과를 바꾸는 장면들은 영화의 시작부터 '이거 뭐지?'라는 당혹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버나드 로즈의 [안나 까레리나]는 러시아의 설원을 최대한 장대하게 표현하며 영화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면 조 라이트 감독은 오히려 연극을 보는 듯한 제한된 공간 위에 원작이 가지고 있는 스펙타클한 배경을 최소화시킵니다. 영화는 소설, 연극과는 다르게 배경을 스펙타클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 라이트 감독은 스스로 그러한 영화의 장점을 발로 걷어찬 셈입니다.
하지만 그 대신 조 라이트 감독의 획득한 것은 꽤 많습니다. '안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기존의 영화들과 확실한 차별화를 이루었다는 것은 그가 획득한 첫번째 수확물입니다.
저는 비록 버나드 로즈 감독의 [안나 까레리나]만 봤지만 이 두 영화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극과 극일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영화의 내용이 바뀐 것도 아니고, 캐릭터가 추가된 것도 아닌데, 단지 색다른 무대 효과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영화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조 라이트 감독이 두번째로 획득한 것은 아기자기한 무대 장치로 인한 영화적 아름다움입니다. 버나드 로즈 감독의 [안나 까레리나]는 장대한 배경이 이야기와 캐릭터를 집어 삼켰습니다. 하지만 조 라이트 감독은 장대한 배경을 포기하고 연극과 같은 아기자기한 무대를 만들어 놓은 후 그 속에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안나와 브론스키(애론 테일러 존슨)의 무대회 장면과 경마 장면이 대표적인데 최소한으로 꾸며진 무대 위에 꾸며진 시각적 아름다움은 장대한 배경 그 이상의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영화의 무대가 최소화되는 대신 인물의 감정선이 살아나고, 장대한 배경으로 인한 아름다움은 무대 장치와 의상, 그리고 춤 추는 듯한 배우들의 의도적인 동작으로 커버합니다. 이 영화가 올해 아카데미에서 의상상, 촬영상, 미술상 등의 후보에 오른 것은 그러한 조 라이트의 실험이 성공을 거두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안나의 비극을 감성이 아닌 이성으로 바라보다.
조 라이트 감독은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고전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기존의 영화들은 물론, 자신이 연출했던 고전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의 답습마저도 거부하는 파격적인 실험을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톨스토이의 원작을 새롭게 해석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용납할 수 없었던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단, [안나 카레니나]가 버나드 로즈 감독의 영화와 달라진 것은 안나의 남편인 알렉시 카레닌(주드 로)의 캐릭터입니다. 알렉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안나를 용서하려 합니다. 안나가 젊은 장교인 브론스키와 불륜에 빠졌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안나가 스스로 선택을 하도록 최대한 배려합니다.
그러한 부분에서 주드 로의 연기력을 빛을 발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알렉시.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저는 숨이 막혀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안나를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안나의 배신에 분노하며 이성을 잃지 않았고, 안나를 용서하며 안나가 자신의 길을 선택하도록 최대한 배려합니다. 알렉시의 그러한 배려는 결국 알렉시를 버리고 브론스키를 선택하는 안나에 대한 제 시선을 더욱 이성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조 라이트 감독이 표현한 안나의 사랑은 '불륜도 사랑일까?' 따위가 아닙니다. 이것은 안나의 선택에 대한 문제입니다. 안나는 알렉시 대신 브론스키를 선택함으로서 자신이 얻을 것과 잃을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감안하고 결국 브론스키를 선택한 것입니다.
안나는 브론스키를 선택함으로서 열정적인 사랑을 얻었지만, 그와는 반대로 안정적이고 존경받는 삶과 아들과의 만남을 잃었습니다. 분명 안나도 그러한 결과를 알고 있었을테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그녀는 자신이 가진 것보다 자신이 잃은 것에 더욱 집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러한 그녀의 집착은 그녀를 파멸로 이끕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가 브론스키를 선택함으로서 파멸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장면에서 알렉시와 브론스키는 분명 안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안나의 파멸은 그 누구의 탓이 아닌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결과인 셈입니다. 그렇기에 안나가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안나의 비극적인 인생에 의한 먹먹함은 없습니다. 그 대신 한 여성의 파멸을 덤덤하게 바라보게끔 만듭니다.
[안나 카레니나]를 본 느낌은 한편의 아름다운 연극을 본 것 같았습니다. 이 연극 속에는 화려한 의상과 아름다운 무대 장치가 돋보였습니다. 그리고 안나의 비극적 인생을 감성적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이성적으로 지켜보게 만든 점 역시 특이합니다.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관객의 감정이입에 도움이 되는 감성적인 면을 부각시키지 않고, 오히려 관객이 이성적으로 안나의 파멸을 지켜보게끔 만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 라이트 감독의 이러한 실험은 분명 호불호가 갈라질 것 같지만, 일반 관객들이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독특한 영화를 선정했다는 <마리끌레르 필름&뮤직 페스티벌>의 취지와는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것 같습니다. [안나 카레니나]를 보고나니 <마리끌레르 필름&뮤직 페스티벌>의 다른 영화들도 궁금해지네요.
비록 [어톤먼트]만큼 고전적 재미에 흠뻑 빠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안나 카레니나]는 고전의 멋과 영화에서 만나기 어려운 독특함이 만난
너무나도 아름다운 한편의 거대한 연극을 본 느낌이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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