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박훈정
주연 : 이정재, 최민식, 황정민, 박성웅, 송지효
개봉 : 2013년 3월 21일
관람 : 2013년 3월 23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내가 박훈정 감독을 과소평가했나보다.
2011년 4월, 저는 [혈투]라는 제목의 영화를 봤습니다. 박훈정 감독이 연출했고, 박희순, 진구, 고창석이 주연을 맡은 이 사극 액션 영화는 꽤 독특한 설정의 영화였습니다. [혈투]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명나라의 강압으로 청나라와의 전쟁에 파병된 조선군. 오랜 친구 사이인 헌명(박희순)과 도영(진구)은 이 피 튀기는 전투 속에서 겨우 살아 남아 어느 버려진 객잔에 머물게 됩니다. 하지만 그 객잔엔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탈영한 조선군 두수(고창석)가 이미 와 있었습니다.
적지에서 아군을 만났다며 안심하는 세 사람. 하지만 속 마음은 서로 달랐습니다. 도영의 아버지를 역적으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했던 헌명과 그러한 사실을 눈치챈 도영, 그리고 자신이 탈영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죽음을 당할 것이라 생각하는 두수는 서로 살기 위해 아군을 죽여야 합니다.
[혈투]는 버려진 객잔이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아군임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세 캐릭터 간의 잔인한 심리 싸움을 다룬 영화입니다. 당시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제가 [혈투]를 주목한 이유는 신인 감독 박훈정의 필모그래피 때문입니다. 그는 [부당거래], [악마를 보았다] 등의 시나리오를 쓰며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악마적 본성을 끄집어내는데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평을 얻어낸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본 [혈투]는 기대와는 다르게 굉장히 순진(?)한 영화였습니다. 버려진 객잔이라는 한정된 장소의 긴장감은 헌명과 도영의 과거를 조명하는 과도한 플래쉬백으로 인하여 소멸되었습니다. 헌명과 도영 사이에 낀 두수의 코믹함은 [혈투]를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갔습니다.
결국 전 [혈투]를 본 이후 박훈정 감독의 굉장히 순진한 사람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마치 '나는 강하다.'라는 자기 최면 속에 쎈척 허세를 부리는 느낌을 [혈투]에서 느꼈기 때문이죠.
그래서 [혈투]에 대한 제 리뷰의 제목은 '난 박훈정 감독이 굉장히 순진한 사람같다'였고, 리뷰 말미에는 '차라리 박훈정 감독은 자신의 순진함을 내세운 밝은 영화를 연출하는 것이 나을 듯 하네요. [악마를 보았다]의 과대 평가에 도취되어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영화는 이제 그만 뒀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주제넘는 충고도 잊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바로 지금, 2년 전 내렸던 박훈정 감독에 대한 제 평가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바입니다. 지난 토요일 박훈정 감독의 신작 [신세계]를 봤기 때문입니다. [혈투]가 기대이하로 실망스러웠기에 [신세계]는 지난 목요일에 개봉하는 신작 중에서 [라스트 스탠드]와 [분노의 윤리학]에 밀려 기대작 3위에 불과했지만, 이 영화가 [7번방의 선물]을 물리치고 목요일과 금요일, 일일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영화들보다 먼저 [신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무간도]보다 몇 배는 암울하다.
[신세계]는 국내 최대 범죄조직인 골드문에 8년째 잠입 중인 경찰 이자성(이정재)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소재가 범죄 조직에 잠입한 경찰이라는 설정 때문에 [신세계]는 필연적으로 홍콩 느와르의 걸작 [무간도]와 비교되곤 합니다.
하지만 [신세계]는 [무간도]와 비슷한 설정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무간도]보다 훨씬 암울한 느와르 영화입니다. 그 이유는 이자성이 처한 상황 때문입니다.
이자성은 경찰청 수사기획과 강과장(최민식)의 명령으로 골드문에 잠입합니다. 경찰의 신분으로 범죄 조직에 잠입한 이자성. 그렇기에 그는 강과장을 믿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합니다. 강과장이 매번 마지막이라며 이자성을 철저하게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강과장 역시 이자성을 믿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감시할 인물을 끊임없이 그의 주변에 심어 놓습니다.
서로 간의 불신. 그것이 이자성과 강과장의 관계입니다. 이자성이 처한 상황이 암울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러한 강과장과의 불신에서 나옵니다. 적지에 홀로 투입된 그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강과장 뿐이지만, 결코 그를 믿을 수도 없는 상황. 그는 '깡패 새끼들도 나를 형님이라며 믿고 따르는데 너희는 왜 날 믿지 못하냐? 난 너희와 같은 편이잖아!'라고 울부짖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그에게 되돌아올 뿐입니다.
이자성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비록 골드문의 넘버3 정청(황정민)은 그를 형제처럼 대하지만 만약 그가 경찰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잔인하게 응징당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강과장만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강과장은 이자성을 철저하게 이용하기만 할 뿐입니다. 만약 이자성의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매몰차게 그를 버릴 인물이라는 사실을 이자성 역시 알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혼자입니다. 10년 동안 범죄조직에 잠입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던 [무간도]의 진영인(양조위)과는 달리 이자성은 오직 살아남기위해 몸부림을 칠 뿐입니다. 그에게 정체성의 혼란 따위는 어쩌면 사치에 불과합니다.
[신세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자성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넣습니다. 너무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이자성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믿을 수 있는 상황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칩니다. 그가 강과장과의 유일한 끈인 신우(송지효)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장면에서는 살아남고자 하는 이자성의 극에 도달한 처절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강과장은 말합니다. 이자성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라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목숨을 부지하더라고 회집의 수족관에서 잠시동안이나마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그물을 찢어 스스로 탈출할 수 있는 확률은 굉장히 희박합니다. 그것은 이자성이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살아남을 확률과 비슷합니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것은 믿음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 그러한 이자성에게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것은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분명 경찰인 그에게 내 편은 강과장이고, 네 편은 범죄조직의 일원인 정청입니다.
하지만 내 편인 강과장은 이자성을 믿지 못하고, 네 편인 정청은 이자성을 철썩같이 믿어줍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자성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박훈정 감독이 이자성을 굉장히 잔인하게 몰고가는 것은 그의 아내조차도 강과장이 심어 놓은 끄나풀이라는 설정에서 극에 달합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오직 믿을 수 있는 것은 가족 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족조차 박훈정 감독은 이자성을 압박하는 존재로 그려 넣은 것입니다.
영화의 초반, 이자성이 골드문에서 벗어나 경찰 조직에 복귀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아내의 뱃속에 있는 아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자식들에겐 존경받은 아빠가 되고 싶은 이자성의 절박함. 하지만 박훈정 감독은 그러한 이자성의 작은 희망마저도 철저하게 짖밟아버립니다.
[신세계]는 골드문의 석회장(이경영)이 죽은 이후 조직의 후계자 결정에 경찰이 개입하려합니다. 그러면서 이자성은 더욱 막다른 길에 몰리게 되고 위기에 처합니다.
이자성과 같은 편인 경찰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자성은 더욱 위기에 빠지는 상황. 결국 정청은 경찰청을 해킹해서 경찰 끄나풀들을 찾아냅니다. 골드문의 인천 창고에서 벌어지는 정청의 경찰 끄나풀 제거 장면은 이 영화에서 최고의 긴장감 넘치는 장면입니다. 이자성의 얼굴에 흐르는 식은 땀 만큼이나 그러한 광경을 지켜봐야 하는 저 역시 숨을 죽이며 두 손에 찬 땀을 조용히 닦아내야했습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을 것입니다. [신세계]의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이 완성되는 순간은. 그리고 그러한 결말의 중심에는 믿음이라는 키워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만약 강과장이 끝까지 이자성을 믿었다면, 그래서 이자성이 원하는대로 작전이 마무리되면 그를 다시 경찰에 복귀시켜주려 했다면, [신세계]의 결말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내 편이라 생각했던 조직의 불신, 네 편이라 생각했던 존재의 믿음. 그것으로 이자성의 정의는 뒤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남는 것, 그것이 정의이다.
조직에 잠입한 경찰이라는 어쩌면 조금은 흔한 소재로 박훈정 감독은 이자성이라는 캐릭터의 변화에 주목합니다. 막다른 길에 몰린 그는 단지 살아남고 싶었을 뿐입니다. 오직 이 잔인한 현실에서 살아남는 것, 그것이 그에게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이자성의 선택에 대해서 어쩌면 논란이 될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건 경찰이라는 조직은 선(善)이고 범죄조직인 골드문은 악(惡)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자성은 선을 포기하고 악을 선택한 셈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그것은 그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는 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겐 단 두개의 선택만이 남은 것입니다. 경찰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지키며 죽던가, 아니면 철저하게 악이 되어 살아 남던가. 이자성의 선택은 그저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본능인 셈입니다.
제가 [신세계]를 본 후 박훈정 감독이 순진한 사람일 것이라는 2년 전의 판단을 뒤집은 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입니다. 대개의 영화들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 경계를 중요시합니다. 요즘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진 영화들이 다수 등장하긴 했지만 [신세계]처럼 주인공의 입장에서 선과 악을 뒤집는 영화는 흔치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신세계]에서 이자성의 선택이 불편할 수 밖에 없습니다. 2시간의 러닝타임 내내 응원했던 이자성이 보편적인 선이 아닌 악을 선택하는 결말에 와서는 그를 응원할 수도, 그렇다고 그를 비난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죠.
박훈정 감독은 그러한 관객의 딜레마를 즐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잔인할 정도로 이자성을 막다른 길목으로 몰아넣고, 관객들에게 당신이라면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라며 미소를 짓습니다. 마치 [다크 나이트]의 조커(히스 레저)가 짓는 잔인한 웃음이 떠오를 정도였습니다.
죽어버린다면 내가 지키고 싶었던 정의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 그것이 이자성의 정의임을 영화가 끝나고 나면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박훈정 감독의 잔인함이 이자성을 삼켰듯이 영화를 보던 저마저도 삼켜 버렸습니다.
그들이 가고 싶었던 서로 다른 '신세계'
하지만 그저 살아 남고자하는 이자성의 '신세계'가
모든 '신세계'를 집어 삼켰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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