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3년 영화이야기

[분노의 윤리학] - '누가 제일 악인이지?'라는 질문은 지우고 영화를 보라.

쭈니-1 2013. 2. 26. 07:49

 

 

감독 : 박명랑

주연 : 이제훈, 조진웅, 김태훈, 곽도원, 문소리

개봉 : 2013년 2월 21일

관람 : 2013년 2월 24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누가 제일 악인이지?

 

미모의 여대생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에 관여한 네 남자가 있습니다. 그녀의 옆집에 사는 정훈(이제훈)은 그녀의 집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고는 매일 그녀를 훔쳐봅니다.

사채업자인 명록(조진웅)은 그녀를 이용해서 돈을 벌고 있고, 대학교수인 수택(곽도원)은 그녀의 몸을 통해 자신의 성적 쾌락을 만족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전 애인인 현수(김태훈)는 헤어진 그녀에게 집착하다가 결국 그녀를 죽입니다. 과연 누가 제일 악인일까요?

[분노의 윤리학]은 진아(고성희)라는 여대생의 죽음을 통해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네 명의 남자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관객에게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제일 악인이지?'

그런데 그러한 감독의 질문이 이상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정황을 보면 일단 살인을 저지른 현수가 가장 악인입니다. 법적으로 따져도 다른 남자들보다 살인을 저지른 현수가 가장 높은 형량을 받게 될 것이니 굳이 따지자면 이 영화의 질문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물론 사채업자인 명록도, 그녀를 몰래 훔쳐본 정훈도, 그녀와 간통을 저지른 수택도 모두 악인입니다. 하지만 '누가 제일 악인이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답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뻔한 질문을 던졌다면 영화 속에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입니다.

 

지난 일요일 저녁에 [분노의 윤리학]을 보러 가는 제 머리 속에는 박명랑 감독의 질문이 맴돌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뻔한 질문을 던진 이 영화, 저는 박명랑 감독이 이 뻔한 질문을 던진 이상 뭔가 다른 무엇이 영화 속에 숨어져 있을 것이라 확신했었습니다.

처음엔 텅빈 듯했던 극장 안이 점차 관객들이 점차 들어오더니 어느덧 극장안이 거의 가득 채워졌습니다. 특히 제 뒷자리에는 단체 관람을 오신 중년 여성 관객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과연 진아를 몰래 지켜본 정훈, 진아의 간통을 저지른 수택, 그리고 진아를 이용해서 돈을 벌었던 명록은 진아를 살해한 현수와 똑같이 취급될 정도로 악인일까? 아니면 현수에게 진아를 죽이고도 다른 남자들과 비슷한 취급을 받을 정도의 애절한 사연이 있을까? 예상 외로 가득 채워진 극장의 조금은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저는 [분노의 윤리학] 속에 박명랑 감독이 던진 질문에 도전하기 위해 집중, 또 집중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박명랑 감독은 제가 기대했던, 뻔한 질문 그 이상의 무엇을 제게 선사하지 못했습니다. 분명 영화는 한 명의 여성을 둘러싼 네 남성을 통해 평범해 보이는 그들의 얼굴 뒤에 감춰진 악한 본성을 블랙 코미디적 분위기와 시간적인 순서가 아닌 캐릭터의 순서로 나열한 독특한 편집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분노의 윤리학]은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누가 제일 악인이지?' 라는 질문은 왜 필요한가?

 

저는 '누가 제일 악인이지?'라는 [분노의 윤리학]이 가지고 있는 관객을 향한 질문에 호기심을 느끼고 이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분노의 윤리학]에서 기대한 것은 영화를 보고나서 진아를 죽인 현수보다 정훈, 명록, 수택이 더 악인일지도 모르겠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게 느껴야만 감독의 질문은 효력이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분노의 윤리학]은 커다란 숙제를 안고 시작한 셈입니다. 살인을 저지른 현수보다 정훈과 명록, 수택을 더 악인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그 어떤 장치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죠. 그것이 현수의 어쩔 수 없는 사정이던, 아니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악랄한 정훈과 명록, 수택의 숨겨진 이면이던, 무엇이던간에 박명랑 감독은 관객인 저를 헷갈리게 할만한 장치를 준비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분노의 윤리학]은 아주 공평하게 진아를 둘러싼 네 남자의 사정을 번갈아가며 보여주기만 합니다. 정훈은 그저 훔쳐 보기만 했고, 명록은 그저 돈을 벌려고 했으며, 수택은 그저 그녀의 몸을 탐했습니다. 그들 모두 악인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사랑했기에 진아를 죽였다는 현수와 비교해서 더 악하다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는 현수에게 다른 캐릭터보다 높은 비중을 주며 그의 어쩔 수 없는 사정을 어필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현수는 정훈, 명록, 수택과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영화 속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의 살인이 감정적으로 관객의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된 이상 박명랑 감독의 질문은 공허한 메아리가 됩니다. 직접 죽인 현수는 물론, 명록과 수택은 진아의 죽음의 공범이며, 진아의 죽음을 막지 않고 지켜보기만한 정훈 역시 면죄부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분명 모두가 악인이지만 '누가 가장 악인이지?'라는 질문의 답은 당연히 현수로 귀결될 뿐입니다. 

너무 객관적인 태도로 영화의 캐릭터들을 쫓는 카메라의 무미건조한 시선 속에 이제 믿을 구석은 의외의 인물 선화(문소리) 뿐입니다. 수택의 아내인 그녀는 재력과 권력을 갖춘 유력한 집안의 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통해 네 악인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분노의 윤리학]을 보며 선화의 등장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 이유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의 등장이 너무 늦어 버렸다는 점입니다. 모든 것이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에서 등장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네 남자들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 놓는 것 뿐입니다. 영화의 후반 스튜디오씬은 그렇기에 제게 더욱 큰 실망감을 안겨줬습니다. 히든 카드인 선화를 그렇게밖에 쓰지 못하다니...

 

 

억지 설정으로 무너지는 영화의 후반부

 

현수의 누명을 쓰고 점차 몰락해가는 수택, 진아의 죽음이 명록 탓이라 생각하는 현수, 그리고 현수를 이용해서 돈벌이를 하려는 명록, 명록이 가지간 진아의 모습이 담긴 CD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정훈. 

[분노의 윤리학]은 흥미진진한 질문을 던진 영화답지 않게 영화 후반에 가면 갈수록 네 남자의 서로 뒤엉킨 관계로 영화를 풀어나가려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뒤엉킨 관계의 절정은 스튜디오에서의 난투극입니다.

문제는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할 수 있는 스튜디오씬이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정훈의 등장부터 억지 설정이 보이더니 결국 모두가 피범벅이된채 선화를 맞이하기게 이릅니다. 선화는 이미 네 남자들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뛰어들어 그들을 제어합니다. 그녀의 권력과 돈이라면 이런 억지 설정이 아니어도 충분히 네 남자들을 제어할 수 있을텐데, 영화는 그러지 못합니다.

결국 이 영화는 뒷심 부족을 드러내며 영화의 후반을 스스로 망쳐 버립니다. 물론 영화의 초, 중반도 그렇게 뛰어난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선화라는 히든 카드를 숨겨 놓았기 때문에 흥미를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화라는 히든 카드가 쓰여진 후반부의 억지 설정은 더이상 이 영화에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음을 드러내고 맙니다.

 

물론 박명랑 감독의 의도는 잘 알겠습니다. 이른바 몰카, 야동을 웹하드에서 받아보며 희희낙락하는 남자들의 추한 모습을 연상하게 만드는 정훈, 금전 만능 주의를 대표하는 명록, 쾌락 제일 주의를 대표하는 수택 역시 현수와 마찬가지로 진아를 죽인 범인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겠죠.

영화의 마지막에 제 2의 진아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손 쉽게 돈을 벌려고 했던 진아 역시 악인의 범주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결국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는 악인인 셈입니다. 

이쯤되면 제가 박명랑 감독에게 오히려 묻고 싶어집니다. 과연 박명랑 감독은 누가 제일 악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몰래 훔쳐본 정훈의 죄와 사채업자인 명록의 죄, 그리고 간통을 저지른 수택의 죄가 살인을 저지른 현수의 죄보다 무겁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정말 정훈, 명록, 수택의 죄가 현수보다 무섭다고 생각한다면, 아니 최소한 동등하다고 생각한다면 왜 영화를 보는 나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 제 뒷자리의 중년 여성 관객들은 간통을 저지르고도 뻔뻔한 수택을 가장 악인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였지만(실제로 수택이 나오는 장면마다 뒤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습니다.) 저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누가 제일 악인이지?'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영화를 관람했던 저는 뻔한 질문에 예상 외의 답변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뻔한 답변만 보여주는 [분노의 윤리학]에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박명랑 감독의 질문을 지우고 영화를 보라.

 

영화 이야기를 쓰다보니 [분노의 윤리학]에 대해서 과도하게 실망감을 표출한 듯 합니다. 사실 [분노의 윤리학]은 제 글처럼 그렇게 엉망인 영화는 아닙니다. 단지 저처럼 '누가 제일 악인이지?'라는 질문에 집착하고 영화를 본다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영화에 실망을 할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만약 박명랑 감독의 질문을 지우고 영화를 본다면 [분노의 윤리학]은 꽤 신선한 블랙 코미디의 자격은 충분히 될 수있습니다. 번듯하게 보이지만 결국은 속물, 혹은 악인일 수 밖에 없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이 영화는 여대생 살인사건을 통해 꽤 잘 표현한 셈입니다.

특히 명록 역을 맡은 조진웅의 연기는 발군인데, 분노라는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 그리스 로마 신화까지 빗대며 설명하다가 난데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은 조진웅의 진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스튜디오 장면에서도 유일하게 빛나는 것은 조진웅이었습니다. 극한의 장면에서조차 웃음을 안겨주는 그가 없었다면 스튜디오 장면은 실망을 넘어서 짜증이 될 뻔했습니다.

이렇듯 [분노의 윤리학]은 '누가 제일 악인이지?'라는 맹랑한 질문을 지우고 영화를 본다면 신인 감독의 호기어린 블랙 코미디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뒷심부족은 어쩔수 없는 일이지만... 

 

 

도청, 사채, 살인, 간음, 결벽.

누가 가장 악인이지?

이 질문의 답을 구한다면 그들이 저지른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를 고르면 된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