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3년 영화이야기

[베를린] - 그들의 무대는 '베를린'이어야 했다.

쭈니-1 2013. 2. 5. 11:20

 

 

감독 : 류승완

주연 : 하정우, 한석규, 류승범, 전지현

개봉 : 2013년 1월 30일

관람 : 2013년 2월 3일

등급 : 15세 관람가

 

 

벌써 200만 돌파?

 

일요일 저녁. 하늘에서는 눈이 펑펑 내립니다. 거리를 하얗게 물들이는 때늦은 함박눈을 보며 저는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내일 출근길 때문에? 아닙니다. 일요일 밤에 구피와 [베를린]을 보러 가기로 했는데, 이렇게 눈이 내리면 구피가 '[베를린]은 나중에 보자.'라고 할까봐 걱정이 된 것입니다.

저녁 9시가 넘어가지만 구피는 [베를린]보러 가자는 말을 안합니다. 이틀 전인 금요일 회식 때문에 늦게 들어온 것에 대한 보복과 갑자기 펑펑 내린 눈 때문이라고 생각한 저는 [베를린] 관람을 포기하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에휴~ [베를린]은 그냥 나중에 봐야 겠다." 마치 체념하듯이 지나가는 말로 소심하게 중얼거리는 제 목소리를 구피는 들었는지, "맞아. 오늘 [베를린]보러 가기로 했지? 왜 말 안했어. 빨라 가자."라며 말해줍니다. 그 순간 제 얼굴에는 환한 미소와 함께 행복감이 마구 밀려왔습니다.

맞습니다. 제게 [베를린]은 초기대작입니다. 비록 [문라이즈 킹덤]과 [부도리의 꿈]을 보느라 1월 마지막주 기대작 중에서 가장 늦게 극장에서 본 영화가 되고 말았지만, 누가 뭐래도 저는 [베를린]을 기대하고, 또 기대하며 [베를린]을 볼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제가 [베를린]을 기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이 바로 류승완 감독의 영화라는 점 때문입니다.    

류승완 감독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통해 한국 영화계의 떠오르는 희망이 된 이후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거쳐 [주먹이 운다], [짝패],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부당거래] 등 굵직한 남성적 액션 영화에서 능력을 발휘한 감독입니다.

특히 그의 최근작인 [부당거래]는 청룡영화제 작품상, 감독상 등을 수상하며 류승완 감독의 최고 걸작 대열에 들어섰습니다. 저는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본 후 '어쭈! 이 감독 제법인데...'라고 주목한 이후 [주먹이 운다]를 본 후 그의 영화에 홀딱 반했었습니다. 그러한 류승완 감독이 하정우, 한석규, 류승범, 전지현 등 톱배우들과 함께 한국적 첩보액션 블록버스터를 찍었다고 하니 제가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개봉 5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흥행 소식까지 들려오니 [베를린]에 대한 제 기대감을 더욱 부풀어 올랐습니다. 자! 그렇다면 과연 [베를린]은 이렇게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은 제 기대감을 만족시켰을까요?

 

 

드라마를 생략해도 드라마가 완성된다.

 

[베를린]에 대한 제 첫 느낌은 '처음부터 너무 달린다.'였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베를린]은 시작부터 베를린에 상주하는 국정원 요원 정진수(한석규)가 북한의 불법무기 거래현장을 급습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후 영화는 마구 달리기만 합니다. 숨을 쉴 틈도 주지 않고 정진수와 북한의 비밀요원 표종성(하정우)의 대결, 그리고 북한에서 새롭게 파견된 동명수(류승범)의 등장과 음모에 빠진 표종성과 그의 아내 련정희(전지현) 등을 숨가쁘게 보여줍니다.

[베를린]을 보기 전에 '액션은 완벽하지만 드라마가 부족하다.'라는 평을 읽은터라 '이래서 그러한 평이 나왔구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저는 부족할 것이라 미리 짐작하고 포기했던 [베를린]의 드라마적 요소에 푹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제게도 특별한 경험이었니다.

사실 [베를린]은 드라마적 요소 뿐만 아니라 캐릭터 마저 마구 건너 뛰는 영화입니다. 저는 표종성과 련정희가 어떤 인물인지, 표종성과 련정희 사이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반역자로 몰린 련정희를 구하기 위한 표종성의 사투를 봐야 했습니다. 캐릭터를 상당히 중요하게 보는 제 영화적 취향상 이런 식의 전개는 대개 '캐릭터가 아쉽다.'라는 평을 이끌어내게 됩니다.

 

하지만 [베를린]을 달랐습니다. 분명 그 어디에도 캐릭터를 설명한 부분이 없고, 숨 쉴 틈없이 앞으로 달려 나가느라 드라마 역시 부족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베를린]을 보며 어느 사이에 표종성의 캐릭터에 빠져 들었고, 표종성과 련정희 사이의 드라마에 가슴 졸여야 했습니다.

이렇게 캐릭터와 드라마를 생략했으면서도 오히려 제게 [베를린]의 캐릭터와 드라마적 요소에 흠뻑 빠지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배우들의 명연기와 류승완 감독의 치밀한 연출력 덕분입니다.

먼저 하정우의 연기는 그야말로 명불허전입니다. 그는 영화가 굳이 표종성이라는 캐릭터를 설명하지 않아도 자신의 연기만으로도 표종성을 완성해냅니다. 영화의 초반, 얼굴엔 조국에 대한 충성이 가득했고, 말투엔 자신의 행동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동명수로 인하여 련정희를 의심하게 되는 부분에서는 자신만만했던 표정과 말투는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련정희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면서 강렬했던 그의 눈빛은 죄책감으로 일그러졌습니다. 이렇게 하정우는 단지 연기력 만으로 표종성이라는 복잡한 캐릭터를 완성해낸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치밀하게 구성된 류승완 감독의 연출력은 시너지 효과를 자아냅니다. 표종성과 동명성, 그리고 북한내 권력 다툼에 끼게 된 정진수 요원까지. [베를린]은 북한과 남한의 관계, 그 속에 아랍과 이스라엘, 그리고 CIA 등 다양한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복잡한 구성을 띠고 있지만, 그 어디에도 허점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잡한 구성을 마치 차분하게 실타래를 풀어 나가듯이 차근 차근 관객 앞에 풀어 보여줍니다. 영화를 보며 탄성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이번엔 확실한 선과 악의 구분이 편했다.

 

[베를린]은 북한의 특수요원 표종성을 영화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모험입니다. 남과 북의 미묘한 정치적 상황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우리나라에서 북한의 비밀요원 표종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흥행에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중간첩]의 흥행실패가 바로 한 예입니다. 

그래서 저는 [베를린]이 국정원 요원 정진수를 중심으로 영화가 진행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제 예상과는 달리 표종성이 주인공으로 영화의 중심에 놓인 것입니다. 그 대신 류승완 감독은 선과 악을 확실하게 구분지어 놓았습니다. 저는 선과 악의 모호한 구분을 즐기는 편인데, [베를린]에서 만큼은 선과 악의 확실한 구분이 영화에 집중하는데 편했습니다.

[베를린]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표종성을 선, 동명수를 악, 정진수를 조력자, 련정희를 희생자라는 확실한 구분을 만들어 놓습니다. 영화 자체는 남과 북, 아랍과 이스라엘, CIA등이 뒤섞이고 온갖 음모가 도사리고 있지만, 그러한 복잡한 구성을 즐겨야 하는 제 입장에서는 이러한 선과 악의 확실한 구분이 편안하게 느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표종성은 련정희를 지켜주면서 동명수를 무찔러야 하고 그러한 와중에 정진수는 표종성을 도와줄 것이다.' 이러한 대전제는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베를린]의 구성을 제가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주고 영화를 즐기는데 있어서 편안함을 안겨준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필수 조건입니다. 표종성을 연기한 하정우는 북한의 비밀 요원이라는 신분을 뛰어 넘어 영화를 보는 관객의 응원을 받아야 하고, 동명수를 연기한 류승범은 철저하게 악당이어야 했으며, 련정희를 연기한 전지현은 관객들에게 보호본능을 일으켜야 하고, 정진수를 연기한 한석규는 듬직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베를린]의 주연 배우들은 저마다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냅니다. 특히 련정희를 연기한 전지현의 경우는 지금까지 보여준 이미지와는 달리 제 보호본능을 효과적으로 이끌어 냅니다. 련정희를 지켜야 하는 표종성의 마음이 간절하게 느껴질 정도로...

앞서 구분지어진 캐릭터의 역할 분담은 영화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오두막집과 갈대숲에서의 막판 대혈전에서도 유효했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설정은 너무 뻔했을지도 모릅니다. 련정희는 인질이 되고, 표종성은 련정희를 구히기 위해 위험 속으로 뛰어 들고, 정진수는 그러한 표종성을 도와주고...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너무 뻔하다는 것은 그러한 설정이 관객에게 편안함을 안겨준다는 것을 뜻합니다. 관객이 그러한 설정을 좋아하니 수 많은 영화에서 뻔한 설정을 자주 써먹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베를린]이 그러합니다. 아직 우리에겐 낯선 첩보 액션. '베를린'이라는 낯선 땅과 영화를 구성하는 각 국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음모. 류승완 감독은 그러한 복잡한 구성 가운데 확실한 선과 악의 구축을 통한 캐릭터를 단순화시켰고, 관객들이 최대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익숙한 설정으로 영화를 이끌어갑니다. 저는 그것이 좋았습니다.

 

 

그들의 무대는 '베를린'이어야 했다.

 

[베를린]를 보고나서 저는 이 영화가 너무 만족스러웠습니다. 감독이 류승완인 만큼 영화의 액션이 대단할 것이라 기대했는데, 역시나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드라마적 요소마저 표종성에 감정이입을 하고나니 영화의 마지막 그 순간까지 련정희에 대한 미안함과 애틋함으로 마음을 졸여야 했습니다.

권력을 등에 업고, 표종성에게 배운 기술을 토대로 표종성의 목을 조여 오는 동명수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악독했고, 능글맞은 정진수는 너무나도 믿음직했습니다. 이 모든 조합을 만들어낸 류승완 감독이 존경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저와 함께 본 구피도 [베를린]이 재미있었다고 합니다. 구피는 "그런데 회사 동료가 이 영화를 보고나서 왜 굳이 '베를린'에서 찍었는지 이해가 안된대."라고 말하더군요. 그러고보니 [베를린]의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영화의 배경인 '베를린'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린 것 같네요.

영화의 제목이 '베를린'을 정도로 이 영화에서 '베를린'이라는 공간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물론 몇 십년 전만해도 우리와 같은 분단 국가였던 독일의 상황이 아직까지도 남과 북으로 나눠 이념 전쟁을 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이 맞아 떨어지기도 했지만, 만약 [베를린]의 무대가 한국의 서울이었다면 저는 지금처럼 영화에 대한 만족을 느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그만큼 [베를린]의 무대를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영화의 긴장감 때문입니다. 영화의 무대가 '베를린'인 만큼 영화의 거리는 백인들이 활보합니다. 그러한 백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 저는 그것 자체에 긴장감을 느꼈습니다.

낯선 땅에서 한국사람을 만나면 반가워야 하지만, 남과 북으로 갈라져 첨예한 이념 갈등을 벌이고 있는 우리는 낯선 땅에서 한국사람을 만나면 긴장을 해야 합니다. 그가 남한 사람인지, 북한 사람인지, 알수가 없기 때문이죠.

[베를린]에서 리학수(이경영)의 추격전이 그러했습니다. 낯선 백인 사이에 존재하는 한국사람들의 모습. 동족인 그들의 날카로운 시선은 리학수가 느꼈을 두려움 만큼이나 영화를 보는 제게도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습니다. 만약 영화의 배경이 서울이었다면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긴장감이 '베를린'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베를린]은 아직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표종성의 복수와 더불어 정진수 역시 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류승완 감독은 마지막의 여운을 짙게 남겨 놓았습니다. 남도 북도 권력에 눈이 먼 부정부패한 고위 지도층이 존재하고, 그들은 언제나 힘 없는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의 죄를 덮으려 합니다. 표종성이 그러한 부패한 권력에 맞서 싸운다면 그가 북한의 비밀요원이라도 저는 그를 앞으로도 응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베를린]의 진정한 가치입니다. 우리에게 표종성과 정진수라는 영웅을 안겨줬으니...

 

류승완 감독의 마지막 여운이 2편에서 어서 빨리 이어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