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웨스 앤더슨
주연 : 자레드 길만, 카라 헤이워드, 브루스 윌리스, 에드워드 노튼, 빌 머레이, 프란시스 맥도먼드, 틸다 스윈튼
개봉 : 2013년 1월 31일
관람 : 2013년 1월 31일
등급 : 15세 관람가
아트하우스 모모와의 인연
지난 1월 12일. 저는 웅이에게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다큐멘터리 [잊혀진 꿈의 동굴]을 보여주기로 굳게 다짐을 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잊혀진 꿈의 동굴]을 상영하는 곳은 많지 않았고, 결국 저는 [잊혀진 꿈의 동굴]을 보기 위해서 아트하우스 모모 라는 아주 낯선 극장을 찾아가야 했습니다.
이화여대 내에 위치한 아트하우스 모모. 모두가 길치인 저희 가족은 이 낯선 극장을 찾기 위해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겨우 도착, 결국 영화가 시작하고 난 다음에야 뒤늦게 [잊혀진 꿈의 동굴]을 보기 위해 극장 안으로 입장할 수가 있었습니다.
[잊혀진 꿈의 동굴]을 본 후 그것으로 아트하우스 모모와의 인연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잊혀진 꿈의 동굴]을 보기 위해 아트하우스 모모에 회원 가입을 하긴 했지만, 집 근처 멀티플렉스가 무려 4개(CGV 목동, CGV 김포공항, 메가박스 목동, 롯데시네마 김포공항)나 있는 저로서는 이 먼 곳까지 와서 영화를 보는 일이 앞으로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아트하우스 모모로 부터 뜻밖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제가 [잊혀진 꿈의 동굴] 예매 이벤트에 당첨되었다며 이벤트 상품인 [시스터]라는 제목의 영화 DVD를 받으려면 직접 극장에 방문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거 난감했습니다. 2012년 8월 9일에 개봉한 프랑스 영화 [시스터]에 솔직히 관심이 없고, 집에서 먼 아트하우스 모모까지 다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벤트 상품을 그냥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문라이즈 킹덤]이 개봉한 것입니다. 미국에서 개봉 당시 조용히 흥행 돌풍을 일으켰던 이 영화에 대해서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영화의 독특함 때문인지 저희 집 근처 멀티플렉스에서는 [문라이즈 킹덤]이 상영하는 곳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는 [문라이즈 킹덤]이 상영하더군요. 이건 무슨 하늘의 계시 같은... 그래서 [시스터] DVD도 받을 겸, [문라이즈 킹덤]도 볼 겸, 목요일에 퇴근 후 웅이하고 노는 것도 포기하고, 저녁식사도 포기하고, 아트하우스 모모로 향했습니다.
슬픈 블랙코미디 [로얄 테넌바움]을 아는가?
제가 [문라이즈 킹덤]을 기대했던 이유는 미국에서의 조용한 흥행 돌풍 소식과 브루스 윌리스, 에드워드 노튼, 빌 머레이 등등 할리우드의 내놓으라 하는 톱스타 배우들이 조연으로 열연을 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문라이즈 킹덤]의 감독이 웨스 앤더슨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웨스 앤더슨은 우리나라에선 그다지 잘 알려진 감독은 아닙니다. 그가 연출을 맡은 [다즐링 주식회사], [판타스틱 Mr. 폭스] 등이 국내에 개봉하긴 했지만 흥행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10년 전부터 그의 영화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바로 [로얄 테넌바움]이라는 영화를 통해서입니다.
[로얄 테넌바움]... 굉장히 낯선 제목의 영화죠? 아마 그럴겁니다. 이 영화는 2002년 3월 29일에 개봉했지만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가 항상 그렇듯 국내 흥행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로얄 테넌바움]의 캐스팅은 [문라이즈 킹덤] 못지 않게 화려합니다. 진 핵크만, 안젤리카 휴스턴, 벤 스틸러, 기네스 팰트로우, 루크 윌슨, 오웬 윌슨, 빌 머레이, 대니 글로버까지... 저 배우들을 어떻게 한 자리에 모아놓았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로얄 테넌바움]의 매력은 화려한 캐스팅 뿐만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코미디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겨진 정서는 아련한 슬픔입니다.
부모의 별거로 뿔뿔이 흩어져 살던 테넌바움가의 세 명의 남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각자의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된 그들은 실패한 천재들이 되어 있었죠. 불치의 병에 걸린 테넌바움 가문의 가장 '로얄 테넌바움'이 죽기 전에 이 일그러진 가족사를 바로 잡으려 하는 소동기를 그린 영화가 바로 [로얄 테넌바움]입니다.
하지만 [로얄 테넌바움]은 간단한 줄거리 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영화입니다. 캐릭터는 독특하고, 영화의 장르는 코미디이지만 폭소를 일으키는 장면은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보면 테넌바움 가문의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품게 되고, 그들을 사랑하게 됨으로서 그들이 겪었을 슬픔이 가슴에 와닿게 됩니다.
[문라이즈 킹덤]도 딱 [로얄 테넌바움]과 같은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기본적인 줄거리는 문제만 일으키는 12살 소년, 소녀가 가출을 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입니다. 하지만 [문라이즈 킹덤]은 이런 간단한 줄거리로 설명이 되지 않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샘(자레드 길만)과 수지(카라 헤이워드)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고, 그들이 겪었을 아픔이 와닿게 됩니다.
귀엽다고? 아니 나는 슬펐다.
[문라이즈 킹덤]을 보면서 극장 안의 관객들은 샘과 수지의 천진난만한 첫사랑 소동기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고 '귀여워'를 연발합니다. 네, 맞습니다. [문라이즈 킹덤]은 귀엽고 깜찍한 영화입니다. 기본적으로 12살 샘과 수지가 귀엽고, 그들이 행하는 사랑의 도피가 귀엽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가 귀엽다는 것은 어른의 시선으로 본 결과입니다. 우리 어른들이 보기에 그들은 그저 귀엽기만 하지만 당사자인 샘과 수지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샘은 고아입니다. 부모님은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결국 그는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의 독특한 개성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합니다. 위탁가정에서도 그를 받아들이긴 거부하고, 카키 스카우트 대원들 사이에서도 그는 왕따입니다. 하지만 그건 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의 독특한 개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위 사람들의 잘못입니다.
수지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입니다. 하지만 변호사인 부모님(빌 머레이, 프란시스 맥도먼드)은 수지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녀는 시끌벅적한 가족들 사이에서 언제나 외톨이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이해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쌍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라디오와 책, 그리고 고양이에게 집착합니다.
어른들의 입장에서 샘과 수지는 문제아입니다. 독특한 개성으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샘도, 가족들 사이에서 외톨이처럼 지내는 수지도, 그저 문제아에 불과합니다.
샘과 수지는 도망칩니다. 과연 무엇으로부터? 바로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으로부터 도망친 것입니다. 어른들의 시선으로 샘과 수지를 문제아로 낙인찍은 그들. 샘과 수지는 그러한 세상에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도피가 귀엽다고요? 아니, 저는 슬펐습니다. 샘과 수지가 아무리 도망쳐도 이제 겨우 12살에 불과한 그들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도를 보고 아무도 찾지 못하는 자신들만의 은신처를 만든다고 해도 집요한 어른들에게 들키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그렇게 샘과 수지를 찾은 어른들은 더욱더 그들에게 문제아의 낙인을 깊숙히 박아 버립니다.
샘을 고아원, 혹은 정신병원에 가둬버리려는 사회복지사(틸다 스윈튼)의 섬뜩한 시선은 바로 샘과 수지가 마주한 어른들의 세상입니다. 그러한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샘과 수지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한다면 그들의 모험을 '귀엽다'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른의 시선으로 아이들의 세계를 판단하려하지 말자.
흥미로운 것은 샘과 수지가 그들만의 아지트를 찾기 위해 떠나는 모험은 마치 판타지의 세상처럼 그려졌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뉴 펜잔스 섬 자체가 도시의 풍경과 다른 판타지의 따뜻한 세상 같았지만, 샘과 수지가 길을 나서면서 펼쳐지는 자연의 아름다움은 아이들만의 세상인 네버랜드 같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샘과 수지의 사랑을 처음으로 이해하는 것 역시 아이들입니다. 처음엔 샘을 왕따시키고, 샘과 수지의 수색 작전에 나섰던 카키 스카우트의 대원들은 샘을 이해하고, 샘과 수지의 사랑을 지켜주기 위해 또다른 모험을 계획합니다. 카키 스카우트 대원들이 샘을 도와주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울컥하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뉴 펜잔스 섬에 살며 도시 사람들은 결코 느낄 수 없는 순수함을 간직한 어른들인 경찰 소장 샤프(브루스 윌리스)와 카키 스카우트의 대장 랜디(에드워드 노튼)가 샘과 수지를 이해하는 장면 역시 인상 깊었습니다. 전문 직종에서 일하는 수지의 아버지와 사회복지사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샘과 수지의 사랑을 괴짜 어른에 불과한 샤프와 랜디가 이해하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영화의 마지막 푹풍우치는 날의 기적은 마치 휘오리 바람과 함께 오즈의 나라에 가게 되는 도로시의 모험과도 같습니다.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샘과 수지의 사랑, 그들의 반항과 도피를 [문라이즈 킹덤]은 따뜻하게 보듬어준 것입니다.
12살 샘과 수지의 사랑은 어른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어린 것들의 용납할 수 없는 일탈입니다. 좋게 봐준다고 해도 귀엽고 순수한 반항입니다. 하지만 12살 수지와 샘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어른들의 사랑 이상으로 안타깝고 절실한 사랑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샘과 수지의 사랑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만큼이나 아프게 느껴졌습니다. 앞으로도 몇 년간이나 그들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인정받지 못할 테니까요.
[문라이즈 킹덤]을 본 후 집으로 향하는 길. 마치 한 편의 아름답고 슬픈 동화를 본 느낌입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인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찡그리며 짜증을 내고 있었지만, 아이들이 상상하는 세상은 아름답고 순수하며 행복할 것입니다. [문라이즈 킹덤]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삭막한 세상에 놓여진 아이들의 순수한 세상과도 같은 따뜻한 영화였습니다.
[문라이즈 킹덤]을 보고나니 이런 영화를 개봉하지 않은 집 근처 멀티플렉스 극장에 대한 신뢰도가 뚝 떨어집니다. 물론 집 근처 멀티플렉스는 이용하기 편한 장점이 있지만, 이런 아름다운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 안목을 지녔다면 앞으로도 아트하우스 모모를 이용하는 일이 잦아질 것 같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 절대 극장 밖으로 나서지 말자.
엔딩 음악이 흐를 때 악기를 하나 하나 소개하는 나래이션과 함께,
그들 악기가 내는 다양한 음악의 하모니를 감상할 수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것은 벤자민 브리튼의 <청소년을 위한 관현악 입문>이란다.)
엔딩 음악처럼 각각 다양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속에 살아가면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세상을 웨스 앤더슨 감독은 꿈 꾸고 있나보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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