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임순례
주연 : 김윤석, 오연수, 김성균
개봉 : 2013년 2월 6일
관람 : 2013년 2월 7일
등급 : 15세 관람가
남들과 좀 다르게 살아도 괜찮아.
[남쪽으로 튀어]는 예고편에서부터 남다른 속시함을 제게 안겨줬습니다. TV 수신료를 내지 않겠다며 TV를 던져 버리고, 국민연금을 강제로 징수하려는 공단 직원에게 "그럼, 나 대한민국 국민 안해." 라고 선언하더니, 파출소에서는 "주민등록번호? 그 긴걸 어찌 외우나?"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합니다.
설날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다이하드 : 굿 데이 투 다이]와 [남쪽으로 튀어], 둘 중의 한 편은 꼭 보겠다고 굳게 결심한 저는 속시원한 예고편을 지닌 [남쪽으로 튀어]를 먼저 선택했습니다. 요즘 날씨도 춥고, 회사 일도 자꾸 꼬여서 [남쪽으로 튀어]를 보며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최해갑(김윤석)이 예고편에서 던진 한마디 한마디는 제 속마음과 비슷했습니다. 공영방송이라는 명목으로 전기료에 TV 수신료를 억지로 끼워 받아내는 KBS의 꼼수. 국민의 노후를 위해서라며 꼬박 꼬박 없는 주머니에서 돈을 빼가지만 정작 노후에 그 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국민연금. 4년마다 돌아오는 우리 국민들의 애국심 등등.
비록 소심한 성격 탓에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이런 부조리를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제게 최해갑은 속시원하게 세상을 향해 떠들어댑니다. 제가 25년이라는 세월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다이하드 : 굿 데이 투 다이]를 잠시 미뤄두고 [남쪽으로 튀어]를 먼저 선택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제 기대만큼 [남쪽으로 튀어]는 속시원하지 않았습니다. 최해갑의 시원 시원한 한마디는 예고편이 거의 전부였고,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반란을 일으켰던 최해갑의 모험은 거대한 벽에 갇혀 오히려 약간의 답답함을 안겨줬습니다.
분명 [남쪽으로 튀어]는 최해갑이라는 한국영화에서 전무후무한 매력적인 캐릭터를 완성해냈지만, 캐릭터의 매력이 영화로까지 완벽하게 번지지는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갇혀 없어도 큰 문제없는 작은 나사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저와 같은 소시민에게 40년 묵은 체증이 속시원하게 '뻥' 뚫리게 하지 못한 [남쪽으로 튀어]. 영화를 보고나서 '최해갑, 멋지다.'라고 외칠 수는 있어도, '최해갑처럼 살고 싶다.'라고 결심할 수는 없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저는 튈 수 있는 남쪽이 없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세요. [남쪽으로 튀어]에 낙제점을 주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기대했던 만큼의 속시원함을 안겨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남쪽으로 튀어]의 최해갑, 약간은 아쉽지만 그래도 여전히 매력적인 캐릭터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최해갑... 그의 말 중에서 틀린 말은 없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원시 시대부터 무리를 지어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무리 중의 강한 자는 우두머리되고, 무리 중 약한 이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무리가 국가가 되고, 우두머리는 왕이 되었다가 현재에는 대통령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무리의 우두머리는 점차 많아진 무리의 구성원을 관리하기 위해서 조직을 만들고, 조직을 이끌 법을 만듭니다. 하지만 과연 무리에 끼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국가라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말합니다.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개인의 돈을 갈취하고,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국민을 통치하기 쉽게 획일화시키려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남쪽으로 튀어]의 최해갑이 주장하는 것들입니다.
정부의 입장에서 무정부주의자는 굉장히 위험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정부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죠. 조직의 테두리 안에서 국민을 관리해야 하는 정부의 입장에서 정부를 부정하고 정부의 관리를 거부하는 것은 반역 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남쪽으로 튀어]를 보고 있으면 최해갑이 주장이 틀린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 TV를 보지 않는데 TV 수신료를 내야하고, 노후는 알아서 관리할 수 있는데 억지로 국민연금을 걷어가며, 학교 급식비는 아이들의 음식이 아닌 교장의 주머니만 두둑하게 하는 것일까요? 모두들 알고는 있지만 쉬쉬하는 것을 최해갑은 나서서 항의하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최해갑의 말이 모두 옳다고해도 최해갑의 말처럼 세상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민 여론이 그렇게 안좋아도 TV 수신료는 전기료에 포함되는 꼼수로 꼬박 꼬박 챙겨가고, 제 월급의 4.5%는 국민연금으로 차감됩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퇴직연금까지 만들어서 국민의 돈을 금융권에 맘대로 풀어 놓고 있습니다.
최해갑이 TV를 던져도 TV 수신료는 청구될 것이며, 최해갑이 국민연금이 국민의 의무라면 국민 안한다고 선언해도 여전히 그는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 빈약한 급식에 대해 항의를 해도 학교 측에서는 말을 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결국 최해갑은 떠납니다. 자신의 이상향을 찾아...
영화의 초중반까지 최해갑이 우리 주위의 부조리에 대해서 속시원하게 항의를 했다면 그 이후부터는 고향인 돌섬에 새롭게 정착한 최해갑의 일상을 보여줍니다. 배고프면 텃밭에서 먹을거리를 캐고, 바다에 나가 낚시를 하며 그가 원했던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최해갑. 영화를 보며 '나도 은퇴하면 저렇게 살고 싶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돌섬에서의 최해갑 가족의 일상은 행복해보였습니다.
하지만 돌섬 역시 대한민국의 행정구역입니다. 돈을 가져도 가져도 부족한 가진 자들은 돌섬을 노리고, 최해갑은 자신의 낙원인 돌섬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남쪽으로 튀어]에서 최해갑의 행동을 통해 속시원함을 느끼고 싶었던 저는, 돌섬에서의 김하수 의원과 대치하는 최해갑의 모습에서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아무리 최해갑이라 할지라도 대한민국의 시스템에 혼자 반항하는 것은 역부족이었기 때문이죠.
정말 웃긴 것은 최해갑이 아닌 시스템에 갇힌 사람들이다.
[남쪽으로 튀어]는 대한민국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사회 드라마는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코미디에 가깝습니다. 제가 [남쪽으로 튀어]를 기대한 이유도 최해갑의 남다른 행동과 말을 통해서 통쾌한 웃음을 전달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쪽으로 튀어]에서 최해갑은 별로 웃기지 않습니다. 초반엔 당당하게 대한민국의 부조리를 외치는 모습이 멋졌고, 후반엔 혼자의 힘으로는 벅찬 투쟁이 안쓰럽게 느껴졌습니다. 최해갑을 통해 속시원한 웃음을 느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쪽으로 튀어]는 여전히 웃깁니다. 최해갑은 생각보다 웃기지 않았지만 최해갑 대신 웃음 역할을 하는 것은 재미있게도 최해갑을 사찰하는 공안 요원들 (주진모, 정문성)입니다.
대한민국의 안녕을 위해서 일한다는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이 두사람은 처음엔 최해갑을 대한민국의 안녕을 헤치는 불순분자로 낙인찍고 열심히 그의 뒤를 캡니다. 하지만 돌섬에서의 일들을 목격하면서 그는 대한민국의 안녕을 헤치는 것은 남들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진 최해갑이 아닌, 부정부패에 물든, 돈 혹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최해갑의 뒤를 캐는 공안 요원들의 해프닝은 [남쪽으로 튀어]의 웃음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초반에는 그들의 행위가 어이없어서 웃겼고, 후반에는 그들의 행위가 속시원해서 웃겼습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공무원이 국민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닌 권력을 움켜쥔 자들을 위해 일하는 현실은 웃기지만 씁쓸하기도 합니다. 최근 국정원 여직원의 댓글 논란만 봐도 이런 코미디같은 일들이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에 더욱 공안 요원의 초반 해프닝은 씁쓸하게 웃겼습니다.
[남쪽으로 튀어]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이 영화의 장르가 코미디라면 그것은 최해갑 때문이 아닌, 최해갑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가진 자들 때문이라고. 공안 요원들이 웃겼고, 돌섬을 개발하려는 김하수 의원의 비굴한 모습이 웃겼습니다. 그들이 특별히 웃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영화를 보고 있는 저는 그들이 웃겼습니다.
이제 최해갑은 이 웃기는 자들에게 한방 속시원하게 날리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아무리 최해갑이라 할지라도 그가 혼자 감당하기엔 벅찼습니다. [남쪽으로 튀어]의 아쉬움은 바로 이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결국 최해갑도 별 수 없더라.
어찌보면 [남쪽으로 튀어]는 판타지입니다. 아마 현실이라면 돌섬에서의 사건은 비극으로 끝날 가능성이 훨씬 높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임순례 감독은 김하수 의원 납치극이라는 약간의 무리한 설정을 넣어서 돌섬의 사건을 판타지스럽게 이끌어 나갔습니다.
뭔가 최해갑스러운 좀 더 특별한 한 방을 기대했던 저로서는 실망스러운 전개였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리 최해갑이라 할지라도 그 방법 밖에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의 힘으로 맞서기엔 너무 벅찬 상대였으니까요.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난 후 속이 시원하기 보다는 조금은 답답했습니다. 이 답답한 세상을 최해갑이 속시원하게 한 방에 날려줄 것을 기대했는데, 아무리 최해갑이라 할지라도 판타지적인 설정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별 수 없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결국 최해갑의 세상을 향한 한 방은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미지의 섬에서나 가능한 판타지인 것입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최해갑과 함께 해준 자식들과 친구들, 그리고 아내인 안봉희(오연수)의 모습을 보며 '그래도 최해갑은 행복하겠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치 최해갑 그 자체로 보였던 김윤석의 연기는 말 그대로 '갑'이었습니다. 만약 김윤석이 아니었다면 최해갑이라는 엉뚱한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들 배우가 누구였을지 언뜻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김윤석의 최해갑은 매력 덩어리였습니다.
튀지 않으면서 묵묵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낸 조연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도 좋았습니다. 초반 최해갑의 고향 후배인 홍만덕을 연기한 김성균은 정말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더군요.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는 조직 폭력배, [이웃사촌]에서 섬뜩한 연쇄살인마를 연기했던 그가 이번엔 너무 착해서 탈인 순박한 시골 청년을 연기했는데 그게 또 잘 어울렸습니다.
특히 저는 오연수의 연기가 좋았습니다. 떠들석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최해갑과는 달리 조용히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안봉희의 모습은 오연수라는 가녀린 이미지의 배우를 만나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영화의 후반부 안봉희가 최해갑을 도와주기 위해 나서는 모습에서 얼마나 든든함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비록 최해갑의 대한민국의 부조리를 향한 모험은 어느 정도의 판타지라는 공간 안에서 가능했고, 그로 인하여 제가 기대했던 속시원함을 완전히 채워주지는 못했지만... 최해갑이라는 캐릭터를 만났고,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대리만족을 느낀 것만으로도 [남쪽으로 튀어]는 합격점을 줄만한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감기 기운이 남아 있으면서도 영화를 좋아하는 남편 때문에
늦은 밤, 극장에 따라나선 구피의 피곤한 모습이 보였다.
그래 최해갑에게는 안봉희가 있듯이, 내게는 구피가 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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