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3년 영화이야기

[라이프 오브 파이] - 영화에 대한 나의 즐거움은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쭈니-1 2013. 1. 2. 12:50

 

 

감독 : 이안

주연 : 수라즈 파르마, 이르판 칸, 라프 스팰

개봉 : 2013년 1월 1일

관람 : 2013년 1월 1일

등급 : 전체 관람가

 

 

우리 가족은 [라이프 오브 파이]로 대통합을 이루었다.

 

제 블로그를 찾아주신, 그리고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2013년에는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길 기원드립니다. (인사성 밝은 쭈니 ^^V)

12월 31일 밤에 제야의 종소리를 듣느라 늦게 잠이 들은 저희 가족. 하지만 2013년 첫 날부터 늦잠을 잘 수는 없기에 침대의 따뜻한 유혹도 뿌리치고, 졸음도 쫓아내며 아침 일찍 일어나 새해의 첫 날을 맞이했습니다.

2013년의 제 계획은 '한달에 한권 이상의 책을 읽자!' 였기에 구피, 웅이와 함께 집 근처 대형문고로 출동하였습니다. 2013년에 읽을 첫 책을 물색하기 위해서입니다. 한동안 책과 멀리했더니 도대체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잘 모르겠더군요. 추리소설을 좋아하지만 새해의 첫 책으로 우중충한 추리소설을 선택하기도 그렇고해서 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웅이는 2013년 첫 책으로 <레미제라블>을 선택했고, 구피는 <빨간머리 앤>을 집어 들었습니다. 뭔가 감동적이면서 부담이 없는 책을 읽고 싶었던 저는 처음엔 크레이그 톰슨의 그래픽노블 <담요>를 골랐지만 "새해 첫 책으로 만화책이야?"라는 구피의 핀잔을 듣고 포기. 베스트샐러 소설인 기욤 뭐소의 <7년 후>를 선택하려 했지만, 베스트샐러 소설이지만 제게 최악의 실망감만 안겨준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의 악몽이 떠올라 주저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제 선택은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였습니다. 감동적이면서 부담이 없는 소설을 찾는 제게 <파이 이야기>는 딱 알맞은 소설처럼 보였습니다. 게다가 2013년에 읽을 첫 책을 고른 후에 저희 가족 모두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기로 했기 때문에 [라이프 오브 파이]의 원작소설인 <파이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거의 2시간 동안 2013년에 읽을 첫 책을 고르는 새해 첫 행사를 마치고 보게된 [라이프 오브 파이]. 제겐 2013년의 첫 기대작이었으며, 2012년에 극장에서 영화 20편을 보겠다는 계획을 아쉽게 이루지 못한 웅이가(18편 봤습니다.) "2013년엔 꼭 20편을 볼거예요."라는 굳은 다짐과 함께 선택한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웅이와 제가 영화를 볼땐 "난 자유다!"를 외치며 쇼핑을 즐기던 구피도 "이 영화는 나도 볼래."라고 합류함으로서 2013년에는 [라이프 오브 파이]로 저희 가족은 대통합을 이루었습니다. 

새해 첫 날부터 영화를 보러 나온 관객들이 많더군요. 특히 [라이프 오브 파이]가 상영한 극장 안에는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단위 관객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라이프 오브 파이]는 어린 관객들이 보기엔 조금 지루한 편이었습니다. 웅이는 "재미있었어요."라고 말했지만, 웅이 옆에 앉은 구피에 의하면 영화 상영 내내 하품을 하고, 몸을 비틀고 난리가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자녀들의 손에 이끌려 오랜만에 극장을 찾은 듯한 제 뒷좌석의 노년 신사분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 "10분이면 끝날 이야기를 2시간 내내 질질 끌어서 지루했다."라며 영화가 끝나자마자 투덜 투덜. 오랜만에 아버지와 극장을 찾은 자녀들을 생각해서 조금 자제했으면 좋으련만, 큰 소리로 투덜거리는 아버지 앞에 난감해하던 자녀들이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 분의 모습에서 왜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가 생각날까요? 저희 아버지도 딱 그러셨거든요.) 그렇다면 자칭 영화광이라는 쭈니는 [라이프 오브 파이]를 어떻게 감상했을까요?

 

 

내게 빨리 놀라운 이야기를 해봐.

 

[라이프 오브 파이]는 슬럼프에 빠진 어느 소설가(라프 스팰)가 중년의 파이(이르판 칸)를 찾아가 그의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 낯선 방문객 앞에 파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느릿 느릿하게 늘어 놓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파이의 이야기는 어느 평범한 인도 소년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전부였습니다.

소년의 성장담, 그가 여러 종교를 믿는 이야기, 그리고 첫 사랑 이야기 등등. 놀라운 이야기를 기대했던 관객들이 서서히 지루함을 느낄 때즈음 소설가 역시 파이에게 "좀 더 놀라운 이야기를 해달라."며 재촉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영화 속의 소설가는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입니다. 그리고 중년의 파이는 [라이브 오브 파이]를 연출한 이안 감독입니다. 좀 더 자극적이고, 놀라운 이야기를 원하는 관객들에게 이안 감독은 그렇게 서두르지 말라며 여유로운 미소를 짓습니다. 네, 맞습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를 감상하는데 있어서 "내게 빨리 놀라운 이야기를 해봐."라고 서두르게 된다면 이 영화의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없습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관객들은 파이를 찾은 소설가와 같은 입장으로 중년이 된 파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게 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는 이야기속의 젊은 파이에게 감정이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루함없이 [라이프 오브 파이]를 즐길 수 있을테니까요.

 

이안 감독이 영화의 초반부터 소년 파이의 이야기를 느릿느릿하게 꺼내든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파이의 놀라운 모험을 구경하는 것이 아닌, 소년 파이를 좀 더 이해함으로서 그가 겪은 모험을 함께 체험하는 것. 이를 위해서 이안 감독은 파이의 캐릭터를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세밀하게 묘사된 파이는 어떤 캐릭터일까요? 자신의 이름이 '오줌 싸다'라는 단어인 'Pissing'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던 파이는 반 친구들에게 이름의 약자인 파이(π)를 각인시키기 위해 무한대의 소수점을 모두 외웁니다. 얼핏 보면 별 의미없어 보이는 어린 파이의 집념은 소년 파이가 조난을 당한 이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삶에 대한 집념을 설명해냅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힌두교를, 우연히 간 교회의 예수상 때문에 기독교를, 그리고 이슬람교까지 믿는 어린 파이의 엉뚱한 신앙심은 버티기 어려운 조난의 상황에서 신에 대한 믿음으로 버텨내게끔 하고, 사육사 몰래 호랑이인 리처드 파커에게 맨손으로 고기를 건네주는 어린 파이의 모습은 작은 구명보트에서 리처드 파커와 단 둘이 남았어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용기를 보여줍니다. 

이렇듯 어린 파이의 성장담은 결코 아무런 의미없이 이야기를 길게 늘어뜨리기 위함이 아닌, 갑자기 조난이라는 힘든 상황에서 무려 227일 간이나 그것도 무시무시한 벵갈 호랑이와 함께 버텼던 파이라는 불가사의한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구명 보트 안의 작은 생태계

 

소설가가 "좀 더 놀라운 이야기를 해달라."는 재촉과 함께 드디어 파이의 진짜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영화의 예고편에서도 보여줬던 폭풍우의 놀라운 위력과 거대한 화물선이 침몰하는 장면이 이어지고, 구명보트 안에 뛰어든 얼룩말과 바나나를 타고 구명보트에 탑승하는 오랑우탄, 그리고 파이가 얼떨결에 구조한 벵갈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구명보트에 오르며 파이의 놀라운 이야기는 드디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일단 흥미로운 것은 구명보트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먹이사슬의 모습이었습니다. 구명보투 안에 이미 타고 있던 하이에나는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공격해서 잡아 먹습니다. 그런 하이에나를 호랑이가 공격해서 죽여버립니다. 구명보트 밖에서는 상어떼가 우글거리는 상황에서 초식 동물과 육식 동물간의 먹이사슬이 재현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이 먹이사슬 속 어디쯤에 위치해 있을까요? 얼룩말과 우랑우탄과 같이 맨 밑바닥, 다시말해 육식 동물에게 잡혀 먹을 처지인 것입니다. 하이에나에게 얼룩말과 우랑우탄이 잡혀 먹히고, 다시 하이에나를 호랑이가 처치하는 상황. 파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먹이사슬의 가장 위에 존재하는 호랑이를 피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만해도 저는 '그깟 호랑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제가 실제로 본 호랑이는 동물원의 얌전한 호랑이 뿐이었고, 수 많은 영화에서는 호랑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한 존재들을 끌어들여 우리 인간들을 위기에 빠뜨렸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망갈 곳이 없는 작은 구명보트 안에서의 호랑이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존재였습니다. 리처드 파커가 갑자기 튀어나와 하이에나를 공격하는 장면은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서웠으며, 리처드 파커와 파이가 대립하는 장면에서는 손에 땀을 쥘 만큼 긴장되었습니다.

하지만 파이는 말합니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은 넓디 넓은 바다였다고. 그는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먹이사실의 맨 아래 처지에서 벗어나 최소한 호랑이와 비등한 위치가 되어야 했습니다. 언제까지 리처드 파커를 피해서는 그의 생존을 장담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가 놀라운 점은 파이가 리처드 파커와 교감을 나누는 과정이 결코 빠르지 않은 속도로 천천히 진행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부터 파이가 이 무시무시한 벵갈 호랑이를 제압하고 용감하게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것이 아닌, 처음엔 먹이사실의 맨 아래에 위치한 힘 없는 동물처럼 두려움에 떨며 피하다가, 죽음이라는 적에 맞서며 점점 용기를 내는 상황이 너무나도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화면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안 감독의 첫 3D영화인 만큼 3D 화면에 적합해 보이는 장면이 다수 등장합니다. 물론 저는 2D로 영화를 봤지만 영화를 보며 '저 장면은 3D로 봤으면 더욱 멋졌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장면이 여럿 있었습니다.

영화 오프닝씬에서 파이의 동물원 풍경이 펼쳐지는 장면, 영화 중반 바다가 형광색 해파리로 물들이는 장면, 그리고 날치떼가 파이를 향해 날아다는 장면 등은 마치 3D를 위해 존재하는 장면처럼 느껴졌습니다.

비록 3D로 감상하지 않아 이들 장면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2D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바다는 파이에게 가족을 잃은 슬픔과 227일 간의 괴로움을 안겨줬지만 새로운 세상에 대한 아름다움과 삶의 깨달음도 안겨준 셈입니다.

특히 식인섬에서의 모험은 [라이프 오브 파이]를 평범한 조난 영화가 아닌 판타지 영화처럼 느끼게 할 정도였습니다. 낮에는 희망과 기쁨을, 밤에는 절망과 두려움을 안겨주며 섬에 갇힌 사람을 서서히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식인섬. 그것이 정말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파이의 모험을 더욱 신비롭게 만드는 효과는 분명 있었습니다.

영화를 본 후 웅이는 일기장에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본 후의 느낌으로 '협동심은 참 중요한 것 같다.'라고 적었습니다. 웅이가 보기엔 파이가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벵갈 호랑이인 리처드 파커와의 협동심 때문이라고 생각한 듯 합니다.

하긴 아직 어린 웅이에게 신에 대한 믿음과 삶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이해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 역시 영화가 끝나고나서 파이의 모험이 흥미롭고, 재미있었지만, 그러한 모험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파이는 소설가에게 자신의 조난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를 해줍니다. 배에서 만난 사람들을 등장시킨 그의 또 다른 이야기는 분명 벵갈 호랑이와 함께 조난을 헤쳐나갔다는 처음의 이야기보다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이런 현실적인 이야기를 한 파이는 소설가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두가지 이야기 중 어느 이야기를 믿고 싶으냐고. 소설가의 대답은 첫번째 이야기입니다. 소설가의 대답을 들은 파이는 흐뭇하게 미소를 짓습니다.

그 순간 저 역시 깨달았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대한 믿음. 파이의 모험은 판타지 영화라고 해도 될만큼 신비합니다. 우리가 만약 그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면 파이의 모험은 그저 영화 속의 재미있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믿는 그 순간 그의 이야기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닌 어쩌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됩니다. 

앞으로 저는 수 없이 많은 놀라운 이야기들을 담은 영화를 보게 되겠죠. 그 영화들을 재미있게 보는 방법은 영화 속의 이야기를 믿고 그 속에 뛰어들어서 캐릭터와 감정입을 하고 내 스스로가 그러한 이야기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 속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면 영화를 본 후 투덜거렸던 노년의 신사처럼 이 세상 대부분의 영화는 그저 말도 안되는 영상물에 불과할테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믿습니다. 수 십년 동안 제게 즐거움을 안겨준 수 천, 수 만편의 영화에 담긴 놀라운 이야기들을. 그러한 이야기들은 2013년에도, 아니 제가 죽는 그 순간까지 제게 놀라운 경험과 함께 즐거움과 감동을 줄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파이의 이야기를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믿기 어려운 것을 믿는다고 해서 내가 손해보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믿고 즐기며 감동을 받는 것도 인생을 즐기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