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로버츠 로렌즈
주연 : 클린트 이스트우드, 에이미 아담스, 저스틴 팀버레이크, 존 굿맨
요즘 난 잔잔한 영화가 좋다.
크리스마스날 밤에 본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여파 때문일까요? 요즘 저는 잔잔한 분위기의 영화가 마구 땡깁니다. 예전에는 현란한 분위기의 영화, 시끄럽고 에측불허의 영화를 선호하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조용히 영화를 보다보면 어느사이 나도 모르게 감동이 스며드는 영화가 좋아지고 있습니다.
구피는 이제 제가 늙어서 그렇다고 하네요. 하긴 이제 며칠 후면 제 나이 마흔이 됩니다. 지금까지는 아직 삼십대라고 우기고 살았는데, 이제 그렇게 우길 수도 없군요. 4월이면 만으로 따져도 마흔이 되니 말입니다. (제 진짜 생일은 1월이지만 주민등록증상 생일은 4월입니다. 몇 개월만이라도 마흔이 되는 것을 늦추고 싶습니다. ^^)
정말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아니면 올해 들어서 유난히 추운 날씨 때문일까요? 아니면 대선 이후 푹 가라앉은 연말 분위기 때문일까요?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제가 2012년의 마지막 주말에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를 택한 이유입니다.
인생의 돌직구를 던졌던 그가 황혼에 변화구를 던지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2009년 3월에 국내에 개봉했던 [그랜 토리노]를 마지막으로 배우로서의 인생에 은퇴하고 감독으로서의 인생에 올인하겠다고 선언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신의 선언을 깨고 다시 주연배우로 출연한 영화입니다. 그만큼 클린트 이스트우드로서는 이 영화를 놓치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실제 [내 인생 마지막 변화구]의 거스라는 캐릭터는 노년의 배우라면 욕심이 날만한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거스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스카우터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시력이 점점 떨어지며 스카우터로서의 업무에 지장이 생깁니다. 게다가 현장보다는 컴퓨터를 앞세운 풋내기들이 거스를 압박하고, 능력있는 변호사로 승승장구중인 딸 미키(에이미 아담스)와의 관계도 삐거덕거립니다.
최고의 스카우터라는 자신의 일을 위해서 한 방향으로 돌직구처럼 돌진하던 거스. 하지만 황혼의 나이가 된 그는 이제 돌직구가 아닌 변화구를 던질 때가 온 것입니다. 다시말해 변화를 맞이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의 마지막 스카우팅여행. 그 자리에 미키가 함께 하며 거스는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거스의 변화 속에 미키 역시 변화를 맞이합니다.
대화가 단절된 가족... 사랑한다고 표현하지 않으면 어찌 알까?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가 흥미로운 점은 거스의 스카우팅 여행과 그의 일과 가족간의 관계가 서로 얽혀 있다는 점입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한 데이타만으로는 고교 최강의 강타자인 보 젠트리. 하지만 현장에서 그를 직접 보고 관찰한 거스는 그가 직구가 아닌 커브에는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직구는 잘 치지만 변화구에는 약한 보 젠트리의 모습은 거스와도 연결됩니다. 거스는 자신의 인생에 묵묵하게 직구를 던질 줄은 알았지만 변화구를 던질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미키와의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아내의 죽음 이후 거스는 미키를 잘 키울 수 없다는 두려움에 그녀와의 관계를 멀리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거스의 서투른 표현은 미키에게 상처만 됩니다. 영화 내내 아버지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미키와 그런 미키의 대화를 피하려고만 하는 거스의 모습은 영화를 보는 제게 답답함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것이 거스 본인의 모습인 것을...
3할 타자가 되려면 7할의 실패를 극복해야 한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야구를 통해 우리의 인생을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직구를 잘 쳐도 변화구를 칠줄 모르면 좋은 타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공을 위해 돌직구처럼 앞으로만 돌진하다면 과연 그 인생은 성공한 인생일까요? 우리는 가끔 뒤를 돌아볼 줄도 알아야 하고, 상대방과의 소통을 위한 느린 행보도 해야만 합니다.
영화 속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아무리 3할 타자라도 7할의 실패가 있다.' 맞습니다. 야구에서 3할은 좋은 타자의 척도입니다. 하지만 3할 타자는 10번 중에서 7번의 실패가 뒤따릅니다. 그러한 실패를 극복하고, 실패를 성공의 밑거름으로 삼아야만 나머지 3번의 성공을 맛볼 수 있는 것이죠.
서투르지만 미키가 너무 어려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과거를 털어 놓는 거스. 그러한 거스로 인하여 미키 역시 변호사 사무실의 파트너가 되기 위해 돌직구처럼 돌진만 하던 자기 자신을 뒤돌아 보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위해 느리게 변화구와 같은 행보를 하게 됩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극의 재미를 위해 미키와 조니(팀 버레이크)의 러브 라인를 삽입시키지만, 개인적으로 미키와 조니의 러브 라인은 훈훈한 안구 정화 이외에는 별다른 효과를 맛볼 수 없었습니다. 그 대신 주름이 가득한 얼굴 사이로 삶에 대한 고집으로 똘똘 뭉쳐 있던 거스가 마지막에 미키를 향해 흐뭇한 미소로 화답하는 장면만으로도 영화를 보는 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잔잔한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이가 들어서도, 너무 추워서도, 축 늘어진 연말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잔잔함 속에 묻어나는 이런 자연스러운 감동이 좋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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