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2년 영화이야기

[반창꼬] - 결국엔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힘

쭈니-1 2012. 12. 24. 13:42

 

 

감독 : 정기훈

주연 : 고수, 한효주, 마동석, 김성오, 쥬니

개봉 : 2012년 12월 19일

관람 : 2012년 12월 23일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커플천국, 솔로지옥... 그 두번째 경험

 

12월 22일 토요일. 구피는 친구들과의 송년회 모임에 간다며 바쁘게 준비중입니다. 하지만 저와 웅이는 주말의 첫 날을 집에서 뒹굴거릴 예정. 결국 저는 춥다는 이유로 한동안 등한시했던 집안 대청소를 계획했습니다. 대청소를 하겠다는 제게 구피는 '정말? 대청소를 해준다면 정말 고맙지.'라며 활짝 웃더군요.

그 순간을 빠르게 캐치한 저는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넘길리가 없습니다. '내가 대청소하면 뭐해줄건데? 내 소원 한가지만 들어줘.' 라고 조건을 내걸었고, 처음엔 '싫어'라며 강하게 반발하던 구피도 그러면 대청소 안하겠다는 제 협박에 못이겨 결국 수락하고 맙니다. '도대체 소원이 뭔데?'

사실 저는 대청소를 하는 댓가로 구피에게 '[반창꼬]를 함께 보러가자.'라고 요구할 생각이었습니다. 로맨스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구피는 [반창꼬]는 극장에서 보지 않겠다고 일찌감치 선언한 상태였거든요.

하지만 저는 [반창꼬]가 보고 싶었습니다. 기대작이 대거 개봉했던 지난 12월 19일 개봉작 중에서 아직 못 본 기대작은 [반창꼬]뿐이었습니다. 게다가 [반창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젖어 말랑말랑해진 제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구피에게 [반창꼬]를 함께 보러 가자는 요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수집용 우표를 사달라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요즘 웅이는 우표 수집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공룡 우표를 보고 멋지다며 구피에게 사달라고 조른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결국 공룡 우표를 손에 넣은 웅이는 공룡 우표를 보관할 우표 수집책을 샀고, 우표 수집책을 산 이후에는 두꺼운 우표 수집책을 가득 채울 우표 모으기에 열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반창꼬] 대신 수집용 우표를 선택한 것은 웅이를 위해서입니다. 뜻밖에 수집용 우표를 선물받게된 웅이는 신이 나서 저와 함께 열심히 집안 대청소를 했답니다. 대청소를 끝낸 후에 받고 싶은 우표를 고르는 웅이의 모습을 보니 [반창꼬] 대신 수집용 우표를 선택한 것은 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저는 12월 23일 밤에 홀로 [반창꼬]를 보러 가야했습니다. 로맨스 영화인 까닭에 극장안을 가득 채운 커플 관객들. 마치 [나의 PS 파트너]를 혼자 보러 갔을 때의 민망함이 떠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웅이의 우표를 위해서 그러한 민망함을 꾹 참고 커플천국 속에서 홀로 솔로지옥을 맛보며 [반창꼬]를 관람했습니다.   

 

 

고미수... 나는 이 여자가 두렵다.

 

[반창꼬]는 아내를 잃은 소방관 강일(고수)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죽은 아내를 붙잡고 오열하는 강일. 하지만 주인공에게 아픈 상처를 안겨주고 시작하는 영화들을 많이 봐왔기에 제 감성을 흔들지는 못했습니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것은 엉뚱한 매력을 지닌 여의사 미수(한효주)입니다. 그녀는 과장에게 잘 보이겠다는 욕심에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러한 그녀의 의료 과실은 환자를 뇌사 상태에 빠뜨리고, 환자의 남편에게는 엄청난 슬픔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그녀는 통통튀는 매력을 내세워 자신의 실수를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반창꼬]는 이렇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강일과 미수의 캐릭터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강일의 과거 아픈 상처는 너무 평범해서 큰 감흥이 없었고, 의료 과실을 저지르고도 쾌활한 모습을 보이는 미수는 매력적이기보다는 무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저는 미수의 캐릭터에 주목했습니다. 분명 미수는 겉보기만으로는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청순가련형 연기를 주로 선보였던 한효주의 연기 변신이 돋보이는 미수. 그녀의 돌발 행동은 관객들에게 웃음을 안겨줍니다. 여기까지만 놓고본다면 그녀는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의 직업이 의사이며, 그녀는 의료 사고를 저지른 당사자라는 점입니다.

 

영화의 초반, 미수는 의사라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섣부른 판단으로 한 가정을 파탄에 몰아 넣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항변합니다. 환자의 남편은 깡패가 분명하다고... 그러니 그런 깡패는 사회에서 격리를 시켜야 한다고... 

그녀는 의료 분쟁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받기 위해 강일에게 다가가 환자의 남편을 고소하라고 부추깁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한효주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저는 그러한 미수의 말이 무서웠습니다.

의료 사고는 저와 같은 일반인들이 언제라도 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병이 나면 병원을 찾습니다. 그리고 의사에게 우리의 몸을 맡깁니다. 의사는 한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중요한 직업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때로는 실수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료분쟁이 의사의 손을 들어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의료 사고가 나면 대부분의 의사들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방어합니다. 그저 자신이 이루고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미수는 말합니다. 이번 일만 잘 넘기면 다시 의사를 할 수 있다고... 자신이 살릴 수 있는 수십, 수백명의 환자들을 생각해보라고... 그녀는 열심히 강일에게 변명을 하지만 그것은 그저 자기 자신을 위한 궤변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실수로 한 가정을 파탄시킨 그녀. 그녀는 의료 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강일과의 연애 놀이에 푹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매력적이지 못한 캐릭터가 로맨틱 코미디에 가져오는 재앙

 

분명 한효주의 연기는 탁월했습니다. 무뚝뚝한 남자 강일을 꼬시기 위해서 그녀가 하는 엉뚱한 행동들은 관객들에게 웃음을 안겨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저 역시 미수의 엉뚱한 행동에 영화를 보며 여러번 웃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러한 웃음 뒤에는 씁쓸함이 남았습니다. 강일을 꼬시려는 미수의 의도가 처음부터 불순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의료 사고를 당한 당사자의 가족이라면 저런 미수의 행동을 보며 귀엽다고 웃을 수 있을까요? 아니 오히려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자신의 실수로 환자를 뇌사 상태에 빠뜨린 의사가 뻔뻔스럽게도 저렇게 하하호호 웃으며 연애 놀이에 푹 빠져 있을 수 있을까?' 저는 아마 당장 돌이라도 집어 던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반창꼬]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영화 속의 강일과 미수는 분명 로맨틱 코미디의 장점을 가득 살려서 알콩달콩 사랑을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한효주와 고수의 매력이 덧붙여지니 [반창꼬]는 연말, 데이트족을 위한 완벽한 로맨스 영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을 한꺼풀 벗겨보면 그들의 로맨스는 결코 달콤하지 않습니다. 특히 미수의 그 뻔뻔스러움은 엉뚱한 귀여움으로 감추기엔 너무나도 죄질이 나쁩니다. 결국 [반창꼬]는 매력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외형을 지니고 있지만, 결코 매력적일 수 없는 이상한 로맨틱 코미디가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매력적이지 못한 캐릭터가 가져온 재앙입니다. 로맨스 영화에서 캐릭터의 매력은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미수는 의료 사고를 저질러 놓고 그러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강일에게 접근하는, 절대 매력적일 수 없는 캐릭터입니다.

그러한 미수의 캐릭터로 인하여 [반창꼬]는 영화를 보면서는 하하호호 웃으면서 그 뒤에 가서 '그런데 내가 웃어도 되는거야?'라는 씁쓸함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만약 이대로 영화가 끝이 났다면 [반창꼬]는 영화의 재미와는 별도로 제게는 사상 최악의 로맨틱 코미디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만약 이대로 끝이 났다면...

그런데 다행히도 [반창꼬]는 이대로 끝이 나지 않습니다. 강일과 미수가 서로 사귀면서 영화의 분위기는 급격히 무거워집니다. 미수가 강일을 꼬시기 위해서 엉뚱한 해프닝을 벌일 때의 그 가벼운 분위기는 갑자기 온데간데 없고, 영화가 후반으로 향하면 향할 수록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서로 다른 두 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입니다. 만약 다른 영화가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급반전시켰다면 저는 감독의 연출력을 한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창꼬]에서는 달랐습니다. 후반에 영화의 분위기가 무거워지면서 비로서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습니다. 어차피 이 영화는 가벼울 수 없는 캐릭터를 안고 있었던 영화입니다. 영화 초반의 가벼움이 비정상이고, 영화 후반의 무거움이 정상적인 영화의 분위기인 셈입니다. 

 

 

결국엔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들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로 인한 의료 사고에 대한 넋두리를 늘어 놓는 미수에게 강일은 피해자를 찾아가 사과하고 용서를 빌라고 충고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 의사 면허가 취소될지도 모른다며 거부하는 미수.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마치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느낀 딜레마와 같습니다. 자신이 입을 다물면 어떤 한 남자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힐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진실을 말하면 그의 공장에서 일하는 수백명의 여공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미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강일이 환자의 남편을 고소한다면 환자의 남편은 폭력 남편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될테지만, 미수는 계속 의사를 할 수 있을 것이며, 수 많은 환자들을 고치고 살릴 것입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미수는 장발장과 같은 고민에 빠진 것입니다.

결국 미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음의 짐을 덜어 내기로... 그녀가 환자의 남편에게 용서를 빌며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장면에서 저는 비로서 미수라는 캐릭터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반창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재투성이의 강일과 백수 신세가 된 미수의 마지막 포옹 장면이었습니다. 분명 이 영화에는 그 보다 멋진 장면들도 수도 없이 많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을 진정으로느낀 이 두사람의 모습보다 아름다운 장면은 결코 없었습니다.

결국 [반창꼬]가 제게 진정한 영화적 재미를 안겨줄 수 있었던 것은 한효주의 톡톡 튀는 매력도, 고수의 멋진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진정을 뉘우치는 미수의 내적 성장담. 과거의 상처를 딛고 미수를 향한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강일의 상처 치유기. [반창꼬]는 두 배우의 매력적인 연기보다, 두 캐릭터의 진솔한 깨달음으로 영화의 재미를 완성한 것입니다.

마동석, 김성오, 쥬니로 이어지는 소방대원 삼총사의 감초 연기도 영화의 분위기를 헤치지 않을만큼 적절했고, 정진영과 양동근의 뜻밖의 우정 출연 또한 영화의 재미를 더해줬습니다.(물론 경찰서 장면은 미수라는 캐릭터에 대한 제 두려움을 더욱 부채질하기도 했지만...)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미수의 친구 하윤으로 등장한 진서연이라는 배우였습니다. 소방대원 삼총사처럼 눈에 띄는 감초 역할은 아니었지만 튀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한효주의 연기를 뒷받침하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람구하기 좋은 날...

남을 구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먼저 구하라.

자기 자신을 구하지 못한 자가 어찌 남을 구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