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2년 영화이야기

[26년] - 미안하고, 창피했다.

쭈니-1 2012. 12. 5. 12:40

 

 

감독 : 조근현

주연 : 한혜진, 진구, 임슬옹, 배수빈, 이경영, 장광

개봉 : 2012년 11월 29일

관람 : 2012년 12월 3일

등급 : 15세이상 관람가

 

 

첫 눈오는 날, 혼자 영화를 보다.

 

이제 고작 12월 초임에도 불구하고 한 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한반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찌감치 내복을 꺼내 입음으로서 겨울 준비를 마쳤고, 거리를 걸을 땐 어깨를 잔뜩 움추리고 잰걸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도, 그리고 구피도 하늘에서 펑펑 내리는 첫 눈에는 아직 소년, 소녀처럼 마음이 설레이나 봅니다. 퇴근 후 까만 하늘을 가득 채운 하얀 눈송이를 보며 어린아이처럼 뛰고 싶으니 말이죠.

'첫 눈오는 날, 꼭 혼자 영화를 보러 가야겠어?' 구피는 눈을 흘기며 저를 쳐다봅니다. [26년]은 가슴이 아파서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일찌감치 선언한 구피에게 저는 '그럼 오늘 혼자 [26년] 보고 올께.'라고 선언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첫 눈오는 날, 혼자 집에서 TV보기 싫어. 이런 날은 남편이랑 같이 맛난 거 먹으며 보내야지.'라며 자꾸 어린아이처럼 보채는 구피. '그래? 그럼 영화 예매취소하지 뭐.' 아쉽지만 영화보다 가족이 중요하기에 저는 [26년]의 예매를 취소하려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예매를 취소하려는 그 순간 눈이 멈췄습니다. 단 10분, 아니 10분도 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순간에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가, 거짓말처럼 멈춰버린 것입니다. 마치 제게 '넌 오늘 꼭 [26년]을 보고 오거라.'라고 하늘이 시킨 것처럼.

 

'에이, 눈도 그쳤는데... 그냥 오늘 영화보러 가.' 마치 자정이 넘으면 신데렐라의 마법이 풀리는 것처럼, 첫 눈이 그치자 귀여운 소녀로 변했던 구피의 마법도 풀려 버렸습니다.

결국 다시 무뚝뚝한 아줌마로 변한 구피를 뒤로 하고 극장으로 자동차 핸들을 돌린 저는 월요일 밤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사람들 틈에서 [26년]을 관람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1980년 5월 18일에 벌어진 광주 민주화항쟁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1980년이면 제가 고작 8살 때였고, 이후에도 한참동안 광주 민주화항쟁은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북한이 개입한 폭도들의 폭동으로 거짓 선동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광주 민주화항쟁의 충격적인 실상을 알게 된 것은 10여년 전, 지하철에 전시된 당시 광주의 사진들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끔찍한 사진들 속에는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들이 피를 흘리고, 살점이 뜯기고, 혹은 참혹한 시체가 되어 거리에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게 된 영화가 바로 [화려한 휴가]입니다. 물론 영화 자체는 너무 과하게 감성에 호소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광주의 평범한 사람들이 폭도로 몰리고, 국민을 지켜야 하는 군인의 손에 억울하게 희생되는 과정이 너무나도 가슴아프게 그려졌습니다. [26년]은 1980년 그날의 현장보다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상처를 그리고 있습니다.

 

 

섬뜩한 애니메이션으로 분위기를 휘어잡다.

 

[26년]을 보기 전에 이미 입소문을 통해 영화 오프닝의 애니메이션이 충격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래봤자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6년]은 어차피 상업영화이고 1980년 5월 18일 광주의 현장을 실사로 표현하는 것이 관객 입장에서는 불편을 느낄 정도로 잔인하다고 판단한 조근현 감독이 조금은 순화된 방식으로 애니메이션을 선택한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제 생각은 완벽하게 틀렸습니다. [26년]의 오프닝 애니메이션은 소문 그 이상의 충격이었습니다. 조근현 감독은 실사로 표현하는 것이 관객의 입장에서 너무 잔인하게 느껴지기에 조금은 순화된 애니메이션을 선택한 것이 아닌, 그 날의 장면들은 실사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잔인했기에 표현의 한계에서 자유로운 애니메이션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 그럴만한 가치는 있었습니다. 상상 이상으로 충격적인 오프닝 애니메이션은 1980년 5월 18일의 충격적인 실상 외에도 남겨진 사람들의 아픔을 효과적으로 표현합니다. 그 후로 26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치료되지 않은 그들의 상처. 바로 그 상처가 [26년]의 소재가 되는만큼 상상 이상으로 충격적인 오프닝 애니메이션은 너무나도 적절했습니다.

 

그렇게 충격적인 오프닝 애니메이션이 지나고 나면 [26년]은 거침없이 내달리기 시작합니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미진(한혜진), 진배(진구), 정혁(임슬옹)이 소개됩니다. 그들은 아버지, 어머니, 누나가 광주 민주화항쟁에서 희생된 가족들입니다.

그와 더불어 1980년 5월 18일 그렇게 끔찍한 대량 살상을 벌인 그 사람(장광)이 아직도 호의호식하고 있는 부끄러운 현실을 보여줍니다. 피해자들은 고통을 받으며 26년이 흐른 시간까지 고통을 받고 있는데, 가해자는 조금의 죄의식도 없이 오히려 공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뻔뻔스럽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며 너무나도 화가 났습니다. 목을 매달고, 돌팔매질을 하며 죽여도 시원치 않을 그가 너무나도 잘 살고 있는 모습. [26년]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함께 분노를 느끼자고 말합니다. 뭔가 잘 못되었다고... 그러니 함께 분노를 느끼자고...

그렇게 제 분노를 효과적으로 이끌어낸 [26년]은 그러한 분노를 한데 묶습니다. 바로 김갑세 회장(이경영)과 그의 비서인 주안(배수빈)이 미진, 진배, 정혁을 한 팀으로 만들어 그 사람에게 복수를 계획하면서 부터입니다.  이제 [26년]은 이렇게 한데 묶어진 분노를 통해 통쾌한 복수가 완성되면 되는 것이죠.

 

 

어쩔수 없는 비극

 

통쾌한 복수!!! 물론 영화적 재미를 위해서라면 그 사람을 향한 통쾌한 복수가 이뤄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왜냐하면 그 사람은 현실에서 아직 건재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26년]의 복수는 이뤄질 수 없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손에 땀을 쥐며 그들의 복수가 성공하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미진의 총알이 그의 심장을 관통하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26년]은 그러한 제 바람을 통쾌함보다는 먹먹함으로 되돌려줍니다. 미진의 총알도, 진배의 주먹도, 정혁의 소망도 이 영화는 결국 외면합니다. 그저 진심어린 사과를 받고 싶다는 김갑세의 순진함을 그 사람은 비열한 웃음으로 짓밟아버립니다. 바로 그 순간 영화를 보는 제 분노는 폭발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미진을 향해 마음으로 소리칩니다. '제발... 제발... 어서 방아쇠를 당겨!'

그 사람을 향해 복수에 나선 이들이 하나씩 쓰러질 때마다 희망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만큼 그들의 복수도 간절했지만, 영화를 보는 제 마음도 복수가 이뤄지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 사람을 향한 복수는 판타지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지만, 이 땅에서는 그 사람에게는 그러한 이치가 통하지 않습니다. 

수 천명의 국민을 학살하고, 그들을 폭도라고 매도한 그는 이번엔 군이 자의적으로 행한 짓이고, 자신은 그 이후에 보고를 받았을 뿐이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책임을 회피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복수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현실에서 못 이룬 복수를 영화에서나마 이루고 싶었던 바람은 부질없었습니다. 현실을 바탕으로 한 영화에서 저는 판타지를 원했던 것입니다. 현실이 정의를 외면한 시궁창인데, 그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한 영화에 정의가 실현되길 바라다니... 저도 참 순진합니다.

사실 저는 강풀의 원작 웹툰을 이미 봤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복수가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영화에서 만이라도, 꼭 복수는 아니더라도 두려움에 떠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현실에서는 언제나 당당한 그 사람이기에 영화에서만이라도 그 사람의 비굴한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26년]은 끝까지 그 모든 바람을 외면합니다. 

 

 

미안하다, 창피하다.

 

'끝나고 나면 기분이 더러워지는 영화' 어느 분이 [26년]의 리뷰에 적은 제목입니다. 네, 정말 기분이 더러워졌습니다. 흥행을 위한 상업영화라면 관객의 바람을 어느정도 충족시켜줄만도 한데, [26년]은 그런 것 따위는 관심없다는 듯이 모두 외면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근현 감독을 욕할 수는 없습니다. [26년]은 광주 민주화항쟁의 피해자 가족들이 느꼈을 절망을 관객들도 똑같이 느껴보라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의 잘못입니다. 저 뻔뻔스러운 독재자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우리의 잘못이고, 그 사람이 아무런 죄책감없이 오늘 이 순간까지 호의호식하고 있는 것도 우리 잘못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힘을 합쳐 불의에 맞섰다면 그 사람은 광주에서 만행을 저지르지 못했을 것이고, 만행을 저지르고도 뻔뻔스럽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며, 대통령이 되고나서도 죄 값에 비해 아주 작은 벌만 받고 호의호식하고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누굴 탓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국민들 탓입니다.

 

영화 속에서 어느 남자들이 그 사람을 보며 '그래도 경제는 살렸으니 대통령직은 잘 한 것 아니냐?'는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내 이웃이 어찌되었건 상관이 없다는 태도.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은 잘 알고 있지만 내가 당한 일이 아니기에 상관없다는 태도. 그러한 우리의 태도가 그 사람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괴물로 만든 것입니다.

[26년]을 보고 기분이 더러워졌다고요? 네, 그래야만 합니다. 바로 우리들이 만들어낸 괴물의 실체를 보며 우리는 기분이 더러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권력욕으로 무고한 희생을 당한 광주의 피해자들에게 미안함을 느껴야 하고, 이러한 괴물을 후손에게 고스란히 물려준 것에 대해 미안해해야 합니다. 

[26년]은 영화적 완성도, 재미를 떠나,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나서 미안함, 창피함을 느꼈다면 그 자체로 성공적인 영화인 셈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유없이 배가 아팠고, 영화를 보고나서는 잠이 오지 않았으며, 그날 밤 꿈 속에는 1980년대 광주로 달려가는 꿈을 꿨습니다. 그만큼 [26년]은 제게 주제를 제대로 전달한 성공적인 영화였습니다.  

 

그 사람을 단죄하기 전에...

나만 아니면 된다는 우리 마음의 이기심부터 단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