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2년 영화이야기

[원 데이] - 슬프도록 아름다운 그들의 기념일

쭈니-1 2012. 11. 30. 14:23

 

 

감독 : 론 쉐르픽

주연 : 앤 해서웨이, 짐 스터게스

개봉 : 2012년 12월 13일

관람 : 2012년 11월 29일

등급 : 15세 관람가

 

 

당신에게도 특별한 날이 있나요?

 

1년은 365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현재는 365개의 하루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하루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하루는 그저 흔하디 흔한 365개의 하루 중의 하나로 지나가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념일을 정합니다. 자신의 생일,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 결혼기념일 등등 개인적인 기념일은 물론이고, 어린이날, 석가탄신일, 성탄절과 같은 국가가 정한 기념일도 많이 있습니다.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지금 달력을 펼쳐 보세요. 달력의 숫자 밑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 많은 기념일들이 아주 작은 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12월달만 해도 25일 성탄절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3일은 소비자의 날이고, 5일은 자원봉사자의 날이며, 10일은 세계인권선언일이고, 27일은 원자력의 날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념일들은 우리들에겐 365일 중의 흔한 하루에 불과할테지만, 어떤 이들에겐 365일 중 가장 특별한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원 데이]를 봤습니다. 12월 13일 개봉 예정작이지만 시사회를 통해 미리 본 것입니다. 원래 시사회 참가를 잘 하지 않는 편인데 (집근처 멀티플렉스에서 돈 내고 보는 것이 훨씬 편해서...) 제가 워낙 앤 해서웨이를 좋아하고, 영화의 예고편에서 풍겨져 나오는 분위기가 애틋하고 훈훈했기 때문에 [원 데이]가 너무나도 끌렸습니다.

[원 데이]는 제가 앞서 이야기한 기념일에 대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엠마(앤 해서웨이)와 덱스터(짐 스터게스)는 1988년 7월 15일 서로의 존재를 처음 확인합니다. 물론 그날 엠마와 덱스터가 처음 만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같은 대학을 다니며 수십번 마주쳤습니다. 엠마의 생일 파티에서 덱스터가 엠마의 옷에 와인을 흘리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날들은 그저 365일 중의 흔한 하루에 불과했습니다.

엠마와 덱스터가 처음 관계를 가질뻔 했던 7월 15일은 그들에게 아주 특별한 기념일이 됩니다. 그리고 그후 20년간 그 특별한 하루는 반복됩니다. [원 데이]는 엠마와 덱스터보다는 그들의 특별한 기념일인 7월 15일을 쫓아갑니다.   

 

 

개미와 베짱이의 사랑

 

1988년 7월 15일로부터 시작하는 [원 데이]는 매력적인 바람둥이 덱스터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숨기는 엠마의 모습으로 이 둘의 관계를 진행시켜나갑니다.

실제 영화 초반의 덱스터는 너무나도 매력적입니다. 훤칠한 외모에 거침없는 자신감을 가진 덱스터. 그에 비해 엠마는 가진 것이 너무나도 없었습니다. 비쩍 마른 몸매에 커다란 안경,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까지...

엠마가 멕시코 음식점에서 서빙을 하며 덱스터에게 전화를 걸어서 하소연을 하는 초반의 장면에서 엠마와 덱스터의 처지는 너무나도 비교가 됩니다. 좁은 집에서 친구와 함께 사는 엠마에 비해 덱스터는 멋진 집에서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었거든요.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작가의 꿈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작가의 꿈을 펼쳐지 못하는 엠마는 삶에 지친 모습이었고, 덱스터는 성인 TV쇼에 진출하여 인기가도를 얻으며 승승장구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처지에 속했지만 엠마와 덱스터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줍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수는 있지만 서로의 사랑이 되어 줄수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처지와 서로 다른 가치관이 이들에겐 벽이 되어 버립니다.

영화를 보며 저는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가 생각났습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집에 차곡차곡 곡식을 쌓아두는 개미에 비해, 베짱이는 일은 안하고 놀기만 합니다.

베짱이는 개미를 쳐다보며 말합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즐거운 일이 많은데 뭐하러 그렇게 힘들게 일을 하냐며... 하지만 모두들 아시겠지만 추운 겨울이 되자 개미와 베짱이의 사정은 달라집니다. 열심히 일한 개미는 집에서 편하게 쉬며 겨울을 보내지만 놀기만 하던 베짱이는 먹을 것도, 쉴 곳이 없어서 구걸을 하게 되는 것이죠.

엠마는 개미입니다. 당장 그녀는 살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며 작가라는 꿈을 결코 잃지 않습니다. 덱스터는 베짱이입니다. 잘 생긴 외모와 넉넉한 돈을 가진 덱스터는 미래보다는 현실을 즐깁니다. [원 데이]는 바로 그러한 개미와 베짱이의 사랑을 그린 영화인 셈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엠마와 덱스터가 아닌 7월 15일이다.

 

실제로 엠마와 덱스터의 사랑은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처럼 진행됩니다.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처럼 시간이 흐르며 작가의 꿈을 펼치는 엠마와는 달리 덱스터의 인기는 시들해집니다. 결국 덱스터는 방송에서 퇴출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에서 갈 곳이 없는 베짱이를 개미는 받아줍니다. [원 데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폐인이 되다시피한 덱스터를 작가로 유명해진 엠마는 받아줍니다. 평행선을 긋던 엠마와 덱스터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영화의 내용만 늘어놓고 보면 [원 데이]는 흔한 멜로 영화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단언컨데 이 영화는 결코 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원 데이]의 주인공은 엠마와 덱스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바로 7월 15일이라는 365개 중의 하나에 불과한 단 하루입니다. [원 데이]가 멜로 영화이면서 캐릭터 중심의 영화가 아닌 7월 15일이라는 주인공들의 특별한 기념일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원 데이]가 다른 멜로 영화와 차별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원 데이]를 보다보면 멜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엠마와 덱스터의 캐릭터 설명이 마구 생략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1988년 7월 15일 처음으로 서로를 인식한 이들이 어떻게 우정을 쌓아갔는지, 엠마는 어떻게 작가로 성공했고, 덱스터는 어쩌다가 저 지경이 되었는지, 놀랍게도 [원 데이]는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1년중 반복되는 7월 15일이라는 하루에 엠마와 덱스터의 일상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기만 할 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구구절절 엠마와 덱스터의 캐릭터, 상황을 설명하지 않아도, 20년간 반복되는 7월 15일의 하루만으로도 그들의 상황, 그들의 사정,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 마음 속 깊숙히 와닿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은 덱스터가 엠마와 처음으로 육체적 관계를 갖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장면마저 [원 데이]는 생략됩니다.(설마 국내 수입사에서 15세관람가 등급을 위해 이 장면을 삭제한 것은 아니겠죠? 설마... 그럴리가 없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은 7월 15일이 아니었거든요. 이렇게 캐릭터가 아닌 철저하게 7월 15일을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영화 속에 빠져들게 한다는 것은 [원 데이]가 흔한 멜로 영화는 아니라는 반증일 것입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그들의 기념일 (약간의 스포)

 

하지만 과연 기념일은 모두 특별하고, 모두 행복한 날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날,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날 등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슬픈 기념일도 있습니다.

7월 15일에 엠마와 덱스터는 서로를 인지했고, 우정을 쌓았으며, 결국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습니다. 이렇게 영화가 끝났다면 그들은 7월 15일을 행복한 기념일로 기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비극적 로맨스가 더욱 여운이 남듯이 [원 데이] 역시 엠마와 덱스터의 사랑을 해피엔딩으로 놔두지 않습니다. 마치 [시티 오브 엔젤]을 떠오르게 하는 그들의 슬픈 사랑은 7월 15일이라는 그들의 기념일을 슬픔의 날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시간은 또다시 그렇게 흘러갑니다. 엠마는 떠났어도 또다시 7월 15일은 옵니다. 영화의 마지막 후반부에 [원 데이]는 드디어 7월 15일이라는 시간의 선을 넘어버립니다. 1988년 7월 15일의 밤이후도 함께 했던 엠마와 덱스터의 아주 특별했던 하루를 [원 데이]는 마지막에 가서야 관객 앞에 펼쳐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순간, 7월 15일이라는 벽에 갇혔던 엠마와 덱스터의 캐릭터는 7월 15일을 넘어서며 영화를 보는 제게 깊은 감정의 울림을 안겨줍니다.

 

엠마는 떠났어도 자신의 딸과 함께 또 다른 7월 15일을 맞이하는 덱스터의 표정에선 엠마에 대한 그리움과 엠마와 함께 보낸 시간에 대한 행복감이 묻어 있었습니다.

기념일은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어떠한 추억으로 기념일을 만드느냐에 따라 그러한 기념일은 행복한 기념일이 될 수도, 슬픈 기념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겠죠.

엠마와 덱스터의 아주 특별한 20년 간의 7월 15일을 보며 어떨땐 그들의 풋풋한 사랑에 웃었고(나체 해변 사건... 케빈 클라인 팬티...) 그들의 엇갈리는 사랑에 가슴아팠으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모습에 훈훈했고, 마지막 이별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원 데이]는 7월 15일이라는 엠마와 덱스터의 기념일을 통해 제게 여러가지 감정을 안겨준 것입니다.

자신감없는 소극적 대학졸업생에서부터 시작하여 당당한 베스트셀러 작가로 카멜레온과 같은 모습을 보여준 앤 해서웨이의 매력이 시종 돋보였고, [업사이드 다운]에서 자신의 매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던 짐 스터게스는 [원 데이]에서 물만난 고기처럼 맘껏 자신의 매력을 분출시킵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슬프도록 아름다운 기념일. [원 데이]는 이렇게 내 마음을 촉촉하게 했습니다.

 

 

당신에겐 특별한 하루가 있는?

만약 없다면 지금이라도 365개의 하루 중

아주 특별한 단 하루의 기념일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