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2년 영화이야기

[남영동 1985] - 고문을 행한 자보다, 고문을 행하게 한 정권에 분노하라.

쭈니-1 2012. 11. 27. 10:36

 

 

감독 : 정지영

주연 : 박원상, 이경영, 명계남, 김의성, 이천희, 서동수, 김중기

개봉 : 2012년 11월 22일

관람 : 2012년 11월 23일

등급 : 15세 관람가

 

 

고문받는 기분으로 보는 영화?

 

[돈 크라이 마미]를 본 후, 우리의 아이들에게 처해진 대한민국의 불합리한 법 체제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제 분노는 [돈 크라이 마미]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곧바로 저는 [남영동 1985]를 보러 다시 극장 안으로 입장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돈 크라이 마미]가 우리의 아이들을 위한 분노라면 [남영동 1985]는 우리의 아버지 세대를 위한 분노입니다. 그 분들이 군사독재정권 시절 겪었던 고통들을 [남영동 1985]는 관객들에게 다시 겪으라며 펼쳐보여줍니다.

사실 저는 [남영동 1985]를 보기 전에 잔뜩 긴장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이 영화의 감독인 정지영 감독은 '관객들이 고문받는 기분으로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라는 연출변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화를 즐겁기 위해 봅니다. 그래서 예술영화보다는 상업영화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고문받는 기분으로 봐야하는 영화라니요... 하루 간의 연차 휴가를 낸 화창한 금요일 오전에 제가 이 영화를 보고 싶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남영등 1985]를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엄연히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머나먼 옛날 옛적의 역사도 아닙니다. 불과 30여년 전의 일입니다.

1985년이라면 제가 12살이 되던 해입니다. 86 아시안 게임이 서울에서 열린다며 언론은 연일 축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민주화를 염원하는 이들을 불법적으로 가두고, 잔인한 고문을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즐기기 위한 영화를 선호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어두운 역사를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방심한다면 이런 어두운 역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스며들어 강압적인 폭력으로 다시 우리들을 지배하려 들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결의에 찬 마음으로 본 [남영동 1985]. 제가 단단히 마음을 먹어서인지 영화 자체는 못견딜 만큼 괴롭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도대체 이 영화는 언제 끝날까?'라는 생각에 몇 번이고 시계를 쳐다봐야 했습니다. 영화가 끝나는 그 순간이 김종태(박원상)를 향한 끔찍한 고문이 끝나는 순간임을 알기에...

 

 

고문으로 시작해서 고문으로 끝난다.

 

[남영동 1985]는 시작부터 다짜고짜 김종태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영화를 본격적으로 볼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다짜고짜 김종태를 향한 폭력이 난무하니 솔직히 불편하더군요.

그런데 그러한 폭력의 수위가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높아집니다. 단순한 폭력이 고문으로 바뀌고, 고문기술자인 이두한(이경영)이 등장하면서 고문의 수위 역시 높아집니다.

[남영동 1985]는 남영동의 대공분실 안에서만 진행됩니다. 가끔 김종태가 잡혀오기 전 가족들과 목욕탕에 갔던 장면과, 가족들과 바닷가에서 단란한 한때를 보내는 장면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야말로 잠깐입니다. 대공분실 문이 열려 있어도 결코 나갈 수 없는 김종태처럼 정지영 감독은 관객들을 대공분실이라는 한정된 장소에 가두어 놓고 김종태가 당한 고문을 보게끔 강요합니다.

김종태는 점점 지쳐갑니다. 그에게 가해진 잔혹한 고문에 처음엔 반항도 하지만 결국엔 굴복합니다. 제발 살려달라고, 시키는대로 다 하겠다고 애원하지만 잔인한 고문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고문이 애초에 원했던 것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죠. 독재 정권에 대한 김종태의 완전한 굴복... 이를 목적으로 이루어진 고문이기에 고문은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영화가 후반으로 접어들면 드디어 김종태에게 가해지던 고문이 끝날 기미가 보입니다. 김종태가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그들이 원하는대로 모든 것을 굴복합니다. 

하지만 김종태가 윤사장(문성근)에게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하는 순간 고문은 다시 가해집니다. 이렇듯 [남영동 1985]에는 고문이 끝났다는 생각에 잠시 안도를 하게 되는 순간이 몇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김종태가 강압에 의해 진술한 것이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음이 밝혀지는 장면인데, 김종태에게 진술받는 것을 포기한 듯 보였던 이들이 김종태가 군의관에게 자신의 위치를 적은 쪽지가 준 것이 발각되며 잔인한 고문이 다시 시작됩니다.

두 번째는 모든 것을 굴복한 김종태가 거짓 진술서를 완성하고 윤사장을 만나는 장면인데, '이제 이 지긋지긋한 고문이 끝났다.'라고 안도하는 순간에 김종태가 자신의 속마음을 내뱉는 바람에 고문이 다시 시작됩니다. 이 장면에서는 이두한의 김종태를 향한 비인간적인 폭력이 등장하는데 [남영동 1985]에서 가장 불편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끝날 듯하면서 다시 반복되는 폭력과 고문을 통해 [남영동 1985]는 관객에게 더욱 괴로움을 안겨줍니다.

 

 

고문을 하는 사람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이들이다.

 

이렇게 [남영동 1985]는 고문으로 시작해서 고문으로 끝나는 영화이지만 한가지 흥미로운 점도 있습니다. 바로 고문을 가하는 이들에 대한 캐릭터 설정입니다.

사실 이 영화에는 김종태에 대한 캐릭터 설명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김종태는 이런 사람이고,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기에 그에게 가해지는 고문은 부당하다.'라는 김종태에 대한 캐릭터 설명이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지영 감독은 김종태에 대한 캐릭터 설명을 생략함으로서 '김종태가 어떠한 인물이건, 같은 사람으로서 이와 같은 비인간적 고문은 결코 있어서는 안된다'라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확실하게 전해줍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고문을 가하는 캐릭터에 대해서는 제한적이나마 캐릭터를 설명해줍니다. 그럼으로서 고문을 가하는 이들 역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실제로 강과장(김의석)은 프로야구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평범한 중년의 가장입니다. 집에 들어가봤자 반겨주는 가족도 없고, 그래서 야근을 하는 것에 대해서 별 불만은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을 챙기는 평범한 중년의 가장입니다.

이계장(김중기)은 영화 내내 사귀는 여자 친구와의 불안한 관계로 고민을 합니다. 그는 김종태에게 연애 상담을 하기도 하고, 결국 여자 친구와 헤어진 이후에는 김종태에게 소주를 권하며 함께 마시자고 재촉합니다. 

여자 친구와의 이별에 대한 화풀이를 김종태에게 하기도 하지만 김종태에게 빵과 우유를 건네 주기도 하고, 이성을 잃은 이두한을 막아선 것 역시 이계장입니다. 어찌보면 약간은 무식하지만 상당히 인간적인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그 외에 전형적인 바람둥이 캐릭터인 김계장(이천희), 그리고 실적과 승진에 눈이 먼 박전무(명계남) 등. [남영동 1985]에서 김종태에게 고문을 가하는 캐릭터들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정지영 감독이 김종태의 캐릭터를 생략한 대신 고문을 가하는 이들의 캐릭터를 부각시킨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문을 애국심이라 착각하게 하는 정부

 

윤사장(문성근)은 거짓 진술을 마친 김종태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앞으로는 대한민국을 사랑하며 사세요.' 윤사장이 보기에 정부에 반기를 드는 김종태는 애국심이 없는 불순한 세력일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김종태는 항변합니다. '나는 진정 대한민국을 사랑했기 때문에 반정부 활동을 한 것이다. 내가 부정한 것은 대한민국이 아닌 군사독재정권일 뿐이다.'

이것은 인식의 차이입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이라는 하나의 단어에 대해서 윤사장은 정권에 대한 충성에 의미를 부여했고, 김종태는 정권이 아닌 대한민국의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애국심에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했지만 어찌되었건 이들은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고문을 행한 자가 아닙니다. 고문을 행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위해서라고 믿게끔 만드는 독재정권의 만행이 문제인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면 대한민국에 숨어 있는 암적인 존재인 빨갱이들을 축출해야 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무고한 몇몇 국민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그들의 논리가 문제인 것입니다.

 

[남영동 1985]는 故 김근태 상임고문이 실제 겪었던 사실을 정리한 자전적 수기 '남영동'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실제 故 김근태 상임고문에게 고문을 가했던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故 김근태 상임고문에게 용서를 빌었지만 출소후에 자신의 행위를 미화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군사독재정권의 논리에 깊숙히 빠져서 고문을 행했던 자신의 행동은 당시에는 애국적인 행위라고 믿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근안 역시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불쌍한 한 명의 희생자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군사독재정권에 정신을 지배당함으로서 같은 인간에게 행한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끔찍한 범죄인지 인식조차 하지 못한 그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정권을 잡은 이들로 인한 희생자가 아닐까요?

결국 이근안 같은 고문 기술자를 잡아 처벌한다고 해서 [남영동 1985]와 같은 끔찍한 상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국민의 열망을 무시하고 끔찍한 폭력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궤변을 늘어 놓는 정권이 다시는 우리 국민 위에 서지 못하도록 막아야만 우리 아버지 세대의 끔찍한 희생에 대한 보답인 것입니다. [남영동 1985]를 보고나니 다가오는 12월 19일 대통령 선거가 더욱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아직 독재정권을 그리워하는 이들이여!

그들이 이야기하는 애국심에 현혹되지 마라.

그들이 이야기하는 애국심은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비열한 수단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