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2년 영화이야기

[내가 살인범이다] - 유가족을 위한 한풀이

쭈니-1 2012. 11. 13. 11:13

 

 

감독 : 정병길

주연 : 정재영, 박시후, 정해균, 김영애

개봉 : 2012년 11월 8일

관람 : 2012년 11월 12일

등급 : 18세 이상 관람가

 

 

법으로는 벌할 수 없는 살인

 

[더블 크라임]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로 아카데미를 휩쓴 브루스 베레스포드 감독이 연출했고, 애슐리 쥬드와 토미 리 존스가 주연을 맡았은 1999년 영화입니다.

제가 [더블 크라임]을 기억하는 이유는 이 영화의 소재가 독특했기 때문입니다. [더블 크라임]의 주인공인 리비(애슐리 쥬드)는 남편의 살인죄로 유죄를 선고받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살아있었고, 이 모든 것은 남편이 꾸민 짓입니다. 그녀 역시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고 감옥에서 출소한 복수를 감행합니다.

얼핏 보면 그저 평범한 스릴러 영화같지만 이 영화가 독특한 것은 그녀의 살인은 범죄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남편 살인죄로 벌을 받았기 때문에 그녀가 다시 남편을 살인한다고 해도 그녀를 처벌한 법적 근거는 없습니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입니다. 결국 리비는 합법적으로 남편을 살해합니다.

[내가 살인범이다]를 보러 가는 길.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바로 [더블 크라임]입니다. [내가 살인범이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17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연곡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인 이두석(박시후)이 베스트샐러 작가가 되어 나타납니다. 그는 '내가 연곡 연쇄살인사건의 살인범이다.'라고 당당하게 밝히지만 그를 처벌할 법적 근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인사건의 공소시효는 15년이기 때문입니다. 법이 먼저 용서한 범죄. 그로 인하여 이두석은 죄를 지었으면서도 오히려 스타 행세를 하며 거액의 인세까지 손에 거머쥡니다.

 

'에이! 설마, 영화니까 그런 일이 가능하겠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분명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내가 살인범이다]를 보며 이러한 상황은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심각한 외모지상주의에 빠진 우리 사회에서 굉장히 잘 생긴 살인마 이두석이 죄책감이라는 거짓 탈을 쓰고 악마의 눈물을 흘리며 나타납니다. 게다가 자극적인 소재를 찾아 헤매던 언론 매체는 연일 이두석을 화제로 삼아 특종 장사에 나섭니다.

[내가 살인범이다]에서 이두석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이두석을 출연시키기 위해 혈안이 된 TV 방송국장의 모습 등은 영화이기 때문에 분명 과장된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과장된 부분을 인정을 한다고 해도, '저것이 영화적 상황이 아닌 현실이라면 저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장담은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내가 살인범이다]의 최대 장점은 바로 그것입니다. 살인마 이두석과 강력계 형사 최형구(정재영)라는 전통적인 대결 구도 방식을 내세운 스릴러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소재 자체가 신선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살인범이다]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무기입니다. 최소한 영화의 초반까지는... 

 

 

예측 불허 (이후 스포 포함)

 

[내가 살인범이다]를 보기 전부터 저는 이 영화의 독특한 설정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설정은 독특하지만 그러한 독특한 설정만으로 2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며 [내가 살인범이다]는 독특한 설정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어떤 히든 카드를 가지고 있을까요?

바로 이 부분이 [내가 살인범이다]를 영리하다고 칭찬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내가 살인범이다]는 홍보 자체를 공소시효를 넘겨 법적 무죄가 선언된 살인마 이두석과 이두석을 잡고 싶은 강력계 형사 최형구의 단순 대결로 포커스가 맞춰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대결 구도는 초반 이후에 깨져 버립니다. 그렇게 이두석과 최형구의 대결 구도가 깨지며 [내가 살인범이다]는 예측불허의 재미를 선사하는 것입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이두석과 최형구의 대결 구도 그 이후의 이야기로,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가급적 읽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두석과 최형구의 대결구도를 깨는 첫번째 요인은 이두석에게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복수입니다. 이두석의 마지막 희생자이자 아직 유골조차 찾지 못한 정수연의 어머니 한지수(김영애)를 필두로한 유가족들은 이두석을 납치하여 정수연이 묻힌 곳을 알아내고 그를 벌하려합니다. 이두석에 대한 원한으로 똘똘 뭉쳐진 그들의 복수는 이두석과 최형구의 대결 구도를 깨며 영화에 새로운 긴장감을 불어 넣습니다.

 

이두석과 최형구의 대결만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제가 당황하기 시작한 부분입니다. '도대체 이 영화가 어떻게 흘러 가려고 이러지?'라는 궁금증과 함께 [내가 살인범이다]는 이후에도 예측 불허의 상황을 계속 만들어 냅니다.

이두석에게 가족을 잃은 유가족의 복수는 어쩌면 [내가 살인범이다]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법이 이두석을 용서했더라도, 그의 범죄로 고통을 받은 사람들까지 그를 용서하지는 않았을테니까요.

하지만 진정으로 J(정해균)의 등장은 의외였습니다. 이두석에게 '내가 진짜 연곡 연쇄살인사건의 살인범이다.'라고 나선 J. J의 등장으로 [내가 살인범이다]는 이두석과 J가 '내가 정말 살인범이다'라고 다투는 웃지 못할 진실 게임이 벌어집니다.   

J의 등장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이두석. 그리고 J와 이두석 중 누가 진범인지 알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유가족들. 그러한 가운데 최형구는 이두석에게 '넌 가짜다.'라고 선언하고, 이두석과 최형구 그리고 J가 삼자대면하는 방송은 아수라장이 됩니다.

'예.측.불.허' [내가 살인범이다]를 잘 드러내는 단어는 그것 뿐입니다. 독특한 설정을 가진 단순한 스릴러 영화일 것이라 생각했던 저는(실제로 [더블 크라임]은 독특한 설정을 가졌지만 단순한 스릴러 영화였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상황들이 계속 전개되며 혼란을 느껴야 했습니다.

 

 

스릴러? 블랙 코미디? 액션? 장르를 넘나들다.

 

[내가 살인범이다]가 예측불허인 이유는 단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캐릭터들의 등장으로 인한 새로운 상황 뿐만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더욱 혼란에 빠뜨립니다.

그 중 영화의 중간에 불쑥 등장하는 블랙 코미디는 정말 당혹스러움 그 이상이었습니다. J가 정수연이 묻힌 곳을 밝히는 비디오 녹화 도중 갑자기 나타나는 산림관리원의 모습, 이두석과 최형구의 양자 토론에서 인권변호사라는 여성의 우스꽝스러운 모습, 이두석과 최형구 그리고 J가 삼자대면하는 방송 도중 최형구가 폭력을 행사하자 갑자기 '초코파이 情' CF가 나가는 장면 등. 잔뜩 긴장하고 있는 관객의 긴장감을 맥 없이 풀리게 하는 장면들은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초보 감독의 연출력 미숙인지 헷갈릴 정도로 당혹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정병길 감독은 서울 액션스쿨 졸업자답게 액션 연출에서만큼은 초보 감독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수능란한 연출력을 선보입니다. 유가족들이 이두석을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차량 추격씬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장면이었습니다. 고속으로 달리는 차 위에서 벌어지는 액션이라니... 그 속도감과 아찔함은 지금까지 한국영화가 가지지 못한 액션 쾌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펼쳐지는 J와 최형구의 차량 추격씬은 더욱 대단했습니다.

사실 저는 영화 초반의 오프닝 액션을 보며 실망했었습니다. 화면은 너무 흔들렸고, 상황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액션 하나만큼은 제대로이다.'라는 평을 들은터라 기대했던 제게 오프닝의 액션은 '그럼 그렇지.'라는 실망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영화 중반의 이두석 납치 추격씬을 시작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J 추격씬은 '액션 하나만큼은 제대로이다.'라는 평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듯 [내가 살인범이다]는 독특한 설정의 스릴러로 시작하여 엉뚱한 블랙코미디를 거쳐 아찔한 액션 영화로 마무리됩니다. 게다가 영화의 후반부에는 마지막 희생자인 정수연과 최형구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배치시키며 관객의 감정선을 건드립니다. 

영화 내내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혼란스러워하는 관객들을 정수연과 최형구의 애절한 사연으로 진정시키고, 결국엔 최형구와 J의 마지막 대결에 집중하게끔 하는 정병길 감독의 연출력은 정말 놀랍다는 표현밖에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능수능란하게 관객을 가지고 놀다.

 

결국 정병길 감독은 완벽하게 저를 가지고 놀았습니다. 제가 자주 밝혔듯이 저는 스릴러가 감독과 관객의 두뇌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스릴러 영화를 보러 갈때엔 감독이 숨겨놓은 마지막 반전을 찾아내기 위해 잔뜩 긴장을 하고 영화를 보곤 합니다.

그런데 정병길 감독은 독특한 소재를 떡밥으로 던져 놓고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저는 당연히 법의 헛점을 통해 범죄를 용서 받은 이두석을 최형구가 어떻게 잡아 넣을 것인가에만 집중하며 영화를 본 것입니다.

그러다가 유가족들의 복수극이 펼쳐지고, 자신이 진짜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J가 등장하면서 제 머리속은 혼란에 빠져 버렸습니다. 정병길 감독은 제가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고 뜬금없는 블랙코미디로 현혹시키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차량 추격씬으로 제 정신을 쏙 빼놓았습니다.

그래놓고 마지막 반전을 떡하니 펼쳐 놓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반전을 펼쳐 놓은 이후에도 저를 가지고 노는 것을 멈추지 않았으니 정수연과 최형구의 애절한 관계로 감정선을 건드리고, J와 최형구의 차량 추격씬으로 제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영화를 마무리지어 버립니다.

  

영화가 끝나고 처음 든 생각은 '아! 정병길 감독이 완벽하게 나를 가지고 놀았구나!'였습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감독과의 두뇌 싸움에서 너무나도 허망하게 패배했지만, [내가 살인범이다]의 마지막 반전은 억지스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병길 감독은 [내가 살인범이다]를 통해서 끔찍한 살인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을 위한 한바탕 떠들석한 한풀이를 한 셈입니다. 

법이 그들을 용서했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현혹되었지만, 결코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던 유가족들. [내가 살인범이다]는 그러한 유가족들을 위해 한바탕 쇼를 하며, 아찔한 액션을 펼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이후에는 '이제는 조금이라도 편안해지세요.'라며 등을 토닥거립니다.

맞습니다. 저는 정병길 감독에게 놀아났습니다. 하지만 끔찍한 범죄에 희생된 희생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생각한다면 정병길 감독이 저를 가지고 놀은 것 따위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그저 제가 유가족들의 한풀이 현장에 자그마한 몫을 했다는 것으로 만족할 따름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 [내가 살인범이다]라는 제목은 굉장히 촌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에 생각해보니

[내가 살인범이다]라는 제목이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내가 살인범이다'라고 외칠 수 밖에 없었던 이두석의 마음이 느껴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