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2년 영화이야기

[007 스카이폴] - 완성형 영화가 아닌, 진행형 영화.

쭈니-1 2012. 10. 31. 11:29

 

 

감독 : 샘 멘데스

주연 : 다니엘 크레이그, 하비에르 바르뎀, 주디 덴치, 랄프 파인즈

개봉 : 2012년 10월 26일

관람 : 2012년 10월 30일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007 제임스 본드의 탄생 50주년을 축하하며...

 

1962년 [007 살인면허]가 만들어지며 그 유명한 007 제임스 본드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올해로 007 제임스 본드는 탄생 5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50년이라는 세월동안 007 제임스 본드는 23편의 영화가 만들어졌고, 6명의 배우가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으로 영화 속에서 맹활약을 했습니다.

50년이라는 세월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하면... 저희 아버지 세대에서부터 제 아들 세대까지 폭 넓은 세대의 관객들이 007 제임스 본드 영화에 열광하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007 스카이폴]을 보러간 날, 평일 늦은 시간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자녀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도 계셨을 정도입니다. 분명 007 제임스 본드의 탄생 50주년은 축하받아 마땅할 대단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007 제임스 본드 탄생 50주년이라는 기념에 발맞춰 지난 9월 26일에는 '007 제임스 본드 50주년 특별전'이 열려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비록 저는 가지 못했지만 '007 제임스 본드 50주년 특별전'에는 시리즈 전편의 오리지널 포스터가 전시되는 등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007 제임스 본드 탄생 50주년은 [007 스카이폴]의 감독 샘 멘데스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아메리칸 뷰티]로 감독 데뷔를 하자마자 아카데미를 휩쓸었고, [로드 투 퍼디션], [레볼루셔너리 로드], [어웨이 위 고] 등의 영화로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 세계를 구축한 샘 멘데스. 그러나 이토록 대단한 그도 007 제임스 본드 탄생 50주년 기념작이라는 [007 스카이폴]에 따라 붙은 훈장이 마냥 기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007 스카이폴]은 지금까지 제가 본 그 어떤 007 제임스 본드 영화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영화였습니다. 초반에는 터키에서의 기차위 격투씬을 시작으로 007 제임스 본드다운 액션을 선보이기는 했습니다. 특히 상하이의 호화찬란한 건물에서의 액션은 샘 멘데스 감독 특유의 아름다운 영상미가 007 제임스 본드의 액션을 만나 시너지 효과를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후반부가 되면 될수록 '이거 007 제임스 본드 영화 맞아?'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느린 템포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마지막 스코틀랜드에서의 액션도 상당히 낯설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한물간 첩보원 007 제임스 본드?

 

[007 스카이폴]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먼저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역을 맡기 시작한 [007 카지노 로얄]과 [007 퀀텀 오브 솔러스] 이야기부터 먼저 해야할 것 같습니다.

사실 007 영화는 4대 제임스 본드인 티모시 달튼이 주연을 맡으면서 하향세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영화 제작사는 부랴 부랴 티모시 달튼에 이어 5대 제임스 본드로 피어스 브로스넌을 기용하며 007 영화를 가벼운 블록버스터 첩보 액션으로 변모시켰지만, 관객들은 너무 가벼운 피어스 브로스넌의 제임스 본드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습니다. 결국 007 영화가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리부트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 [007 카지노 로얄]입니다. [007 카지노 로얄]은 제임스 본드를 연기파 배우 다니엘 크레이그로 교체하며 이전의 가벼운 이미지의 제임스 본드와 확실한 선을 긋고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007 카지노 로얄]은 제임스 본드가 그 유명한 살인 면허를 받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예 처음부터 007 영화를 시작했습니다. 마틴 캠벨 감독은 [007 카지노 로얄]을 통해 007 영화의 리부트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셈입니다.

[007 카지노 로얄]이 007 영화를 리부트하며 제임스 본드를 탄생시켰다면 마크 포스터 감독의 [007 퀀텀 오브 솔러스]는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완성시켰습니다. 그가 왜 바람둥이에 냉소적인 스파이가 되었는지 [007 퀀텀 오브 솔러스]는 관객에게 친절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이제 준비는 완료되었습니다. [007 카지노 로얄]을 통해 제임스 본드의 탄생을 알려고, [007 퀀텀 오브 솔러스]를 통해 제임스 본드의 캐릭터를 완성시켰습니다. 이제 샘 멘데스 감독은 이렇게 완성된 리부트를 등에 업고 [007 스카이폴]을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처음 시작부터 M(주디 덴치)에게 배신당하고 끝 없는 나락에 빠진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는 복귀 후에도 퇴물 취급을 받기만 할 뿐입니다. 복귀 후 현장에 투입되기 위한 체력 테스트에서도 힘겨운 모습을 보이던 제임스 본드는 말로리(랄프 파인즈)에게 '조용히 숨 죽이며 살지, 왜 돌아왔냐?'는 핀잔을 들을 정도입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007 카지노 로얄]을 통해 힘겹게 리부트에 성공한 007 영화가 고작 3부작을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결심이라도 한 것일까요? 설마 그럴리가 없겠죠. 007 제임스 본드 탄생 50주년을 시끌벅적하게 홍보해 놓고 이 역사적인 시리즈를 영원히 끝내고 싶은 미친 제작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007 스카이폴]에 대한 의구심은 더욱 커집니다. 불과 5년 전에 개봉한 [007 카지노 로얄]에서 풋내기 첩보원이던 제임스 본드가 어째서 벌써부터 퇴물 취급을 받는 걸까요? [007 스카이폴]은 바로 그러한 의구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과거이다.

 

[007 스카이폴]에 대한 이러한 의구심을 풀기 위해서는 [007 스카이폴]에 등장한 악당인 실바(하비에르 바르뎀)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007 시리즈의 다른 악당과는 달리 실바는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악당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국의 안보를 해치려는 악당도 아닙니다. 그의 분노의 총구가 향한 곳은 MI6의 수장인 M일 뿐입니다.

과거 MI6의 유능한 첩보원이던 실바는 M에게 배신을 당하게 되고, 대의를 위해 자신을 포기한 M에 대한 복수심을 키워나갑니다. 결국 [007 스카이폴]의 악당은 다름아닌 M의 과거인 셈입니다.

MI6의 내부 사항을 꿰뚫어보고 있는 실바는 최첨단 기계를 이용한 천재적인 두뇌로 M를 궁지에 몰아 넣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던 이전의 악당들과 비교해서 스케일이 굉장히 작은 악당인 셈입니다. 하지만 M의 입장에서는 그 어떤 악당보다 골치 아프고, 그 어떤 악당보다 무시무시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임스 본드가 실바를 처지하는 과정입니다. MI6의 최첨단 장비가 오히려 실바에게 이용되며 M이 궁지에 몰리자 제임스 본드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실바를 처지하려 합니다. 그렇게해서 제임스 본드가 M과 함께 향한 곳은 자신이 유년시절을 보낸 스코틀랜드의 한적한 전원 저택입니다.

 

M의 과거와 맞서 싸우는 제임스 본드가 선택한 장소는 자신의 과거가 깃들어 있는 옛 집인 것입니다. 이러한 설정은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제가 앞선 부분에서 스코틀랜드에서의 액션씬은 007 제임스 본드 영화 중에서 가장 낯설은 액션이라고 언급했었습니다. 사실입니다. 이전의 제임스 본드는 Q가 제작한 최첨단 무기를 이용하여 적을 무찔렀습니다. 하지만 [007 스카이폴]에서는 마치 게릴라전을 방불케하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실바를 처치하려 합니다.

M의 발목을 잡는 것이 실바와의 과거의 악연이라면 그러한 실바를 처치하는 것은 제임스 본드의 과거를 이용한 가장 원시적인 방법인 것입니다. 결국 제임스 본드와 실바의 마지막 대결은 과거와 과거의 대결이 됩니다.

그렇다면 샘 멘데스감독은 왜 이토록 과거에 집착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그는 [007 카지노 로얄]로 리부트된 제임스 본드가 완벽하지는 않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사실 M을 주디 덴치가 연기한 것은 17편인 [007 골든아이]부터였습니다. [007 카지노 로얄]로 007 시리즈가 리부트되고 제임스 본드가 가벼운 바람둥이 피어스 브로스넌에서 다니엘 크레이그로 바뀌었지만 M만은 여전히 주디 덴치였던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007 골든아이]의 감독도 마틴 캠벨이었고, [007 카지노 로얄]의 감독도 마틴 캠벨이었습니다.

샘 멘데스가 지우려 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M이었습니다. 그는 007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 다음으로 중요한 캐릭터인 M을 바꾸지 않고서는 007 시리즈의 진정한 리부트는 없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결국 [007 스카이폴]은 예전 007 시리즈의 유일한 잔재인 M을 지우는 과정인 셈입니다.

 

 

과거의 습격을 이겨내며 과거에서 벗어나다. (약간의 스포 포함)

 

007 영화 사상 가장 이질적인 스코틀랜드에서의 마지막 액션을 끝으로 [007 스카이폴]은 모든 과거의 악령을 떨쳐 냅니다. 

제임스 본드의 심리적 불안정 요소였던 과거의 상처는 그의 어릴적 저택이 폭파되며 더이상 그의 발목을 잡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제임스 본드는 저택을 폭파시키면서 '어릴적부터 난 이 집이 싫었어.'라며 썩소를 날려줍니다.)

그 중 가장 큰 수확은 역시 M의 죽음입니다. 워낙 주디 덴치가 M 역을 잘 해줘서 M을 지우는 것이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주디 덴치의 존재는 샘 멘데스 감독이 [007 스카이폴] 자체를 M을 지우는데 이용해야 했을 정도로 엄청난 댓가를 치루게 했습니다. 그러한 댓가는 [007 스카이폴]을 007 영화사상 가장 이질적인 영화로 만들기도 했지만, 분명 [007 스카이폴]의 희생은 다음 시리즈에서 진가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주디 덴치에 이어 새롭게 M으로 등극한 랄프 파인즈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연기파 배우인 랄프 파인즈가 다음 시리즈에서 얼마나 M역을 완벽하게 수행하느냐에 따라 [007 스카이폴]의 희생이 빛을 발하던가, 아니면 엉뚱한 뻘짓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샘 멘데스 감독은 M만 리부트한 것이 아니라 이번 기회에 시리즈가 진행되며 점차 잊혀졌던 머니페니(나오미 해리스)도 복귀시킵니다. 저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브가 바로 머니페니라는 점이 밝혀졌을때 반가움으로 온 몸에서 소름이 끼쳤습니다. 샘 멘데스 감독의 꼼꼼함에 경이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샘 멘데스 감독은 [007 카지노 로얄]과 [007 퀀텀 오브 솔러스]를 통해 리부트가 완료되었다고 생각했던 제게 '무슨 소리, 아직 청산되어야할 과거가 남아 있어.'라며 하나 하나 꼼꼼하게 리부트를 완료한 셈입니다.

그 결과 [007 스카이폴]을 리부트가 완료된, 완성형 007 영화일 것이라 기대했던 대다수의 관객에게 실망을 안겨줬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제 뒷좌석의 남성은 코를 골며 잠을 청했고,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을 나가던 분들 중에서 '지루했어.'라며 투덜거리는 분들도 많이 계셨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007 스카이폴]을 리부트가 완료된 완성형 007 영화가 아닌 리부트 완료를 목적으로 한 진행형 영화로 본다면 [007 스카이폴]은 007 시리즈 리부트를 완벽하게 완료시킨 영화로 새롭게 기억될 것 같습니다.

 

이 영화, 분명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릴 것이다.

하지만 리부트 진행형 영화라면

이 영화의 평가는 앞으로의 시리즈를 본 후 내려야 마땅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