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04년 영화이야기

[내 머리 속의 지우개] - 제대로 울린다.

쭈니-1 2009. 12. 8. 17:14

 



감독 : 이재한
주연 : 정우성, 손예진
개봉 : 2004년 11월 5일
관람 : 2004년 11월 14일


2주간의 끊질긴 노력끝에 드디어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봤습니다. 극장까지가서 돈내고 뭐하러 눈물을 흘려야하냐며 최루성 멜로 영화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구피에게 정우성이 (한번도 본적은 없지만)내 고등학교 동창임을 강조하며 극장에서 꼭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봐줘야한다고 우기고 우긴끝에 얻은 결과입니다.
제가 그토록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보고 싶어했던 이유는 가을이라는 계절탓입니다. 여름이면 시원시원한 헐리우드 블럭버스터 영화와 가슴이 오싹한 우리 공포 영화를 꼭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을에는 가슴 시린 멜로 영화 한편 봐야 제대로 가을을 즐기는 것이라는 이상한 강박관념 때문이죠. 지난주에 천신만고끝에 [이프 온리]를 인터넷으로 예매하고 영화를 보기위해 기분좋게 극장으로 갔다가 어이없게도 다음 날표로 예매를 하는 평생 단한번도 저질러보지 못한 실수를 하는 바람에 예매를 취소하고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던 저는 [이프 온리]를 포기하고 올해 가을을 제대로 즐기기위한 멜로 영화로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선택한 겁니다.
암튼 이렇게 어렵사리 깊어가는 가을에 극장에서 보게된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제겐 꽤 성공적인 최루성 멜로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며 눈시울을 뜨겁게 달구는 눈물을 참기위해 저는 안간힘을 써야 했습니다. 평생 3번 운다는 대한민국 남자로 태어나 눈물한번 맘껏 흘리지 못하는 기구한 운명속에 얽매인 저는 눈물을 기슴 속으로 삼키며 그렇게 눈에 힘주고 영화를 봐야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나서 구피의 한마디... '재미없었어'... 아마 우린 성별이 바뀌었나 봅니다. 구피가 남자로 태어나고 제가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우린 어쩌면 더욱 잘 어울리는 한쌍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


 



일단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보고나서 처음 느낀것은 이재한 감독이 관객을 제대로 울릴줄 안다는 겁니다. 물론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멜로 영화의 공식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스토리 라인은 관객이 예측했던대로만 흘러갑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슬픕니다. 최루성 멜로 영화에서 영화 자체가 슬프다는 것은 그 모든 단점을 덮어버릴만한 장점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좋아합니다.

1. 그는 멋있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예뻤다.

멜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공입니다. 멜로 영화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멋있고 예쁩니다. 물론 간혹 못생긴 주인공을 내세우는 멜로 영화도 있기는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영화가 [뮤리엘의 웨딩]이며, [코르셋]이라는 우리 영화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영화를 싫어합니다. 물론 현실적인 외모를 지닌 주인공이 펼치는 사랑 이야기는 현실적이며 신선하죠. 하지만 그런 현실적인 사랑 이야기를 보기위해 굳이 돈을 내서 극장에 앉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현실적인 사랑은 제 주위를 둘러보면 언제라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 멜로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환타지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멋진 사랑을 꿈꿉니다. 하지만 영화와 같이 멋진 사랑은 사실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그 멋진 사랑은 평범한 사랑으로 변질됩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봄날은 간다]의 상우(유지태)는 외쳤지만 사실 사랑은 변합니다. 영화에서는 안변할지 모르지만 현실의 사랑은 변합니다. 그렇기에 많은 분들이 현실에는 없는 변하지않는 완벽한 사랑을 보기위해 영화를 찾습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며 느끼는 대리만족... 그것이 멜로 영화이며, 제가 멜로 영화의 특징을 환타지라고 제 맘대로 단정짓는 이유입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제게 제대로된 환타지를 안겨줍니다. 남성다우면서도 열정적인 사랑을 가진 철수(정우성)는 완벽한 남성의 모습이며, 아름다우면서도 섹시하고 귀엽기까지한 수진(손예진) 역시 남자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여성입니다. 물론 남성 관객들은 항변할지도 모릅니다. 철수같은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여성 관객들도 항변할지 모릅니다. 수진은 구태의연한 뻔한 캐릭터라고... 하지만 여성 관객들이 철수에게 매력을 느끼고, 남성 관객들이 수진을 보호하고 싶은 본능을 느꼈다면 이 영화의 환타지는 완벽하게 성공한 셈입니다. 어차피 환타지라는 것이 그런 것이니까요.


 



2. 이재한 감독의 재능이 예사롭지 않다.

최루성 멜로 영화들이 가장 쉽게 저지르는 실수는 바로 성급함입니다. 관객의 눈물을 쏟게 하겠다는 야심만으로 섣부르게 슬픈 장면들을 영화의 초반부터 배치하고 관객들이 눈물을 흘려주기만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눈물이라는 것은 웃음과는 틀립니다. 웃음은 언제든지 터져나올수 있는 감정이지만 눈물은 아닙니다. 아주 서서히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치솓는 것이 눈물입니다. 그러니 영화의 초반부터 슬픈 장면들을 배치한다고해서 관객들의 눈물을 얻을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눈물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런 면에서 이재한 감독은 상당히 능수능란하게 관객들의 눈물을 얻어냅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영화의 중반까지 최루성 멜로 영화가 아닌 완벽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처럼 보입니다. 영화는 심심치않게 관객들을 웃깁니다. 수진의 푼수 친구들이 그 대표적인 예죠. 그리고 너무나도 행복해보여서 셈이 날만한 철수와 수진의 사랑을 장시간 보여줍니다. 나도 저런 멋진 사랑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관객들의 머리속에 가득차게 하기 위해 이재한 감독은 모든 환타지를 동원해서 영화를 예쁘게 꾸며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영화 후반의 슬픈 장면을 위한 것입니다. 행복이 크면 클수록 슬픔 역시도 크다는 것을 이재한 감독은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이 영화를 보러온 관객들은 이 영화가 최루성 멜로 영화라는 사실을 모두들 알고 있었을 것이며, TV나 신문 혹은 인터넷등 넘쳐나는 영화 정보들로 인하여 수진이 알츠하이머병이 걸릴것이라는 사실을 대부분 알고 계셨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 초반의 환타지는 그러한 사실을 잊고 맘껏 행복에 젖게 만듭니다. 그리고 어느사이 성큼 다가선 슬픔으로 서서히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거죠.
바로 그러한 점이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에서 특별한 점이라고는 발견할 수 없으면서도 최루성 멜로 영화로써 매력적인 이유입니다. 이재한 감독은 관객들을 울리기위해 영화의 초반부터 완벽한 환타지를 만들어내는 치밀함을 보여줬으며, 그 환타지속에 감춰진 슬픔이라는 감정을 서서히 고조시키며 관객들의 가슴 깊이 잠재되어 있는 눈물샘을 자극한 겁니다. 정말 대단한 재능입니다.


 



3. 이 영화는 극적이지 않다. 그래서 더욱 슬프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보며 저는 자꾸만 [첫 키스만 50번째]가 생각났습니다. 단기기억상실증을 헐리우드식 로맨틱 코미디로 탈바꿈시킨 이 영화는 제겐 올해 본 로맨틱 코미디중에서 최고의 영화로 기억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루시(드류 배리모어)의 단기기억상실증과 수진의 알츠하어머병은 분명 틀리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슷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첫 키스만 50번째]처럼 극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찌보면 [첫 키스만 50번째]와 비교한다면 영화적인 재미는 상당히 떨어지는 편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극적이지 않기에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더욱 슬펐는지도 모릅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일본에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입니다. 저는 알츠하이머병(일명 치매라고도 하죠)이 나이가 드신 노인들만 걸리는 병일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유전적인 이유로 젊은 나이에도 알츠하이머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 영화속의 슬픔이 단지 영화적인 장치만은 아닌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슬픔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환타지로 가득찬 영화입니다. 하지만 실화라는 현실성을 바탕으로 두고 있기에 단순한 슬픔 이상의 감정을 가질 수 있었던 겁니다. 이 영화가 좀더 극적인 스토리 전개를 가지고 있다면... 그래서 [첫 키스만 50번째]처럼 현실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환타지로만 가득한 영화라면... 어쩌면 이렇게 슬프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찌되었건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최루성 멜로 영화이니 영화적 재미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관객들의 눈물이 가장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가을이라는 분위기와 어울리는 멜로 영화를 보고나니 정말 가을이라는 계절이 뼈속까지 느껴지는 군요. 역시 계절에 맞는 영화는 따로 있는가봅니다. 올 가을이 가기전에 따뜻한 멜로 영화 한편 더 볼까 생각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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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윤수
쭈니님은 재밌게 보셨나보네요 ^^
기회가 되신다면 이프온리도 보시고 리뷰를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 갠적으로 이프온리를 더 재밌게 봤거든요.
 2004/11/19   
쭈니 이프온리... 정말 아픈 기억입니다.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할줄이야... 11월엔 극장에서 영화안보기로 구피와 약속했으니 아마도 못보게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나중에 비디오로 출시되면 그땐 당장 달려가 보겠습니다.  2004/11/19   
나도 이프온리 이야기 쓰려고 내려왔는데...^^
첫키스만..., 이프온리, 노트북, 지우개...중에 전
첫키스가 가장 재밌었고...음. 봤던 순서대로 재밌었네요. ^^ㅎㅎ
지우개...역시 이번도 아무런 정보없이 보게 되었는데
정말 그 지우개가 그 지우개일줄 몰랐어요.;;;
그래서 오히려 실망감에 재미가 좀 덜했던것 같아요. ㅎㅎ
제 남자친구도 디게 재밌어하던데...ㅋㅋ
암튼, 이프온리에 대한 아픈기억은 정말 안타까운 사연입니다.T^T
정말 내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어서 더 좋았던 영화였습니다.
꼭~ 구피님과 함께 손 꼭 잡고 보시길~ ^^
그럼....이만, 쭈니님, 따뜻한 겨울 되세요~ ^-^
 2004/12/06   
쭈니 아~ 또 이프온리에 대한 추천글이군요. 이 영화 봐야하는데... 쩝~~~ 껌님도 따뜻한 겨울되세요. ^^  2004/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