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와이 슈운지
주연 : 스즈키 안, 아오이 유우, 카쿠 토모히로
개봉 : 2004년 11월 17일
관람 : 2004년 11월 11일
11월 11일은 빼빼로 데이입니다. 구피와 연애할때는 커다란 빼빼로를 사서 선물했었는데 결혼하고나니 '그런건 전부 상술이야'라며 애써 빼빼로 데이를 외면했죠.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자니 뭔가 아쉽고, 남들처럼 빼빼로를 사서 선물하자니 '상술'에 넘어가는 것만 같고...
이렇게 빼빼로 데이를 어떻게 보낼지 고민을 하던중에 이런 제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하나와 앨리스]의 시사회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빼빼로 데이를 맞이하여 몰빵시사회라는 특이한 형식으로 열린 [하나와 앨리스]의 시사회는 일단 시사회 참가자들이 사탕이나 초코렛을 하나씩 산 후 입장시 영화 티켓과 교환을 합니다. 그렇게 모아진 사탕이나 초코렛은 추첨을 통해 한명에서 몰아서 주는 거죠. 시사회 입장시 영화 티켓과 더불어 빼빼로도 하나씩 나눠줬으니 빼빼로도 공짜로 받고, 영화도 공짜로 보고, 그리고 이벤트에도 참가하여 스릴도 맛보고, 암튼 일석삼조의 유쾌한 시사회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벌어졌습니다. 화요일엔 [나비효과]시사회에, 목요일엔 [하나와 앨리스]시사회에 연달아 참석한 구피는 그렇지않아도 요즘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느라 힘이든데 집에서 편히 쉬어야할 퇴근후에는 절따라 시사회에 참가하느라 진이 빠져버렸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짜증을 내더군요. 저야 영화를 보면 쌓여있던 스트레스가 싹 풀리는 이상체질이지만 구피는 그렇지 못하니 구피의 짜증을 이해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솔직히 조금 섭섭하더군요. 담배도 피우지 않고, 결혼후엔 거의 술도 먹지 않는 제게 있어서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은 영화보기뿐인데, 단지 일주일에 한편정도 극장에서 영화보기를 원하는 것 뿐인데, 그것이 구피에겐 그토록 힘든 일이었는지...
암튼 재미있게 영화를 보고나서 괜히 구피와 냉랭한 분위기속에 빼빼로 데이를 마감했습니다. 그런 냉랭한 분위기는 다음날 아침 바로 풀렸지만 아직도 저는 고민입니다. 제 입장에선 영화를 자주 보러가면 좋겠지만 구피를 생각한다면 그럴수도 없고, 그렇다고 혼자서 영화를 보러가기는 싫고, 영화를 같이 봐줄 다른 사람은 없고, 이젠 영화 보는 것도 남의 눈치를 봐야한다니 왠지 서글퍼집니다.
일본 영화의 전면개방으로 이젠 손쉽게 최신 일본 영화들을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지만 아직까지 일본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것은 제겐 낯설기만 합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극장에서 본 일본 영화는 손으로 꼽을 정도이며,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영화는 [러브레터]뿐입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하나와 앨리스]라는 영화를 처음 접한 제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이름은 이와이 슈운지 감독입니다. '아! [러브레터]를 만든 그 감독이 만든 영화잖아' 이것이 [하나와 앨리스]에 대한 제 첫느낌이었습니다.
[러브레터]... 제가 지금까지 본 일본영화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이 영화는 완벽한 순수 그 자체의 사랑이야기였습니다. 나카야마 미호(저는 자꾸만 그녀와 히로스에 로쿄를 혼동합니다.)는 너무나도 예뻤으며, 화면은 마치 동화속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이 완벽하게 멋있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이와이 슈운지 감독이 남성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남성이 이런 소녀적 감수성의 영화를 완벽하게 만들어 냈는지 믿어지지가 않은 거죠.(처음엔 이와이 슈운지 감독이 여성 감독인줄 알았습니다. 슈운지... 순자... 왠지 여성의 이름같지 않나요? ^^;)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하나와 앨리스]는 [러브레터]의 연장선안에 있는 영화처럼 보였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게다가 영화를 보기전에 스토리 라인을 읽어보니 이건 완전히 [러브레터]의 명랑소녀 버전이더군요. [러브레터]의 그 순수한 사랑에다가 엉뚱한 소녀들의 거짓말에 의한 유쾌한 웃음을 가미시킨 이 영화는 제게 [러브레터]보다 재미있는 일본영화를 만날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을 안겨줬습니다.
이제 막 고등학교에 진학한 단짝 친구인 하나(스즈키 안)와 앨리스(아오이 유우). 평범한 고등학생이던 그들의 일상에 하나가 미야모토(카쿠 토모히로)선배를 짝사랑하며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나는 미야모토의 사랑을 얻기위해 거짓말을 늘어놓기 시작하고, 그 거짓말은 어처구니없게도 하나와 앨리스 그리고 미야모토의 삼각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 영화의 초반은 제가 예상했던대로 흘러갑니다. 단지 사랑을 얻기위해 만들어낸 거짓말이 초래한 가장 친한 친구간의 삼각관계. 이와이 슈운지 감독은 이 삼각관계를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과 연결시키며 영화를 이끌어나갑니다. [러브레터]가 사랑을 잃은 슬픔에 기초를 두고 있다면 [하나와 앨리스]는 잔잔한 미소가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으로 영화를 끌고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영화가 중반으로 흐르며 조금 이상해집니다. 하나와 앨리스, 그리고 미야모토의 삼각관계에 집중해야할 카메라가 갑자기 그들의 삼각관계와는 별다른 상관이 없는 하나와 앨리스의 발레장면을 장시간 잡아내는가하면, 앨리스와 그녀의 철없는 어머니, 그리고 이혼으로 따로 사는 아버지의 에피소드를 느닷없이 꺼내들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앨리스의 배우 오디션 장면이 마치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인양 보여지기까지 합니다. 과연 발레와 앨리스의 가정사, 그리고 배우 오디션 장면이 그들의 삼각관계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러브레터]가 시종일관 사랑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한 반면 [하나와 앨리스]는 어느순간부터 사랑은 뒷편으로 밀어내고 자꾸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부터 저는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쩜 이 영화가 진정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순수한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렇다면 이 영화가 진정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뭘까요? 제가 느낀 이 영화의 주제는 바로 성장입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사랑 영화가 아닌 성장 영화라는 겁니다. 미야모토와의 사랑을 통해 하나와 앨리스라는 두 소녀의 성장을 담은 영화인거죠.
먼저 하나부터 이야기하죠. 그녀는 소극적인 성격의 평범한 소녀입니다. 앨리스가 당당하게 자신이 찜한 남자를 보여주는 반면 하나는 남몰래 그의 사진을 찍어 혼자 짝사랑을 키워나갑니다. 결국 그녀가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도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에 의한 임기웅변입니다. 거짓말로 인해서 이뤄진 사랑은 아슬아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는 그 워태로운 사랑을 잡기 위해 자꾸 거짓말을 해대고 그 거짓말은 오히려 사랑은 물론 우정까지도 위태롭게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발레입니다. 남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언제나 외톨이였던 자신의 손을 잡고 발레 학원으로 이끌었던 앨리스의 그 소중한 우정을 깨닫는 순간 하나는 소극적인 소녀에서 당당한 여자로 성장합니다. 그녀는 더이상 거짓말로 사랑을 지켜려 하지도 않을 것이며, 사랑보다 더 소중한 앨리스와의 우정도 지킬 것입니다.
앨리스의 성장은 이 영화가 가장 중요하게 잡아낸 주제입니다. 미야모토와의 사랑을 시작하기전 그녀는 겉보기엔 밝고 명랑하지만 내면엔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어두운 면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르는 그런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배우 오디션 현장에서 소극적인 자세로 임하는 그녀의 모습은 앨리스라는 캐릭터를 설명하는데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하지만 미야모토와의 사랑으로 아버지와의 잃어버린 추억을 되새김질한 그녀는 어느순간 아버지의 부재라는 어두운 면에 갇혀있던 자신을 꺼내들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성장은 영화의 마지막 오디션 현장에서의 종이컵 발레 장면으로 표현됩니다. 어린 소녀의 틀을 깨고 진정한 여자로 성장한 그녀의 발레는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이렇듯 [하나와 앨리스]는 솔직히 제가 기대해던 [러브레터]식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와이 슈운지 감독은 사랑보다 더욱 중요한 성장을 잡아냄으로써 [하나와 앨리스]를 평범한 멜로 영화가 아닌 의미있는 성장 영화로 발전시킨 겁니다. 풋풋한 첫사랑으로 인해 소녀에서 여자로 성장한 하나와 앨리스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저는 가슴속으로 박수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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