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변혁
주연 : 한석규, 이은주, 엄지원, 성현아
개봉 : 2004년 10월 29일
관람 : 2004년 10월 29일
고수와 송지효라는 젊은 배우들을 앞세운 장윤현 감독의 [썸]과 한석규, 이은주, 성현아 등 스타급 배우들의 협연으로 개봉전부터 화제를 몰았던 변혁 감독의 [주홍글씨]는 닮은 점이 많은 영화입니다. 두 영화 모두 개봉시기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일주일 간격으로 2004년 가을에 맞춰진것도 그렇고, 스릴러라는 우리 영화로는 낮설은 장르를 취한 것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두 영화의 가장 큰 공통점은 우리 스릴러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줬던 [텔 미 썸딩]의 존재입니다. 장윤현 감독은 [텔 미 썸딩]의 감독이었으며, 한석규는 주연배우였던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발견됩니다. [텔 미 썸딩]이후 장윤현 감독과 한석규는 활동을 오랜 기간동안 쉬었다는 점입니다. 장윤현 감독은 [텔 미 썸딩]을 연출한 후 5년이라는 기간동안 제작자로 활동하다가 [썸]을 연출했으며, 한석규는 [텔 미 썸딩]을 끝으로 3년동안 배우생활을 접었다가 2003년 1월에서야 [이중간첩]으로 관객의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게다가 한석규와 함께 [텔 미 썸딩]의 주연을 맡았던 심은하는 그해 변혁 감독의 데뷔작 [인터뷰]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으니 정말 묘한 인연이죠. 아마 그러한 공백기간과 은퇴 선언이 [텔 미 썸딩]으로 모든 에너지를 소모해버린 그들의 어쩔수없는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는지...
그런 의미에서 [썸]과 [주홍글씨]는 결코 [텔 미 썸딩]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는 영화입니다. [텔 미 썸딩]이 제게 안겨준 충격이 컸기에 저는 [텔 미 썸딩]의 두 주역인 장윤현 감독과 한석규의 차기작을 손꼽아 기다렸으며, 이렇게 비슷한 시기에 그것도 [텔 미 썸딩]과 같은 스릴러 장르로 다시한번 장윤현 감독과 한석규를 만나게 된겁니다. 그러니 제가 [썸]과 [주홍글씨]에 스릴러 장르로써의 완성도를 기대했던 것은 당연한 결과겠죠.
하지만 [썸]과 [주홍글씨]에게는 또한가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겉보기엔 완벽한 스릴러 장르의 영화이지만 막상 영화는 스릴러가 주가 아닌 다른 장르가 주를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썸]은 스릴러를 가장한 액션이며, [주홍글씨]는 스릴러를 첨가한 멜로 영화입니다. 그러한 점이 제겐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그래도 획일화된 코미디 장르에서 벗어나 신선한 새로운 장르를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썸]과 [주홍글씨] 모두 어느정도의 가치는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1. 모든 유혹은 재미있다.
[주홍글씨]는 기훈(한석규)의 '모든 유혹은 재미있다. 항상 장난같이 시작된다. 왜 피하겠는가?'라는 나래이션으로 시작합니다. 영화의 포스터와 광고에도 사용된 이 도발적인 문구는 마치 '모든 유혹은 재미있다. 그러니 여러분도 우리 영화의 유혹을 재미있게 즐겨라.'라는 변혁 감독의 속삭임으로 들렸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재미있는 유혹이 펼쳐지는지 지켜봐 줄까?' 스릴러 영화는 감독과 관객간의 두뇌싸움이라고 생각하는 저는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변혁 감독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습니다.
기훈은 모든 것을 전부 가진 것처럼 보이는 자신만만한 강력계 형사입니다. 아름다운 아내 수현(엄지원)과 도발적이며 섹시한 애인 가희(이은주), 그리고 사회에서의 성공. 총이 가지고 싶어 경찰이 되었을 정도로 소유욕이 남달랐던 그는 자신이 가지고 싶었던 것을 모두 소유한채 그렇게 여유만만한 삶을 즐기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던중 그에게 잔인한 치정살인사건이 맡겨집니다. 머리가 박살난채 죽어있는 남자. 그리고 피범벅이 된채 사건의 현장에 남아있던 피살자의 아내 경희(성현아). 이제 모든 것이 갖춰진 상태에서 기훈은 자신을 둘러싼 유혹의 재미를 펼쳐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변혁 감독의 캐스팅의 묘미가 발휘됩니다. 특히 가희역에 캐스팅된 이은주는 재미있는 유혹의 키포인트입니다. [번지점프를 하다], [연애소설], [안녕! 유에프오] 등 로맨틱한 영화에 주로 출연하며 스타의 대열에 오른 그녀가 [주홍글씨]에서는 과감한 노출 연기를 보여줍니다. 물론 그녀가 영화에서 노출을 시도한 것은 [주홍글씨]가 처음은 아닙니다. 그녀가 신인 배우시절 홍상수 감독과 찍었던 [오! 수정]에서의 노출씬은 [주홍글씨]보다 휠씬 야합니다. 그러나 [오! 수정]은 철저하게 작품성을 기초로 한 영화였으며(그래서 관객도 별로 많지 않았었죠), 그녀가 신인 시절에 찍은 영화였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흥행을 기초로한 오락 영화이며 이은주의 인기의 절정에 올라있는 상태인 [주홍글씨]에서의 노출 연기는 [오! 수정]보다 휠씬 충격적입니다. 이 정도면 가희의 유혹을 즐길만 하죠.
경희역에 캐스팅된 성현아 역시도 절묘한 캐스팅이라 할만 합니다. 마약스캔들과 누드사진집까지 낸 그녀의 캐스팅은 경희라는 캐릭터를 묘한 유혹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솔직히 이 영화에서 성현아의 노출은 그리 심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거의 노출이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지만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경희라는 캐릭터는 충분히 유혹적인 겁니다.
모든 유혹은 재미있다... 변혁 감독은 이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은주와 성현아를 앞세워 관객들을 유혹의 재미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2. 그러나 모든 유혹엔 그 댓가가 있다.
영화가 중반으로 흐르며 서서히 기훈의 완벽한 삶에 균열이 가고 영화 초반의 재미있던 유혹은 서서히 그 진짜 모습을 드러냅니다.
변혁 감독은 유혹은 재미있다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은주와 성현아를 앞세워 달콤한 유혹의 세계로 관객을 안내했습니다. 그러나 관객이 그 달콤한 유혹에 빠져들때쯤 변혁 감독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관객들에게 그 유혹의 댓가를 치르라고 말합니다.
수현과 가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유혹의 재미에 빠져들던 기훈은 서서히 그 유혹으로 인하여 자신이 구축해놓은 완벽한 삶이 균열되어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가희는 임신을 했고, 수현은 기훈의 외도를 눈치챕니다. 이제 재미있는 유혹은 끝이 났으며 기훈은 유혹의 댓가를 톡톡히 치뤄야합니다.
영화의 초반이 재미있는 유혹으로 인하여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면 영화의 후반은 유혹의 댓가를 요구하며 전혀 예상과는 다른 형식으로 치뤄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영화의 재미가 현저히 떨어지며 재미있는 스릴러 영화를 기대했던 관객들 사이에서 수근거림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결국 '모든 유혹은 재미있다'라던 이 영화의 광고는 처음부터 관객들을 함정의 늪으로 빠뜨리고자했던 변혁 감독의 의도였던 겁니다.
스포일러가 되고 싶지 않기에 이 영화가 요구한 유혹의 댓가가 무엇인지는 밝히지는 않겠만(이미 아침 무료 신문인 AM7이 공공연하게 밝혀버렸답니다. 아무리 공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신문이 이렇게 뻔뻔스러운 스포일러 짓을 하다니...) 이 영화가 요구한 댓가는 제가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떤 영화보다도 가혹합니다. 그 가혹하다는 의미는 단지 영화속 캐릭터인 기훈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극장에 편안하게 앉아 영화 초반의 유혹의 재미를 즐겼던 저도 이 영화의 예기치못한 후반부엔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불편할 정도였습니다.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기훈의 모습이 유혹의 댓가로 처참하게 무너지는 과정은 [올드보이]의 그것과 비교할만한 끔찍한 장면이었던 겁니다.
모든 유혹은 재미있다... 변혁 감독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미있는 유혹의 뒷편에 이렇게 날카로운 칼날을 숨기고 유혹의 댓가를 지불하라고 요구할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3. 이 영화는 스릴러 영화가 아니다.
분명 이 영화는 마지막 반전을 준비해놓은 영화입니다. (그 마지막 반전이라는 것이 제가 앞에서 이야기한 유혹의 댓가는 아닙니다.) 게다가 영화의 후반부는 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잔인한 살인사건이 나오고 그 사건을 해결해야하는 형사가 주인공입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이 영화는 완벽한 스릴러 영화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는 스릴러 영화가 아닙니다. 단지 스릴러를 첨가한 멜로 영화일 뿐입니다. 변혁 감독도 이 영화를 두고 스릴러풍 멜로 영화라고 말했다는 군요. 스릴러풍 멜로 영화... 아마 이 영화를 정의하지만 이처럼 완벽한 단어도 없을 겁니다.
기훈은 수현, 가희, 경희를 사이에 두고 유혹을 즐겼습니다. 수현과는 완벽한 가정을 이루었고, 가희와는 주체할 수 없는 육체적 즐거움을 즐겼으며, 경희와는 위험하지만 야릇한 진실 게임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기훈이 유혹을 즐기는 동안 이 세 여자는 각각 이룰수 없는 사랑을 사이에 두고 위험한 게임을 해왔던 겁니다. 그것을 몰랐던 것은 기훈과 관객뿐입니다. 마치 [올드보이]에서 '왜 날 15년동안 가두었을까?'라는 잘못된 의문때문에 미궁에 빠졌던 오대수처럼 말입니다. 그가 만약 '왜 날 15년만에 풀어줬을까?'라는 의문만 가졌더라면 저는 그처럼 철저하게 [올드보이]에게서 패배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주홍글씨]도 그렇습니다. 이 영화의 키포인트는 유혹이 아닙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변혁 감독은 철저하게 유혹을 정면으로 내세워 관객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고 사랑으로 그 뒷통수를 칩니다. 하지만 [올드보이]와는 달리 그 마지막 반전이 유쾌하지 않은 이유는 [주홍글씨]가 스릴러 영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릴러 영화에서의 마지막 예기치 못한 반전은 오히려 미덕입니다. 하지만 [주홍글씨]는 영화내내 스릴러인척 관객을 속이다가 후반부에 가서야 멜로 영화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힙니다. 그러니 속았다고 생각하는 관객들은 영화가 끝나면 불쾌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저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 영화에 바랬던 것은 스릴러이지 멜로가 아닙니다. 이 영화의 후반부는 제게 [올드보이]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아직도 제게 최고의 우리 영화는 [올드보이]입니다.) 충격적이었지만 그 충격은 영화적인 쾌감으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그것은 제가 이 영화와의 게임에서 졌기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가 날 속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경희는 말합니다. '사랑하면 괜찮은건가요?'라고... 아니 속았다는 이 기분은 결코 사랑만으로는 괜찮아질것 같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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