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2년 영화이야기

[메리다와 마법의 숲] - 나 또한 곰이 되어야 할 부모가 아닐까?

쭈니-1 2012. 10. 4. 18:11

 

 

감독 : 마크 앤드류스, 브렌다 챕먼

더빙 : 켈리 맥도널드, 빌리 코널리, 엠마 톰슨

개봉 : 2012년 9월 27일

관람 : 2012년 10월 2일

등급 : 연소자 관람가

 

 

나의 23년전 일기장을 웅이와 펼쳐보며...

 

추석 연휴의 바쁜 일정이 끝나고 구피도, 저도 기진맥진하여 마루 바닥을 뒹굴었습니다. 10월 2일은 평일이었지만 웅이도 학교 안가고, 저와 구피 역시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되는 보너스 휴일날. 저는 이 보너스 휴일을 위해 웅이와 [메리다와 마법의 숲]을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웅이가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항상 영화 보기에만 그친다는 것입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저와는 달리 웅이는 글쓰기를 끔찍히도 싫어합니다. 여름 방학 숙제로 쓴 일기도 쓰기 싫어 뭉그적거리다가 구피에게 한바탕 혼이 나면 그제서야 억지로 쓸 정도입니다.

이렇게 글 쓰기를 싫어하다보니 웅이는 2012년에 극장에서 20편의 영화를 보겠다고 계획을 세워놓고도 2012년 동안 저와 본 영화가 무엇인지, 몇 편을 봤는지도 전혀 기억을 못합니다. 자신이 본 영화를 기록을 하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런 웅이를 위해 저는 1989년 그러니까 제가 고등학교 1학년때 썼던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서 웅이에게 보여줬습니다. 당시의 저는 일기장에 그림도 그리고, 색칠도 하고, 사진도 오래 붙이고, 시도 쓰고, 소설도 쓰는 꽤 여성스러운 감수성을 지닌 사춘기 소년이었습니다. 당연히 당시 봤던 영화도 하나 하나 소중히 기록을 했었습니다.

그런 제 일기장을 본 웅이는 너무 재미있어 하더군요. 그런 웅이에게 저는 '너도 이렇게 소중히 일기를 쓰고, 소중히 영화 감상평을 써두면 추억도 오래 간직할 수 있고, 나중에 아들이 생기면 이렇게 함께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줬습니다.

웅이는 당장 그러겠다며 의욕을 불태웁니다. 그래서 저는 웅이의 첫 영화감상노트를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웅이의 영화감상노트에 적을 첫 영화로 [메리다와 마법의 숲]을 정했습니다. 자! 과연 웅이의 첫 영화감상노트는 제가 의도했던대로 성공적이었을까요? '에구!' 일단 한숨부터 쉬고 웅이의 영화노트 결과는 60초후 공개됩니다. (슈퍼스타 K 버전 ^^)   

 

 

픽사 애니메이션보다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가까워보인다.

 

웅이의 첫 영화감상노트의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이야기부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도 역시 슈퍼스타 K 버전 ^^)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애니메이션의 명가 픽사의 작품입니다. 이젠 픽사라는 이름만으로도 그들이 만든 애니메이션에 믿음이 갈 정도로 애니메이션의 최강자로 군림한 픽사. 이를 반영하듯이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지난 6월 22일 미국에서 개봉하여 개봉 첫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등 좋은 성적으로 2억3천3백만 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렸습니다. 월드와이드 성적은 현재까지 5억1천5백만 달러. 제작비가 1억8천5백만 달러임을 감안한다면 제작비를 훨씬 상회하는 흥행 성적을 올린 셈입니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내용을 잠시 보자면... 스코틀랜드의 공주이지만 공주로서의 삶보다는 멋진 모험을 하고 싶은 말괄량이 메리다(켈리 맥도널드)가 결혼을 강요하는 어머니 엘리노 왕비(엠마 톰슨)와 한바탕 싸우게 됩니다. 숲속을 헤매던 그녀는 우연히 마녀를 만나게 되고 마녀에게 어머니를 바꾸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메리다의 바램과는 달리 엘리노 왕비는 곰으로 변하고, 곰으로 변한 어머니를 원상태로 돌리기 위해 메리다는 좌충우돌 모험을 합니다.

 

사실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소재 면에서 픽사의 애니메이션보다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은 독특한 캐릭터를 자주 내세웠습니다. 인간처럼 말하는 장난감(토이 스토리), 각종 벌레들(벅스 라이프), 몬스터들(몬스터 주식회사),아들을 잃어버린 물고기(니모를 찾아서),  최고의 레이스 카(카), 요리사가 되고 싶은 생쥐(라따뚜이), 지구에 홀로 남겨진 청소 로봇(월 -E) 등등... 픽사의 애니메이션 중에서 주인공이 인간인 경우는 [인크레더블], [업] 등 굉장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에 반에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은 주로 인간, 그것도 여성을 내세웁니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포카혼타스], [뮬란], [공주와 개구리], [라푼젤]까지... 물론 남성이나 동물 캐릭터를 내세운 애니메이션도 많지만 디즈니 하면 역시 여성, 특히 공주 캐릭터죠.

제가 [메리다와 마법의 숲]이 소재면에서 픽사보다는 디즈니와 닮아 있다고 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디즈니의 여성 캐릭터들이 언제나 그러하듯이 메리다는 공주이면서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개척해 나가려 합니다. 여기에 감미로운 음악이 곁들여지고 귀여운 조연 캐릭터들이 감초 역할을 합니다. 픽사가 디즈니에 흡수되면서 나타난 현상일까요?

 

 

픽사 애니메이션과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구별이 의미가 있을까?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얼핏 보면 2009년 디즈니가 오랜만에 셀 애니메이션으로 귀환한 반가운 영화 [공주와 개구리]의 3D 버전으로 보입니다. 그만큼 디즈니가 오랫동안 추구했던 여성 캐릭터와 상당 부분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소재 면에서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분명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비슷하지만 다른 부분만큼은 픽사의 개성이 잘 살아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그림체입니다.

메리다는 디즈니의 공주들과 비슷한 면이 많이 있지만 외모만 놓고 본다면 다른 디즈니의 공주들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빨간 곱슬머리에 둥굴 넙적한 얼굴, 그리고 쭉 찢어진 눈, 분명 어여쁜 공주와는 거리가 멉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으시다면 2011년 국내에 개봉한 디즈니의 3D 애니메이션 [라푼젤]과 비교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다른 등장 인물등 역시 마찬가지인데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외모를 가진 퍼거스 왕(빌리 코널리)를 비롯하여 다른 세 군주들 역시 '멋지다'와는 상관이 없는 굉장히 만화적인 캐릭터들입니다. 실사보다 멋진 캐릭터의 외모를 추구했던 디즈니와 차별되는 부분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픽사의 특유의 정감있고 만화적인 캐릭터 그림체와 더불어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재기발랄한 유머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곰이 된 엘리노 여왕이 곰과는 어울리지 않는 우아한 자태를 뽐 내는 장면에서 '빵'하고 터졌습니다.

사람이 곰으로 변하는 애니메이션이라면 저는 2004년에 국내에 개봉한 디즈니 셀 애니메이션 [브라더 베어]가 떠오릅니다. 자신의 형을 죽음으로 내몬 곰을 증오하는 한 소년이 신비한 힘이 이끌려 곰으로 변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담은 영화입니다.

[브라더 베어] 역시 곰이된 소년이 어쩔줄 몰라하며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를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메리다와 마법의 숲]만큼 저를 '빵'하고 터트리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픽사 애니메이션에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처럼 픽사의 유머 코드가 저와 잘 맞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픽사 애니메이션이 가지고 있는 가슴 뭉클한 감동이 [메리다와 마법의 숲]에서는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월 -E], [업], [토이 스토리 3] 등 픽사의 애니메이션은 성인 관객마저도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번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그런 마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웅이가 이 영화를 보고 느낀 점

 

자! 오래 기다렸습니다. 과연 웅이는 자신의 첫 영화감상노트를 제대로 썼을까요? 

[메리다와 마법의 숲]을 본 후 영화감상노트를 써야할 시간이 다가오자 서서히 압박을 느끼기 시작한 웅이. 저는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잠시 집을 비웠습니다. 제가 들어오기 전까지 영화감상노트를 쓰겠다는 웅이의 약속을 받는 것 역시 잊지 않고 말입니다.

집 근처에서 간단히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들어온 저는 웅이의 영화감상노트를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쓰기 싫어서 억지로 쓴 것이 느껴지더군요. 영화의 내용도 대충 썼고, 글씨도 거의 알아먹지 못할 정도로 휘갈겨 쓰여 있더군요.

더욱 가관인 것은 [메리다와 마법의 숲]을 본 후의 느낀 점입니다. 웅이가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것은 '자신의 인생은 결코 바꿀 수가 없다'였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왜 이렇게 느꼈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웅이는 '메리다가 공주로서의 자신의 인생을 바꿀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엄마만 곰이 되고 바뀐 것은 전혀 없었잖아요.'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결국 저는 두 손 두 발 전부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영화감상노트는 엄마, 아빠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닌 너를 위해서 쓰는 것이니 쓰기 싫으면 안써도 된다.'라고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보니 웅이에게 영화감상노트를 강요한 제가 메리다에게 결혼을 강요한 엘리노 여왕처럼 느껴졌습니다. 메리다는 활 쏘기를 좋아합니다. 그녀는 어머니처럼 여성스러운 왕비의 역할을 하기 싫어합니다. 하지만 엘리노 여왕은 말합니다. '너는 왕비가 되어야 해. 그것이 너의 역할이고 너를 위한 길이야.'

어쩌면 저 역시 그랬는지도 모르겠네요. 글 쓰기를 싫어하는 웅이. 저는 웅이에게 글 쓰기를 억지로 시키며 '영화를 본 후 영화감상문을 쓰는 것이 좋다.'라고 내 생각을 일방적으로 웅이에게 강요했는지도 모릅니다. 다소곳하고 여성스러운 공주도 있고, 활쏘기를 좋아하고 말괄량이인 메리다와 같은 공주가 있듯이, 영화를 본 후 꼭 영화 리뷰를 써야 하는 저와 같은 영화광도 있고, 영화를 보는 것 자체만 즐기는 웅이와 같은 영화광도 있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쓰기 싫어서 억지로 쓴 웅이의 영화감상노트를 보며 내가 혹시 엘로노 여왕은 아니었는지 반성해봅니다. 그리고 곰이 되기 전에 너무 내 생각만 웅이에게 주입시켜서는 안된다고 다짐해봅니다. (그런데... 그래도... 웅이의 제대로된 영화감상노트가 보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욕심입니다. ^^)

 

 

웅이의 멋진 영화감상노트를 볼 수만 있다면 곰이 되어도 좋다.

단, 며칠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