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2년 영화이야기

[간첩] - 이념도, 돈도 버리고 우왕좌왕하다.

쭈니-1 2012. 9. 26. 12:53

 

 

감독 : 우민호

주연 : 김명민, 유해진, 염정아, 정겨운, 변희봉

개봉 : 2012년 9월 20일

관람 : 2012년 9월 24일

등급 : 15세 관람가

 

 

반공세대에겐 거부감이 드는 제목

 

'간첩'... 이 단어를 보면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는 거부감이 먼저 듭니다. 그건 아마 제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철저하게 반공 교육을 받으며 자란 세대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 제목 자체를 아예 '간첩'이라고 내세운 영화가 있습니다. 뭔가 세련된 다른 제목도 있을텐데 정직하고 우직하게 '간첩'이라는 제목을 내세운 이 영화. 과연 어떤 영화일까요?

영화의 오프닝에서 [간첩]은 우리나라의 간첩에 의한 흑역사를 흑백 화면으로 보여줍니다. 처음부터 '간첩'이라는 존재들에 대한 우리들의 일반적 인식을 건드린 것입니다. 그러한 오프닝에 이어 김과장(김명민)이 인천국제공항에서 긴박한 상황 속에서 무언가를 들고 빠져 나오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간첩]은 처음부터 관객들을 강하게 밀어부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김과장이 가져온 것은 우리나라의 안보를 위협하는 그 무엇이 아닌 고작 가짜 비아그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남파 '간첩'인 김과장은 우리나라에서 생계를 위해 가짜 비아그라를 팔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김과장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우민호 감독은 영화 [간첩]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영화의 오프닝 장면을 보며 제가 느낀 것은 '우민호 감독이 반공 교육을 받고 자란 나와 같은 관객들에게 '간첩'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깨려고 하는 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예전의 냉전 체제에서 '간첩'은 무시무시한 존재였습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친 후 '간첩'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어느 어린이의 안타까운 죽음은 어린 제게도 '간첩'에 대한 두려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소련의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중국도 자유경제체제를 받아들이며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공산당은 이제 더이상 무서운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이죠. 실제로 젊은 층은 북한을 우리의 주적이 아닌 우리가 안고 가야할 형제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공동경비구역 JSA]을 시작으로 수 많은 영화들이 그런 요즘 세대의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민호 감독은 아예 남파 '간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그리고 그들을 우리나라의 안보를 헤치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아닌 그저 우리와 똑같이 사는 것이 고달픈 소시민으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념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

 

이렇듯 [간첩]의 시작은 꽤 좋습니다. 남북한의 화해모드 속에서 남파된 '간첩'들은 과연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들이 살아 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돈이라는 녀석에 매달려야 합니다. '간첩'이라 할지라도 생활을 하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죠. 

김과장은 그런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돈만 밝히는 속물 캐릭터를 초반부터 잘 구축합니다. 가짜 비아그라를 잘 못 먹으면 심장마비로 죽는다는데 어떻하냐고 묻는 중간 상인에게 그들이 죽던 말던 우린 돈만 챙기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김과장. 얄밉기는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런 얄미운 인간은 주위를 둘러보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영화 속 '간첩'의 모습은 이러합니다. 김과장 뿐만 아니라 강대리(염정아)는 부동산 중개업을 하며 돈 십만원 때문에 손님에게 죽일 듯이 달려듭니다. 우대리(정겨운)는 아예 귀농하여 한우를 키우며 삽니다. 그는 이제 이념보다는 한우 가격을 개값만도 못하게 떨어뜨리는 미국 FTA 체결 반대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윤고문(변희봉)만은 돈에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하긴 나이가 들면 그때 깨닫는 법이죠.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이제 그는 북한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 되어 있습니다.

 

다소 우스꽝수럽게 표현이 되어 있지만 김과장을 비롯한 이들 남파 '간첩'의 모습에 은근히 현실감이 느껴집니다. 만약 북한이 남북한 화해 모드와 경제 불황 속에서 남파 '간첩'들에게 공작금을 제대로 보내주지 못했다면, 만약 그들이 10년 동안 그렇게 북한에 버려져 있었다면, 그들 역시 어떻게든 살아 남기 위해 자본주의에 의한 속물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들도 사람이니까요.

[간첩]은 이렇게 10년 동안 버려진 남파 '간첩'들을 통해 웃음을 안겨줍니다. 그런데 우민호 감독은 그러한 웃음을 길게, 그리고 제대로 끌고갈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생활밀착형 '간첩'들의 삶은 거의 캐릭터 소개 수준에 그칩니다. 그리고 서둘러 최부장(유해진)을 등장시켜 스토리 전개의 속도를 높입니다.

솔직히 조금 아쉬웠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돈만 밝히는 속물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간첩'들의 일상을 좀 더 세세하게 표현했으면 좋았을텐데... 캐릭터는 많고, 이야기는 전개시켜야 하다보니 김과장을 제외하고는 다른 캐릭터들을 제대로 설명할 시간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간첩]은 캐릭터 설명도 대충 건너 뛰고, 최부장을 등장시켜 새로운 스토리 전개의 전환을 맞이합니다. 캐릭터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 아쉬웠지만 돈만 밝히는 속물이 된 남파 '간첩'과 북의 암살 지령을 받고 내려온 냉혹한 킬러 최부장이 서로 충돌하며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새롭게 펼쳐지는 것입니다.

 

 

최부장의 카리스마에 모두들 압도당하다.

 

하지만 최부장의 등장과 함께 문제가 발생합니다. 영화 자체가 코믹의 옷을 벗고 갑자기 첩보 액션으로 건너뛴 것입니다.

예고편에서도 꽤 웃기는 장면이었던 김과장을 비롯한 남파 '간첩'들이 총을 잃어버렸다고 고백하는 장면까지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코믹한 분위기의 마지막입니다. 윤고문이 잃어버린 총 때문에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시작으로 [간첩]은 초반의 코믹한 분위기를 완전히 갈아 엎어 버리고 새로운 분위기를 맞이합니다.

한마디로 [간첩]이 생활밀착형 '간첩'들의 코믹한 생활를 보여주기에 최부장의 카리스마가 너무 강했던 것입니다. 우민호 감독은 최부장 역에 코믹 전문 배우로 인식이 굳어진 유해진을 캐스팅했습니다. 이러한 유해진의 캐스팅은 최부장도 김과장과 마찬가지로 코믹한 면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기대하게끔 만듭니다.

하지만 이미 [미쓰 GO]에서 연기 변신의 신호탄을 쏘았던 유해진은 [간첩]에서도 코믹 연기를 벗어버리고 냉혹한 킬러로서의 모습만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웃길 것이라 기대했던 최부장이 어깨에 힘을 팍 주고, 인상을 써가며 카리스마를 발산시키니 [간첩]은 순식간에 코미디 영화에서 첩보 액션 영화로 탈바꿈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뭐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최부장이 카리스마를 발휘하건 말건, 김과장 일행은 암살 지령과는 별도로 돈을 차지하기 위한 이중작전을 벌입니다.

이러한 이중작전만 잘 표현되었다면 [간첩]은 이념을 내세운 최부장과 돈만 밝히는 김과장 일행의 상반된 모습을 통해 영화 초반부터 구축되었던 생활밀착형 '간첩'의 모습이라는 새로운 재미를 안겨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는 일순간에 무너집니다. 돈을 노린 김과장의 이중작전에 물거품이 되는 순간 생활밀착형 '간첩'에 의한 영화적 재미도 물거품이 되어 사라집니다. 

영화의 후반부가 되며 [간첩]은 갑자기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변환됩니다. 가짜 비아그라를 판 돈을 아내에게 주지 않고 사무실 천장에 몰래 숨길 정도로 가족 대신 돈을 중요시했던 김과장도 큰 아들을 위해 갑자기 '내 가족을 건드리면 북이건 남이건 모두 죽여버리겠어.'를 외치며 절규합니다. 캐릭터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던 강대리에게 눈이 보이지 않는 장애 아들이 등장하면서 영화의 가족주의는 더욱 탄탄해집니다. 결국 우민호 감독은 '가족을 위해서...'라는 감동을 위한 손쉬운 방법을 영화의 후반부에 채택한 것입니다.

 

 

이념도, 돈도 버리고 우왕좌왕하다.

 

제가 [간첩]에 실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간첩'이라면 북의 공산주의 이념을 통해 움직이는 이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민호 감독은 영화의 초반, 이념을 버리고 돈을 선택한 자본주의에 물든 속물 '간첩'들을 보여줍니다.

이념을 내세운 최부장과 돈만 밝히는 김과장의 상반된 캐릭터. 최부장의 암살 작전과 김과장 일행의 돈을 챙기는 이중작전. [간첩]은 이념과 돈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통해 새로운 '간첩'의 이야기를 펼친 것입니다. 사실 저는 그러한 전개가 참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뚝심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감동을 위해 우민호 감독은 이 모든 것을 버리고 감동 코드의 단골 손님인 가족주의를 내세웁니다. 이념과 돈이라는 상반된 상황 속에서 줄타기만 잘 한다면 어쩌면 유쾌하고 새로운 코믹 액션 영화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관객에게 감동을 줘야한다는 강박 관념이 이 모든 것을 망쳐 버렸습니다.

 

결국 [간첩]의 패인은 너무 많은 것을 건드렸다는 것입니다. 초반의 웃음, 중반의 액션, 후반의 감동 코드까지 건드리며, 돈과 이념, 가족주의 사이를 우왕좌왕합니다.

그러한 사이에 후반부에서 최부장은 '터미네이터'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확실히 유해진 개인적으로는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고 평할 수 있을런지 몰라도 [간첩] 자체로만 놓고 본다면 유해진의 액션은 너무 과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리틀 야구장 폭파 장면의 기발함은 좋았습니다. 저는 마지막을 그런 식으로 장식할줄은 몰랐거든요. 후반부에 감동을 위해 무리한 선택을 했던 영화인 만큼 리틀 야구장 폭파 장면 역시 감동으로 포장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cool한 결말이라 산뜻했습니다.

저는 [간첩]의 예고편을 보고 기대가 컸습니다. 특히 요즘은 코미디 영화에 목말라 있어서 더욱 [간첩]의 코믹 코드가 솔깃했습니다. 하지만 [간첩] 역시 감동 코드에 매몰되고 마는 군요. 김과장이 이념과 돈을 버리고 가족주의 사이에서 우왕좌왕하지 않았다면 더욱 유쾌하게 영화를 볼 수 있었을텐데... 암튼 이래저래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였습니다.

 

 

내가 기대한 [간첩]의 재미는 이중작전으로 인한 쾌감이었다.

하지만 진정 이 영화의 이중작전은 그저 미끼에 불과했다.

에잇! 내게 이중작전을 보여달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