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2년 영화이야기

[19곰 테드] - 남자들은 이렇게 어른이 되는거다.

쭈니-1 2012. 9. 28. 11:54

 

 

감독 : 세스 맥펠레인

주연 : 마크 월버그, 밀라 쿠니스, 세스 맥펠레인(더빙)

개봉 : 2012년 9월 27일

관람 : 2012년 9월 27일

등급 : 18세 이상 관람가

 

 

나는 아직 철이 없다.

 

며칠 전 웅이와 어느 대형 서점에 갔다가 한쪽 구석에 진열되어 있는 마블, DC 코믹스의 정식 국내 번역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봤던 배트맨, 헐크, 엑스맨, 토르 등이 화려한 컬러판 만화책으로 놓여 있는 것을 본 저는 사고 싶은 욕망에 사로 잡혔습니다. 하지만 금액이 만만치 않더군요. 한 권당 1만 5천원에서 2만원 사이였습니다.

넋을 잃고 코믹스를 보고 있는 제게 웅이가 다가와 '우와 멋지다. 아빠, 그냥 사세요.'라고 꼬드깁니다. 순간 '그럴까?'라며 저는 코믹스를 덥썩 집어 들었습니다. 하지만 불현듯 떠오른 구피의 화난 얼굴... 저는 눈물을 머금으며 집어 들었던 코믹스를 내려 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충동구매를 잘 참는 편은 아닙니다. 저희 집에는 제가 충동구매로 구입한 로봇 피규어(마징카이저, 철인28호 등)들이 많이 쌓여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구피는 깊은 한 숨을 쉽니다. '이번 주에 들어갈 돈이 얼마나 많은데 얘들처럼 저런걸 덥썩 사면 어떻해?'라며 눈을 흘깁니다. 그러면 저는 '미안해.'라며 고개를 숙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웅이와 함께 신나서 새로 산 피규어를 가지고 놀기에 바쁩니다.

 

네, 저는 철이 없습니다. 벌써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어린 시절 좋아했던 로봇을 보면 사고 싶은 충동에 빠집니다. 구피는 그 돈이면 며칠 동안의 반찬거리를 살 수 있다며 잔소리를 늘어 놓지만 그래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린 시절 거대 로봇에 대한 로망이 커서도 사라지지 않았는걸요.

그리고 여기 철 없는 남자가 또 있습니다. 존(마크 월버그)이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나이가 서른다섯입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아직 곰 인형을 좋아합니다. 서른다섯의 건장한 남자가 곰 인형을 좋아하다니...(로봇도 아니고) 그런데 이 곰 인형이 그냥 인형이 아닙니다. 말도 하고, 생각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는, 살아 있는 마법의 곰 인형인 것입니다.

이렇듯 [19곰 테드]는 영화에서나 가능한 판타지의 소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재만 판타지일 뿐, 그 속의 이야기는 현실적인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저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아직 철이 들지 않은 대다수의 남자들과 그런 남자들을 이해못하는 대다수의 여자들의 이야기가 마법의 곰 인형이라는 판타지적인 소재를 취한 것이죠. [19곰 테드]에 대한 미국 박스오피스에서의 열광적인 반응은 이렇게 판타지와 현실의 조화가 잘 이뤄졌기에 가능한 결과물입니다.

 

 

평범한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드는 법.

 

[19곰 테드]는 마치 디즈니가 제작한 어린이 가족 영화처럼 시작합니다. 어느 한적한 중산층 가정을 소개하고 그 가정의 어린 소년의 소원이 마법처럼 이뤄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왕따 소년이었던 존. 그는 밤 하늘에 소원을 빌었습니다. 부모님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준 곰 인형 테드가 진짜 말도 하고, 영원히 자신과 단짝 친구가 될 수있도록 해달라고... 그리고 그 소원은 이뤄집니다.

이렇게 훈훈하게 시작한 [19곰 테드]. 하지만 오프닝이 지나고 나면 바로 현실로 돌아옵니다. 소원을 빌었던 여덟살 소년 존은 서른다섯살 어른이 되어 있습니다. 28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죠. 이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많은 것은 바뀌었습니다. 존에게는 로리(밀라 쿠니스)라는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고, 한때 마법의 곰이라며 TV 스타로 등극했던 테드(세스 맥팔레인)는 이제 잊혀진 존재가 되어 존에게 엊혀사는 신세입니다.

하지만 바뀌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여전히 철들지 않은 존과 테드입니다. 로리는 존을 사랑하지만 테드와 함께 한심한 일상을 보내는 존이 미덥지 못합니다. 언제까지 연애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법. 존과 로리는 가정을 이루어야 하고, 아이를 낳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엔 존이 좀 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이후의 이야기는 조금 뻔합니다. 테드로 인하여 존과 로리는 갈등을 겪고, 결국 로리는 존의 곁을 떠납니다. 로리와의 이별 이후 괴로워하는 존을 위해 테드는 로리를 찾아가 자신이 떠날테니 존의 곁으로 돌아와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테드가 납치되면서 벌어지는 소동까지 [19곰 테드]는 제가 예상했던 스토리 라인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착실하게 밟아 나갑니다.

말 하는 마법의 곰 인형이라는 특별한 소재를 가지고 있는 영화치고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방식이 너무 일반적이었던 셈입니다. 만약 테드가 곰 인형이 아닌 그냥 평범한 철 없는 친구로 설정되어 있었다면 [19곰 테드]는 그저 그런 영화로 전락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스 맥팔레인 감독은 꽤 영특하게 평범한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었습니다. 단지 대책없이 철 없는 친구를 마법의 곰 인형이라는 설정 하나만 살짝 바꾼 채 말입니다. 귀여운 곰 인형 테드가 엽기적인 성인 남성이나 할 법한 행위를 천연덕스럽게 할 때 터져나오는 웃음. 그것이 바로 평범한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제 옆에서 '너무 귀여워.'를 연발하며 테드에게 사랑스러운 눈빛을 마구 날렸던 여성 관객분. 만약 테드가 곰 인형이 아닌 그냥 대책없이 철 없는 남자였다면 그런 반응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정 하나만 살짝 바꿨을 뿐인데, 그 위력이 대단했던 셈입니다.

 

 

패러디는 조금 거들뿐.

 

귀여운 외모를 가졌지만 성인 남성이 할법한 행위를 천연덕스럽게 하는 마법의 곰 인형 테드. [19곰 테드]가 가지고 있는 가장 특별한 재미입니다. 

거기에 세스 맥팔레인 감독은 미국적인 코믹 코드를 삽입시킵니다. 우리나라 관객에겐 어리둥절할지도 모를 미국적 코믹 코드는 사실 [19곰 테드]를 이루는 재미 중에서 꽤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미국에서만 2억 달러가 넘는 대박 흥행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존과 테드가 공유하고 있는 80년대 미국 문화에 대한 패러디 코드가 관객들에게 공감을 얻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한 요소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플래쉬 고든'입니다. 풋볼 선수가 이상한 별에서 악당을 물리치고 공주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을 가진 1980년 [제국의 종말]. 이 B급 SF영화에서 주인공 플래쉬 고든으로 출연했던 샘 J 존스. [19곰 테드]에서는 그러한 '플래쉬 고든'이 꽤 중요한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존과 테드가 어린 시절 열광했던 영화로 그들의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존재이며, 로리가 존에게 이별을 선언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합니다.

[19곰 테드]를 보며 제가 만약 [제국의 종말]을 봤고, 플래쉬 고든에게 열광했다면 분명 샘 J 존스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영화적 재미를 더욱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비록 미국 관객에게 몇 배는 공감이 되는 코믹 코드이지만 제게도 나름 재미를 안겨줬습니다.

 

그 외에도 꽤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카메오로 등장하며 [19곰 테드]에 예상하지 못한 웃음을 안겨줍니다.

그 중에서는 저는 라이언 레이놀즈의 깜짝 출연이 가장 놀라웠습니다. '설마... 라이언 레이놀즈야? 설마...'라며 그가 등장하는 장면 때마다 제 눈을 의심했을 정도입니다.

그 외에도 자신의 이름 그대로 내걸고 나온 스타들도 많습니다. 그래미의 여왕 노라 존스는 테드와 화끈한 과거를 지닌 가수로 출연하고, [탑 건]의 톰 스커릿은 존의 결혼식에 억지로 끌려나와 투덜거립니다. 영화 오프닝과 에필로그 나래이션은 [엑스맨]에서 자비에 교수로 출연한 패트릭 스튜어트입니다.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에필로그에서도 깜짝 스타가 등장합니다. 물론 사진 뿐이긴 하지만 [수퍼맨 리턴즈]의 브랜든 루스, [트와일라잇]의 테일러 로트너도 등장하니 마지막까지 자리를 꼭 지키시길...

[19곰 테드]는 이렇듯 꽤 다양한 코믹 코드를 준비해놓은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재미는 그러한 코믹 코드로 인한 미국식 유머가 아닙니다. 바로 영화 후반에 펼쳐지는 존의 성장담... 이것이 바로 [19곰 테드]가 하고 싶었던 진정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요?    

 

 

남자들은 이렇게 어른이 되는거다.

 

판타지와 코미디로 중무장했지만 결국 [19곰 테드]는 존의 성장담입니다. 서른다섯의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철이 없는 존. 존이 테드와의 파티를 위해서 로리를 버려두고 술에 취하는 장면을 보며 저도 뜨끔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만 그런가요? 남자들에겐 그런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나요? 여자친구(혹은 부인) 몰래 친구들과 신나게 놀던 기억. 분명 이성적으로는 '딱 몇 분만 놀고 여자친구가 눈치채기 전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집에 가야지.'라고 결심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놀다보면 이성을 잃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신나게 놀면서 시간가는줄 모르게 되죠. 물론 술이 깨고, 화난 여자친구의 목소리까지 듣게 되면 후회가 밀려옵니다. 다시는 안그러겠다고 빌기도 하고, 마음 속으로 다짐도 합니다. 하지만 신나는 분위기에 취하면 그런 잘못은 반복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런 남자를 이해 못하더군요. 저 역시 결혼 초기에 그러한 문제로 구피와 참 많이 싸웠습니다. 제게 '결혼까지 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냐?'며 화를 내는 구피. 하지만 사실 저는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보니 시간가는줄 몰랐던 것 뿐인데 말이죠.

그렇다면 그렇게 철이 없는 남자들은 언제 정신을 차리고 철이 들게 되는 걸까요? 그 해답은 [19곰 테드]에 있습니다. 자신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행했던 행동들이 사랑하는 그녀를 힘들게 하고, 이별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남자들은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존이 그러합니다. 사실 저는 영화를 보며 존의 입장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테드의 파티에 존의 어릴적 우상이 와있다는데 가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죠. 처음엔 딱 20분만 있다 오겠다고 결심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술을 마시고, 분위기에 취해버리면 그러한 결심은 까맣게 잊게 됩니다. 

그로인하여 화를 내고 이별은 선언하는 로리 역시 이해됩니다. 구피가 제게 화를 내고 실망했던 것처럼 로리 역시 존의 그런 모습을 보며 그를 의지하며 평생 살 수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되는 거죠. 남자보다 철이 빨리 든다는 여자들의 비애(?)인 셈입니다.(남편 철드는 것까지 걱정해야 하니...)

하지만 예전에 '이병헌의 토크 콘서트'에서 이병헌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철들지 마라. 철이 들고 어른이 되는 순간 무한한 가능성은 닫혀 버린다.' 저 역시 그러한 말에 공감합니다. 물론 너무 무책임할 정도로 철이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인생을 즐길줄 모를 만큼 철이 드는 것도 문제가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존이 철 들기만을 바랬던 로리. 존이 철을 들기 위해선 그의 곰 인형 테드와 떨어뜨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 순간 테드를 존에게 돌려줍니다. 존이 완전히 철이 들어버리면 로리가 사랑했던 유머 감각 넘치는 유쾌한 존은 사라질 것입니다. 로리는 그것을 깨달은 것이죠. 이제 존이 깨닫는 것만 남았습니다. 로리도 만족시켜주면서 적당하게 철이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남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있을 만큼 철이 들고,

인생을 적당히 즐길줄 아는 만큼 철이 안들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것들을 잘 조절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