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2년 영화이야기

[본 레거시] - 길을 잃다.

쭈니-1 2012. 9. 14. 11:49

 

 

감독 : 토니 길로이

주연 : 제레미 레너, 레이첼 와이즈, 에드워드 노튼

개봉 : 2012년 9월 6일

관람 : 2012년 9월 11일

등급 : 15세 관람가

 

 

'본 시리즈'는 나만의 것이 아니기에...

 

제가 [본 아이덴티티]를 본 것은 2002년 10월. 그러니까 구피와 한참 달콤한 연애를 시작했을 무렵입니다. [본 아이덴티티]를 보기 전날 구피와 저는 정동진으로 해돋이를 보기 위한 단 둘만의 무박2일 첫 여행을 갔었습니다. 하지만 해돋이를 보자는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비만 흠뻑 맞고, 감기만 얻은채 돌아왔습니다. 

정동진 해돋이를 결국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달래며, 주말을 집에서 보낼 수 없다는 일념으로 함께 본 영화가 바로 [본 아이덴티티]였습니다. 당시 맷 데이먼은 착하고 듬직한 이미지만을 지닌 배우였기에 때문에 과연 '맷 데이먼에게 액션 히어로의 이미지가 맞을까?' 궁금해하며 본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런 제 우려와는 달리 저는 [본 아이덴티티]가 재미있었습니다. 그건 구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본 아이덴티티]는 영화적 재미를 통해 정동진 해돋이를 보지 못한 저와 구피의 아쉬움을 달래줬습니다.

이후 결혼한 저와 구피는 '본 시리즈'가 개봉할 때마다 [본 아이덴티티]의 추억을 떠오르며 두 손을 꼬옥 잡고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2004년에 개봉한 [본 슈프리머시]도 그랬고, 2007년에 개봉한 [본 얼티메이텀]도 그러했습니다. 특히 [본 얼티메이텀]을 보러 갈때에는 전날 제가 술에 취해 늦게 집에 들어온 까닭에 구피의 화가 많이 나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본 얼티메이텀]을 함께 보며 구피의 화가 많이 풀리기도 했습니다.

 

'본 시리즈'는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점점 극의 재미가 치밀해졌고, 처음엔 어색할 것이라 우려했던 맷 데이먼의 액션 히어로 연기도 점점 잘 어울렸습니다. 결국 어느새 제게 맷 데이먼하면 제이슨 본이 떠오를 정도로 '본 시리즈'와 맷 데이먼은 뗄래야 뗄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본 얼티메이텀]에서 제이슨 본은 기억을 되찾았고, CIA의 추악한 비밀도 들춰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난 듯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본 시리즈'와의 추억을 정리할 때가 온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할리우드가 '본 시리즈'를 이대로 보낼 수 없다며 새로운 '본 시리즈'를 내놓은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본 레거시]는 여전히 '본 시리즈'임을 강조하지만 여기엔 맷 데이먼도 없었고, 제이슨 본조차도 없었습니다. 과연 제이슨 본이 없는 '본 시리즈'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인지 궁금해지더군요.

사실 [본 레거시]를 개봉과 동시에 일찌감치 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 시리즈'는 저 만의 것이 아닙니다. 2002년부터 구피와 함께 추억을 쌓아 올린 시리즈입니다. 그렇기에 애론 크로스(제레미 레너)라는 새로운 주인공을 내세운 새로운 '본 시리즈'를 혼자 즐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늦더라도 꼭 구피와 함께 '본 시리즈'의 추억을 이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본 레거시]가 개봉한지 한참 후에야 이렇게 '본 시리즈'를 구피와 함께 볼 수 있었습니다.

 

 

제레미 레너의 매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회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빠져나와 집에 돌아온 구피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 오늘 영화보러 갈 수 있어.'라고 이야기합니다. 분명 구피도 [본 레거시]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본 레거시]가 시작되었습니다. 알래스카에서 홀로 특수 훈련중인 애론 크로스. 그는 눈 덮힌 설원의 절벽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점프를 하기도 하고, 무시무시한 늑대와 결전을 벌이기도 합니다.(늑대와의 결전 장면에서는 [더 그레이]가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제이슨 본에게 바통을 이어 받는 애론 크로스. 분명 새로운 '본 시리즈'의 주인공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입니다. 그의 탄탄한 몸은 묵직한 액션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제레미 레너는 [본 레거시]에 출연하기 이전에 이미 [미션 임파서블 : 고스트 프로토콜], [어벤져스]에 출연하며 액션 전문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혔기에 맷 데이먼처럼 어색할 것이라는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제레미 레너는 맷 데이먼이 빠진 새로운 '본 시리즈'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전 '본 시리즈'에 대한 추억이 너무 많아서인지 저는 한참동안 새로운 주인공 애론 크로스의 활약에 어색함을 느껴야 했습니다.

 

토니 길로이 감독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본 레거시]가 제이슨 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전의 '본 시리즈'의 후광을 업겠다고 다짐한 이상 토니 길로이 감독은 이전 '본 시리즈'에 대한 관객의 추억을 희석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토니 길로이 감독이 택한 것은 정공법입니다. 그는 애론 크로스에게 일찌감치 미모의 여짝꿍을 점지해주며 액션 영화의 정석을 충실히 따릅니다.

이전의 '본 시리즈'는 철저하게 제이슨 본의 원맨쇼였습니다. 물론 제이슨 본과 로맨스를 펼치는 마리라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본 슈프리머시]에서 죽음을 당하며 제이슨 본의 복수심을 불태우는 존재의 의미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본 레거시]의 마르타 쉐링(레이첼 와이즈)은 애론 크로스의 들러리에 만족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녀는 애론 크로스를 위기에서 구하기도 하고, 마지막엔 결정적인 한방으로 애론 크로스보다 더 멋진 활약을 펼치기도 합니다. 액션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의 위상이 높아진 요즘 [본 레거시]는 최근 액션 영화의 트랜드에 충실함으로서 이전의 '본 시리즈'와의 차별화를 선언한 셈입니다.

 

 

국가 안보라는 무기를 들고 나선 강화된 악당. 

 

악역이라 할 수 있는 에릭 바이어(에드워드 노튼) 역시 최근 액션 영화의 트랜드에 충실한 결과입니다. 

이전의 '본 시리즈'는 악역이라 할 수 있는 캐릭터들이 약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시리즈'를 보며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제이슨 본이 맞서야 하는 악의 존재가 그저 몇 명의 악당이 아닌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본 레거시]는 여기에 한가지를 더한 것입니다. 애론 크로스는 여전히 거대한 국가 시스템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베일에 쌓인 국가 시스템의 수장인 에릭 바이어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안입니다. 그는 미국의 안보를 위해서라면 사람들을 죽이는 것 쯤은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가 아웃컴 프로그램을 폐기시키고, 그에 관련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이유는 단지 제이슨 본에 의해 실체가 드러날 위기에 빠진 트레드스톤 때문입니다. 트레드스톤의 실체가 드러나면 아웃컴 역시 보안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아웃컴을 완벽하게 폐기하기로 합니다. 아웃컴 프로그램에 관련된 사람들은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순간부터 국가 안보를 해치는 암적인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에릭 바이어는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암 조직을 도려내려 하는 것이죠.   

 

에드워드 노튼의 서글서글한 얼굴 뒤에 숨겨진 이러한 악마성은 에릭 바이어라는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토니 길로이 감독은 에릭 바이어라는 캐릭터를 강화하기 위해 캐스팅에 꽤 신경을 쓴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에드워드 노튼의 캐스팅은 성공한 셈입니다.

사실 이전의 '본 시리즈'에서 트레드스톤 프로그램을 이끌던 블랙브라이어라는 조직의 실세들은 제이슨 본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덜덜 떨기만 했습니다. 오히려 블랙브라이어의 실체를 알고 제이슨 본을 도와주는 파멜라 랜디(조안 알렌)의 카리스마가 더 막강해 보일 정도입니다. 그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본 레거시]의 에릭 바이어는 한단계, 아니 몇단계 업그레이드된 악당입니다. 그런 에릭 바이어가 있기에 애론 크로스는 더욱 돋보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토니 길로이 감독은 이처럼 애론 크로스를 도와주는 마르타 쉐링과 애론 크로스와 맞서는 에릭 바이어의 캐릭터를 강화하며 이전의 제이슨 본에 대한 관객들의 추억을 희석시키려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어느정도 성공을 거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본 레거시]의 진정한 문제는 의외로 다른 곳에서 터지고 맙니다. 

 

 

정신적 혼란함보다 시각적 혼란함에 집착하다.

 

[본 아이덴티티]를 시작으로한 이전 '본 시리즈'의 진정한 재미는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각자 '본 시리즈'를 보며 느낀 재미는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제게 '본 시리즈'의 진정한 재미는 제이슨 본이 자신의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본 아이덴티티]에서 과거의 기억을 잃은 제이슨 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에게 쫓기며 마리라는 여성과 사랑을 하게 되고, [본 슈프리머시]에서는 마리를 죽음을 통해 제이슨 본의 개인적 복수가 펼쳐집니다. 하지만 [본 얼티메이텀]에서는 점점 자신의 기억을 찾게 된 제이슨 본이 개인적 복수에서 벗어나 블랙브라이어라는 국가 조직에 맞서 싸우게 됩니다. 

처음엔 모든 것이 불명확하던 이 시리즈는 시리즈가 진행되며 진실을 밝혀내고 영화의 크기를 늘려 나갑니다. 결국 잃어버린 한 남자의 기억이라는 아주 작은 부분에서 시작하여 미국이라는 국가의 음모라는 거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점층적 구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 레거시]는? 이 영화는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한 후에 시작합니다. 애론 크로스의 과거는 물론이고, 애론 크로스가 맞서야 하는 비밀 조직의 정체, 그리고 음모까지. 모든 것이 영화 초반부터 관객에게 오픈되어 있습니다.

 

[본 레거시]는 이전의 '본 시리즈'가 그러하듯이 여러 나라를 로케이션하며 시각적 현란함을 안겨줍니다. 알래스카에서 파키스탄, 필리핀, 서울까지... 각국에서 펼쳐지는 액션은 여전히 [본 레거시]의 재미입니다.

특히 필리핀에서 펼쳐지는 액션은 이 영화의 백미인데 [본 레거시]의 액션 스릴러로서의 재미를 충분히 살려낸 명장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겐 허전했습니다. 분명 제레미 레너는 멋졌고, 마르타 쉐링과 에릭 바이어라는 새로운 캐릭터는 애론 크로스를 더욱 돋보이게 했습니다. 서울에서의 장면은 감회가 새로웠고, 필리핀에서의 액션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나서 다음 편에 대한 설램을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명확한 상황에서 애론 크로스와 에릭 바이어의 한층 강화된 대결 밖에 기대할 것이 없는 [본 레거시]의 후속편은 [본 아이덴티티]를 본 후 명확하게 밝혀진 비밀이 아무 것도 없어서 후속편이 기대되었던 10년 전의 감정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제이슨 본은 기억을 잃으며 내면적 길을 잃고 머나먼, 그리고 위험한 모험을 벌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애론 크로스는 내면적 길은 명확하게 알고있지만, 이후 그가 마르타 쉐링과 어떤 길을 가야할지는 전혀 모르는채 바다 위를 표류하는 느낌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처럼 그는, 아니 그들은 길을 잃었습니다. 토니 길로이 감독이 길을 잃은 그들을 과연 어디로 인도할지 모르지만 사실 현재로서는 어떤 길이든 단순한 스파이 액션 이상은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본 레거시]에서 역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서울 로케 장면이다.

분명 서울이 맞고, 그들은 한국말로 대사를 하는데 난 왜 이질감이 느껴지는 걸까?

아마도 할리우드 영화에서의 서울이라는 공간이 낯설어서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