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2년 영화이야기

[링컨 : 뱀파이어 헌터] - 논픽션이 픽션을 압도하다.

쭈니-1 2012. 8. 31. 13:32

 

 

감독 : 티무르 베크맘베토브

주연 : 벤자민 워커, 도미닉 쿠퍼,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개봉 : 2012년 8월 30일

관람 : 2012년 8월 30일

등급 : 18세 이상 관람가

 

 

덴빈도 무사히 지나갔다.

 

15호 태풍 볼라벤이 이어서, 14호 태풍 덴빈이 연달아 한반도를 상륙하며 TV 뉴스에서는 연일 태풍 피해에 대비하라는 뉴스를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잔뜩 겁을 집어 먹은 저는 이번 주 내내 머리 속에 '태풍'이라는 단어에 압도되어 정신없는 한 주를 보냈습니다.

결국 볼라벤과 덴빈은 한반도에 큰 상처를 남기고 사라졌지만 불행중 다행으로 제가 사는 곳에는 별 다른 피해 없이 조용히 물러 갔습니다.

14호 태풍 덴빈의 상륙으로 잔뜩 긴장하며 보낸 지난 30일. 하지만 하늘에선 약한 비만 부슬부슬 내리다가 말더군요. 결국 덴빈이 진로를 바꾸었고 수도권에는 덴빈으로 인한 비마저 그치고나자, 이번주 내내 저를 괴롭혔던 태풍에 대한 두려움은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태풍에 대한 두려움이 말끔히 사라지니 이제 남은 것을 태풍 피해 걱정 때문에 미뤄두었던 영화 감상하기입니다. 특히 이번 주에는 보고 싶은 영화가 많이 개봉하는 만큼 정말 부지런히 영화 보기에 나서야 보고 싶은 영화를 모두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우선 그 중에서 구피와 함께 볼 수 있는 영화 [링컨 : 뱀파이어 헌터]를 먼저 봤습니다.

 

사실 구피는 잔인한 영화를 싫어합니다.(사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웃사람], [공모자들]도 도저히 못보겠다고 일찌감치 선언을 했고요. 덕분에 저는 [이웃사람]을 혼자 봐야 했고, [공모자들]도 혼자 봐야할 처지입니다.

그런 구피가 [링컨 : 뱀파이어 헌터]를 보겠다고 선언한 이유는 이 영화가 잔인하기는 하지만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통한 판타지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잔인함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지만, 이렇게 판타지적인 잔인함은 두려움보다는 쾌감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어차피 뱀파이어라는 존재가 현실적인 존재는 아니기에 주인공이 뱀파이어의 목을 자르고, 배를 갈라버려도 잔인하다는 생각보다는 괴물을 처치하는 영웅의 행동이 멋지다고 느껴지는 것이죠.

하지만 구피도, 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링컨 : 뱀파이어 헌터]가 판타지적 존재인 뱀파이어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 속의 배경은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링컨... 그는 어떻게 영웅이 되었는가?

 

[링컨 : 뱀파이어 헌터]는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사실 미국 국민이 아니더라도 링컨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또 모르죠. 서울 시장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아이돌이라면 '링컨이 누구예요?' 할지도...)

우리가 100년도 훨씬 전의 미국 대통령에 불과한 링컨이라는 이름을 알아야 하는 것은 그가 1863년 노예 해방 선언을 공표했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은 자신보다 약한 종족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링컨 : 뱀파이어 헌터]에서 아담(루퍼스 스웰)이 이야기했듯이 유대인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으며, 로마는 콜로세움에서 노예들을 사자밥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아담은 노예제도는 인간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 누구, 혹은 그 무엇의 노예라는 것이죠.

하지만 링컨은 선언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라고 말입니다. 그는 남북 전쟁에서 북군을 승리로 이끌며 미국에서 노예를 해방시켰습니다. 그러한 사실만으로도 에이브러햄 링컨은 인류의 영웅인 것입니다.

 

그런데 [링컨 : 뱀파이어 헌터]는 그런 링컨이 사실은 뱀파이어 헌터였다고 이야기합니다. 남북전쟁은 인간과 뱀파이어 간의 전쟁이었다는 것이죠. 상당히 흥미로운 상상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역사속 인물의 삶을 판타지적으로 재조명 하는 것. 그것 자체만으로 [링컨 : 뱀파이어 헌터]는 제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영화의 초반, [링컨 : 뱀파이어 헌터]는 링컨(벤자민 워커)의 어린 시절을 새롭게 각색해 나갑니다. 실제 에이브라햄 링컨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는 링컨이 아홉살이 되던 해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링컨 : 뱀파이어 헌터]는 링컨 어머니의 죽음을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이 단순한 죽음이 아닌 뱀파이어에 의한 죽음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럼으로서 어린 링컨에게 어머니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를 안겨줬고, 그를 뱀파이어 헌터로 성장시킵니다.

링컨이 헨리(도미닉 코퍼)를 만나 본격적으로 뱀파이어 헌터로서 훈련을 받고 헨리의 지령에 의해 인간 사회에 몰래 숨어 사는 뱀파이어를 차례로 제거하는 영화의 초중반부는 판타지 영화의 재미를 안겨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특히 [원티드]를 통해 판타스틱한 액션의 절정을 선보였던 티무르 베크맘베토브 감독은 [링컨 : 뱀파이어 헌터]에서도 자신의 주특기를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그 덕분에 이 영화는 매력적이고 감각적인 액션이 쉴새 없이 펼쳐지는 재미있는 판타지 액션 영화가 됩니다.

 

 

하지만 현실의 힘이 너무 거대하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으로 복수심을 가진 링컨이 헨리의 도움으로 뱀파이어 헌터가 되고, 어머니의 원수를 갚습니다. 그러는 동안 영화는 링컨과 뱀파이어의 감각적인 대결이 여러 차례 펼쳐집니다.

특히 어머니의 원수인 잭 바츠의 목장 결투씬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달리는 수 백마리의 말 위에서 펼쳐지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액션은 과연 티무르 베크맘베토브 감독답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링컨이 메리(메리 엘리자베스 원스티드)를 만나 사랑에 빠지며 급변하기 시작합니다. 에이브라햄 링컨이라는 역사적인 인물을 언제까지나 뱀파이어 헌터라는 판타지 안에 가둬둘 수 없었던 이 영화는 중반 이후 현실 속에 살짝 발을 담그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링컨은 뱀파이어 헌터의 상징적인 무기인 손도끼를 가방 안에 봉인시키고 정치인 링컨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러면서 영화는 현실이라는 무대가 껄끄러운지 스토리 진행을 무리하게 속도를 내어 진행시킵니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남북전쟁이 터지며, 링컨은 노예 해방을 선언합니다. 어쩌면 에이브라햄 링컨의 전기 영화라면 가장 중요하게 그려져야할 이러한 장면들은 [링컨 : 뱀파이어 헌터]에서는 빨리 지나가야할 장애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해는 됩니다. 이 영화가 애초에 링컨의 전기 영화는 아니니, 링컨이라는 캐릭터에게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지만 판타지 액션에서는 지루할 밖에 없는 사건들을 빨리 넘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링컨 : 뱀파이어 헌터]가 미처 대충 넘어가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남북전쟁입니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건인 남북전쟁을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배치합니다. 그러면서 논픽션인 남북전쟁과 픽션인 뱀파이어와의 전쟁을 마구 섞어 버립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남북전쟁이 뱀파이어와의 전쟁이라는 설정 자체는 흥미롭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위험했습니다. 영화의 초중반, 젊은 링컨이 인간 사회에 은밀하게 존재하고 있는 뱀파이어를 처지하는 장면들은 충분히 영화적 상상력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에서 실제 일어난 남북 전쟁 자체를 판타지적 상상력으로 대체하는 것은 판타지 액션으로 즐기기에 무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판타지적 상상력이 아닌 현실의 사건에 대한 풍자로 비춰졌기 때문입니다.

 

 

남북 전쟁을 판타지로의 각색이 위험한 이유

 

[링컨 : 뱀파이어 헌터]가 새롭게 써내려간 남북전쟁의 원인은 이렇습니다. 불멸의 존재인 뱀파이어가 미국의 남부에 자리를 잡고 그 세력을 확장합니다. 그들은 노예인 흑인의 피를 식량으로 하고 있기에 노예 해방을 선언한 링컨은 그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뱀파이어들은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들의 식량을 지키기 위해... 결국 남북전쟁은 미국을 뱀파이어라는 괴물에게서 지키기 위한 링컨의 영웅적인 전쟁이 됩니다. 만약 링컨이 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미국인 뱀파이어의 나라가 되겠죠. 뱀파이어의 수장격인 아담은 '이제 우리들만의 나라를 가질 때가 되었다.'라고 선언합니다.

실제 남북전쟁의 원인은 여러기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노예를 통해 면화를 재배하고 이를 영국으로 수출하는 미국 남부 지방의 산업 형태가 가장 큰 요인입니다. 그들에게 노예 해방은 면화 산업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노예를 점진적으로 해방시키려는 링컨 대통령에 맞서 미국남부연합을 결성합니다. 하지만 링컨은 그 어떤 주도 미국 연방에서 분리, 탈퇴할 권리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에 남부연합은 독립 전쟁을 벌인 것이죠.

자! 판타지와 현실을 함께 놓고 보니 [링컨 : 뱀파이어 헌터]의 의도가 보입니다. 그것은 노예를 통해 면화 산업을 유지해온 남부의 부르조아 계급을 뱀파이어로 풍자한 것입니다. 노예의 피를 빨아 먹는 영화 속의 뱀파이어들은 실제로 노예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남부의 부르조아가 되는 셈입니다.

 

물론 저는 그 시절 남부의 부르조아 계급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이 흑인 노예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결국 자신의 부를 챙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뱀파이어라는 괴물로 풍자한 것은 조금 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 TV에서 자주 방영했던 반공 애니메이션 '똘이 장군'에서 북한군은 늑대나 여우로, 그리고 북한의 수령은 돼지로 표현되었습니다. 당시는 군사 독재시절이었고, 반공은 어린 우리들이 배워야할 필수 항목이었으니 가능했던 애니메이션이었을 것입니다.

[링컨 : 뱀파이어 헌터]가 남부군을 뱀파이어로 표현한 것과 '똘이 장군'이 북한의 수령을 돼지로 표현한 것... 과연 다른 것이 있을까요? 이것은 판타지적 상상력이라는 영화 고유의 영역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과한 표현인 것입니다. 

[링컨 : 뱀파이어 헌터]는 링컨 대통령과 그의 업적이라는 논픽션 아래 링컨이 뱀파이어 헌터라는 픽션을 얹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진정 영화는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분명히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한 경계가 느슨해져 버리는 순간 이 영화가 표현하고자 했던 판타지 액션이라는 픽션은 링컨 대통령의 위대한 업적이라는 논픽션의 위력에 압도되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죠.

[링컨 : 뱀파이어 헌터]는 2012년 6월 22일 미국 개봉하여 첫주 박스오피스 3위에 그치는 등 부진한 흥행을 보이다가 3천7백만 달러의 흥행만 기록한 채 쓸쓸히 막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 영화가 6천9백만 달러가 투입되었고, 오락영화로서 충분한 시각적 재미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아쉬운 결과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과연 미국 남부에 사는 관객들이 [링컨 : 뱀파이어 헌터]를 보며 이 영화의 오락적 재미를 온전하게 느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오랜 조상을 뱀파이어로 묘사했는데 말입니다. 결국 미국에서의 흥행 실패는 논픽션이 픽션을 압도한 결과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영화의 상상력은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상상력은 현실의 영역을 침범하면 안된다.

자신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이 돼지가 되기도 하고,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해서 괴물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