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2년 영화이야기

[광해 : 왕이 된 남자] - 너희에겐 가짜일지 모르지만 내겐 진짜다.

쭈니-1 2012. 9. 10. 11:49

 

 

감독 : 추창민

주연 : 이병헌, 류승룡, 한효주, 김인권, 장광

개봉 : 2012년 9월 13일

관람 : 2012년 9월 8일

등급 : 15세 관람가

 

 

무엇이 이 영화에 논란을 일으키는가?

 

제게 주말은 가족들과 함께 보내야 하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특히 맞벌이하는 부모 탓에 평일에는 외가에서 지내야 하는 웅이. 주말은 웅이에게 부모 노릇을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한 셈입니다.

요즘 낚시에 취미를 붙였고, 그로인하여 주말에 낚시를 가는 일이 빈번해졌기에 낚시 일정이 없는 주말에는 특히나 웅이와 무엇을 하면서 주말을 보낼 것인지 고민을 합니다.(조금 있으면 쭈구미 낚시철이라 그 전에 더욱 열심히 웅이와 놀아줘야 합니다.)

그런 제게 토요일 저녁에 [광해 : 왕의 된 남자]의 시사회 및 이병헌 토크 콘서트에 참가해 달라는 메일이 왔습니다. 지난 시사회 초대땐 시사회 장소가 너무 멀어서 퇴근하고 시사회에 참가하기에 조금 어정쩡한 시간이라 정중히 거절했는데, 이렇게 잊지 않고 또 다시 초대 메일을 보내주니 이번엔 거절하기가 좀 미안하더군요.

하지만 여전히 웅이가 눈에 밟혔습니다. 주말에 엄마, 아빠와 놀려고 일주일을 기다렸을텐데, 시사회에 가야한다고 웅이를 처갓집에 또 맡기려니 웅이와 장모님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뻔한 쭈니는 웅이를 처갓집에 맡기고 구피와 함께 시사회 장소인 대학로로 향했습니다. 

 

사실 제가 주말에는 웅이와 시간을 보낸다는 철칙을 깨고 [광해 : 왕의 된 남자]의 시사회에 참가한 이유는 비단 영화 홍보사의 정성어린 구애(?)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지난 시사회 당시 참가했던 분들의 리뷰를 읽어봤는데 근래 보기 드물게 호평 일색이더군요. 물론 그 중에는 소위 말하는 알바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제가 믿고 읽는 몇몇 영화 리뷰어마저 이 영화에 호평을 하시니 저 역시 호기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포털 사이트의 영화 게시판을 보면 [광해 : 왕이 된 남자]에 대한 비난 일색이라는 점입니다. [광해 : 왕이 된 남자]의 개봉일을 일주일 앞당긴 탓에 작은 영화들이 거대 영화의 횡포라고 성토하는 가운데 최근 스캔들과 강병규의 독설로 인해 조성된 이병헌 안티팬들이 가세하여 영화에 비난을 퍼붓고 있는 실정입니다.

[광해 : 왕이 된 남자]의 이러한 상황은 지난 12월에 개봉한 [마이웨이]를 연상하게 했습니다. 당시 [마이웨이]는 일본 예고편에서의 일본해 논란에서부터 오다기리 조의 가짜 사인 논란까지 일면서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도로 영화의 안티팬을 양성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한국영화사상 최고의 제작비가 들어간 이 영화는 아쉬운 흥행을 기록하며 흥행 실패작의 굴레를 덮어써야 했습니다.

결국 저는 [광해 : 왕이 된 남자]가 처한 이 모든 논란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시사회에서의 호평과 큰 영화사의 횡포 논란, 이병헌 안티팬의 비난이라는 상반된 상황들이 공존하는 이 영화. 제가 이 영화의 개봉을 기다리지 못하고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그 먼 곳까지 찾은 이유입니다.

 

 

영화 자체만 놓고본다면 기립박수가 마땅하다.

 

토요일 오후, 많이 섭섭해하는 웅이를 처갓집에 맡기고 구피와 함께 뒤늦게 시사회 장소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일찌감치 시사회 장소로 가서 좋은 자리를 맡고 싶었지만 웅이와 조금이라도 더 놀아줘야 한다는 생각에 최대한 시간을 늦춘 결과 시사회 시작 시간인 6시가 거의 되어서야 시사회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자리는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700석이 단 한 자리의 여유도 없이 꽉 찬 상황이기에 뒤늦게 도착한 저와 구피는 앞쪽 맨 구석 자리에 앉아야 했습니다. 영화가 온전히 보일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제가 늦은 것이니 그 누구를 탓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영화는 시작되었고, 구석 자리라 영화가 잘 안보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깡그리 잊은채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자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있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박수를 치시더군요. 물론 영화가 끝나고 이병헌의 토크 콘서트가 예정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시사회에 참석하신 분들 중에는 이병헌 팬들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이병헌 팬이 아닌 저 마저도 박수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광해 : 왕이 된 남자]는 재미있었으며, 감동적이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사극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꼼꼼히 영화를 분석해봐도 분명 이 영화는 영화적 재미와 완성도 면에서 좋은 점수를 줘야할 것 같습니다.

 

[광해 : 왕이 된 남자]는 제목 그대로 조선의 15대 왕인 광해군에 대한 픽션입니다. 그는 폭군으로 알려져 있으며,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비운의 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근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가 명나라와 금나라 사이에서 펼친 실리주의적 외교 정책이 높은 점수를 받은 것입니다.

[광해 : 왕이 된 남자]는 바로 이러한 광해군의 이중적 기록에 주목합니다. 역사는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가 뼈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백성을 먼저 살피며 명나라와 금나라 사이에서 탁월한 외교 정책을 펼친 그의 업적은 폭군이 아닌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희생당한 성군으로 봐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광해 : 왕이 된 남자]는 그러한 광해군의 이중적 평가를 광해군과 하선(이병헌 1인 2역)이라는 두 캐릭터를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해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표현 방식입니다. 이 영화는 코믹적 요소와 감동적 요소를 적절히 배분하는데 이 상반된 요소를 적절하게 배분하는 추창민 감독의 능력이 매우 탁월하다는 점입니다.

영화를 보며 참 많이 웃었습니다. 가짜 왕인 하선이 궁에 들어와 펼치는 에피소드들은 소소한 웃음을 넘어 박장대소를 안겨줍니다. 그러면서 영화는 비극적인 결말을 준비해둡니다. 어차피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영화인 만큼 웃음 뒤의 비극적 요소들은 영화 전체에서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추창민 감독은 하나도 어색하지 않게 이 두 요소들을 표현해낸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웃기다가 결말에 가서 감동을 주려고 시도하는 영화에 거부감이 있는 편인데, [광해 : 왕이 된 남자]에서는 그러한 거부감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영화 내내 유쾌하게 웃었다가 영화가 끝마고 감동이 여운이 남아 한동안 먹먹한 기분에 사로 잡혀있어야 했습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와 [광해 : 왕이 된 남자]의 차이.

 

1881년 출간된 미국 작가 마크 트레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를 모티브로 한 [광해 : 왕이 된 남자]는 바로 이전에 개봉한 [나는 왕이로소이다]와 비슷한 소재 탓에 많이 비교가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조선의 4대 왕인 세종(주지훈)이 책만 읽는 범생이에 자기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성격에서 조선 제일의 성군이 되는 과정을 그린 코미디 영화입니다. 이 영화 역시 '왕자와 거지'를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형인 양녕대군이 무서워 궁을 탈출한 충녕대군과 충녕대군을 대신하여 세자 노릇을 하는 천민 출신의 덕칠를 통해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로 인하여 가짜 왕이 궁에서 펼치는 웃기는 에피소드들이 서로 비슷합니다. 많은 궁녀들이 보는 앞에서 큰 일을 봐야 하는 왕의 고충과 천민 입장에서는 산해진미인 궁의 음식들로 인한 에피소드 등 [광해 : 왕이 된 남자]와 [나는 왕이로소이다]가 추구하는 코믹 코드는 서로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두 영화에 대한 제 웃음의 강도는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보면서는 단발적인 웃음, 혹은 어이없는 헛웃음이 대부분이었지만 [광해 : 왕이 된 남자]를 보면서는 진심으로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영화를 보며 이렇게 시원하게 웃은 것은 진정 오랜만인 듯합니다.    

비슷한 에피소드를 지녔으면서 두 영화에 대한 웃음의 차이가 크게 나는 이유는 일단 추창민 감독의 연출력 덕분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마파도]라는 코미디 영화로 내공을 다진 추창민 감독은 어느 부분에서 코믹적인 요소가 끼어 들어야 관객들이 박장대소를 할지 잘 알고 있더군요. 그의 능수능란한 솜씨 덕분에 정말 실컷 웃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공을 추창민 감독에게만 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광해 : 왕이 된 남자]의 코믹 코드는 배우들의 힘도 컸습니다.

특히 이병헌의 힘을 뺀 연기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는 이 영화에서 1인 2역을 맡았습니다. 암살의 위험에 노출된 신경쇠약 직전의 폭군 광해군과,  익살스러운 광대 하선이라는 이 상반된 캐릭터의 충돌은 대단한 시너지 효과를 가져옵니다.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추창민 감독의 절교한 캐스팅이 돋보입니다. 사실 이병헌은 코믹 연기와 거리가 먼 배우입니다. 그의 이미지를 굳이 따진다면 하선보다는 광해군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병헌에게 하선이라는 캐릭터의 옷을 입히고 그에게 어리숙한 코미디 연기를 하게 만드니 이게 또 대단한 코믹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신분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충녕대군과 덕칠을 똑같이 웃기는 캐릭터로 묘사했던 [나는 왕이로소이다]와는 달리 [광해 : 왕이 된 남자]는 광해군과 하선에게 상반된 캐릭터 성격을 부여한 후 근엄해보이는 광해군이 하선이라는 이름으로 망가지는 쾌감을 안겨준 것입니다.

여기엔 조연 캐릭터도 역할도 컸습니다. 시종일관 박영규, 임원희, 김수로의 과장된 연기를 통한 슬랩스틱 코미디를 추구하는 [나는 왕이로소이다]와는 달리 [광해 : 왕이 된 남자]는 류승룡과 김인권, 장광이라는 배우의 힘을 통한 자연스러운 웃음을 추구합니다.

류승룡의 경우는 최근 [내 아내의 모든 것]을 통해 코믹 이미지를 얻은 덕분에 허균이라는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근엄과 코믹이 오고가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었습니다. 조내관을 연기한 장광의 경우도 비슷한데, 장광이 가지고 있는 묵직한 이미지에 내시라는 이미지를 얹어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의외의 웃음을 안겨줍니다. 

그에 반에 코미디 배우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김인권의 경우는 경박해진 왕을 모셔야 하는 호위무사 도부장이라는 캐릭터를 자신만의 코믹한 이미지에 부합시켜 자연스러운 웃음을 유발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개인적으로 느낀 [나는 왕이로소이다]와 [광해 : 왕이 된 남자]의 웃음의 차이입니다. 

 

 

이것이 바로 패자의 역사이다.

 

[광해 : 왕이 된 남자]의 진정한 재미는 바로 후반부의 감동 코드입니다. 사실 중반부까지 하선과 허균, 도부장을 통한 코믹 코드가 제게 너무 많은 박장대소를 안겨줬기에 비극으로 치닫을 것이 분명한 영화의 후반부가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광해 : 왕이 된 남자]는 하선이 궁에 들어와 어리버리한 실수를 하며 벌이는 웃기는 에피소드들 사이에 비극이 될 수 밖에 없는 요소들을 꾸준히 삽입해 놓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중전(한효주)입니다.

사실 이 영화의 중전은 한효주라는 이름값에 비해 그 비중이 적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전은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궁의 여인이 가져야할 비극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그녀는 하선의 마음을 움직이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중전의 얼굴에 그리워진 비극의 그림자를 본 하선은 점점 정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꼭두각시 가짜 왕이 아닌 진짜 왕으로 성장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짜 왕에 불과한 하선과 폐비 위기에 처한 중전의 사랑이 해피엔딩일 수는 없습니다. 잘 웃지 않는 중전의 얼굴에 그리워진 비극의 씨앗은 영화 후반부를 강타합니다. 중전을 위해 중전의 오라비를 살린 하선. 그리고 그러한 하선의 움직임에 반격을 가하는 이조판서 박충수(김명곤). [광해 : 왕이 된 남자]의 거대한 비극의 소용돌이는 그렇게 휘말아치는 것입니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운운하며 자신의 기득권을 챙기려는 부패한 관리들 사이에서 하선의 외침은 큰 쾌감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하선의 외침으로 대변되는 광해군의 개혁은 실패할 것임을... 그것이 역사이고, 그러한 비극적 역사를 알기에 [광해 : 왕의 된 남자]를 보며 느낄 비극의 기운은 영화를 보는 내내 저를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광해 : 왕이 된 남자]는 '왕자와 거지'라는 소설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광해군이 역사의 패자이기 때문에 그의 업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힘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역사의 기록에 그는 폭군으로 이미 낙인찍혀 있습니다. 그것이 반정을 일으킨 인조라는 승자에 의한 조작된 기록이라 할지라도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탓에 광해군은 폭군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한 폭군을 성군으로 기록하기 위해 [광해 : 왕이 된 남자]가 취한 것은 하선이라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어찌보면 하선이 취한 성군의 면모 역시 광해군의 업적이 분명한데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이 둘을 광해군과 하선으로 구분짓습니다.

이것은 패자의 역사입니다. 자신의 업적조차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비애.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스크린 가득 채워진 광해군의 업적에 대한 자막은 패자인 광해군의 억울함을 달래주는 최후의 보루이며, 영화의 감동을 잇게 하는 완벽한 장치였습니다.   

고지식한 성격의 도부장은 하선을 쫓는 관군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에겐 가짜일지 모르지만 내겐 진짜다.' 영화에선 광해군의 업적을 하선에게 안겨주지만 우린 압니다. 하선 역시 광해군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그리고 영화 외적인 이유로 [광해 : 왕이 된 남자]를 비하하는 분들에게도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들에겐 나쁜 영화일지 모르지만 내겐 이 영화의 재미, 감동은 진짜다.'라고 말입니다.

 

 

패자의 기록만큼 쓸쓸한 것은 없다.

그래서 [광해 : 왕이 된 남자]는 더욱 애처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