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박정우
주연 : 김명민, 문정희, 김동완, 이하늬
개봉 : 2012년 7월 5일
관람 : 2012년 7월 5일
등급 : 15세 관람가
빗 속을 뚫고...
어제부터 하루종일 하늘에서 구멍이 뚫린 듯 시원하게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한동안 최악의 가뭄이라는 뉴스로 인하여 걱정이 많았는데, 이번 장맛비가 어느정도 이번 가뭄을 해갈해줄 것이라 기대가 됩니다.
이번 장맛비는 최악의 가뭄해갈 단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비 피해 소식이 들리네요. 모든 적당히 해야 좋은데...) 하지만 비가 오면 이상하게 제 마음은 무겁고 축 쳐집니다. 아마도 프로야구를 즐길 수가 없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요즘 제가 응원하는 두산 베어스가 KIA 타이거즈와의 광주 경기에서 구설수에 오른 것 역시 제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듭니다. 선배에게 욕설을 한 김현수 선수도 분명 잘못했지만 박빙의 경기 도중 (9회말 2사 1, 2루. 안타 한방이면 동점, 큰거 한방이면 역전) 상대 선수에게 먼저 욕설을 내뱉은 나지완 선수도 잘 한것이 없거늘... 왜 모든 비난의 화살이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지 제 입장에서는 알수가 없습니다. 서로 잘못했으니 너무 흥분된 감정 속에서 저지른 실수라며 서로 사과하면 될 것을...
게다가 네티즌들의 소설로 인한 두산 마무리 프록터의 인종 차별 발언이 해명에도 불구하고 마치 진짜 그가 그런 발언을 한 것처럼 파문이 커져만 가는 상황도 이해가 안됩니다.
만약 이대호나, 추신수가 일본과 미국에서 그런 일을 당했다면 울분을 터트렸을 네티즌들은 프록터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말도 안되는 억지 소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방송사에서 제멋대로 편집한 하이라이트가 아닌 직접 그 경기 중계 방송을 봤습니다. 프록터는 분명 나지완이 타석에 들어오기 이전에 3루측 두산 벤치를 향해 말을 한 것입니다. 물론 저는 입모양만 보고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내는 초능력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초능력을 가진 분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이러한 이유로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목요일, 제 마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이번 사건의 뉴스 기사에 달린 소름끼치는 악플들과 거짓을 사실처럼 글을 싸질러댄 일부 블로거의 글을 보고 있으면 정말 사람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연가시]를 봤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나니 더욱더 사람이라는 존재가 무서워졌습니다.
재혁은 좋은 아빠가 아니다.
이 영화는 놀이 공원에서 시작합니다. 신나게 놀이기구를 타는 중년 여성과 아이들. 그 옆에는 잔뜩 짐을 들고 시중을 드는 재혁(김명민)이 있습니다. 처음엔 가족들과 함께 놀이 공원에 놀러온 것인가? 라는 생각을 했는데 재혁의 표정이 심상치 않고, 재혁을 대하는 가족들의 태도 역시 이상합니다.
맞습니다. 그들은 재혁의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제약 회사에 다니는 재혁은 약을 팔기 위해 병원 원장 대신 그의 가족들의 시중을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재혁 입장에서는 굉장히 짜증나고, 힘든 상황인 셈입니다.
집에 돌아온 재혁은 동생 재필(김동완)에게 막말을 하고, 아내 경순(문정희)과 아직 어린 아들과 딸에게 짜증을 냅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이 모든 상황에 대해서 죽지 못해 억지로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영화의 초반 재혁의 모습은 결코 좋은 아빠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연가시]를 보기 전에 분명 가족을 살리기 위한 한 가장의 사투를 그린 영화라는 정보를 읽었는데, 막상 영화의 초반에는 가족들에게 짜증과 무시로 일관하는 나쁜 아빠의 모습만이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연가시]는 꽤 영리한 영화였습니다. 처음부터 재혁의 캐릭터를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을 듬뿍 담은 인물로 그리지 않은 것은 영화의 중반에 굉장한 플러스 요건이 됩니다.
자신의 힘든 상황에 대해서 짜증을 내고 가족들을 무시했던 재혁. 그러한 그의 모습은 경순과 비교가 됩니다. '연가시'에 감염이 되었지만 재혁과 아이들을 먼저 걱정하고 보살피는 경순의 모습은 재혁을 더욱 필사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분명 자신도 힘들었을텐데... 죽음의 문턱에서 짜증이 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을텐데... 하지만 그녀는 견뎌냅니다. 정부에 의해 격리 수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혁이 밥은 챙겨 먹는지 걱정합니다. '연가시' 감염에 대한 특효약이 발표되고 번번히 그 약을 손에 넣을 뻔하다가 놓치는 재혁. 하지만 경순은 그런 재혁을 오히려 격려합니다. '당신은 잘못한거 없어. 최선을 다했잖아.'
이 영화의 모든 초점은 가족을 살리기 위한 재혁에게 맞춰져 있지만 영화를 보는 제 눈시울을 적시게 만들었던 것은 엄마로서, 아내로서, 경순의 그런 헌신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경순의 헌신은 [연가시]의 감동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재난 공포... 아주 제대로이다.
사실 [연가시]를 보러 가기 전에 약간의 걱정을 했습니다. 이 영화는 재난 영화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재난 영화의 흥행 포인트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정말 저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라는 공포를 느껴야 합니다. 하지만 과연 '연가시' 따위가 관객에게 공포심을 안겨줄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러한 제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연가시]는 아주 제대로 영화를 보는 제게 공포를 안겨줬습니다.
영화의 초반에는 '연가시'로 인하여 죽은 사람들의 흉칙한 모습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시각적인 공포인 셈인데, 사실 그러한 시각적 공포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무서운 장면이라도 자꾸 보면 내성이라는 것이 생기니까요.
그러한 상황에서 [연가시]는 중반부터는 시각적인 공포 대신 '연가시'에 감연된 사람들의 행동을 통한 새로운 공포를 제시합니다. '연가시'에게 뇌를 조종당한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물가로 가서 죽는 장면은 끔찍하고 무섭습니다.
영화는 중반까지 단체로 물가를 찾아 물에 빠져 죽는 사람들의 모습이 반복되어 보여줍니다. 좀비 영화를 보는 것만 같은 착각이들 정도로 뇌를 조종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끔찍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영화가 후반부로 치닫으면서 또다시 새로운 공포가 전개됩니다. 수용소에 격리된 사람들의 변화, 특히 경순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가시'에게 조종당하는 모습은 영화를 보는 제게 안타까움과 공포를 동시에 안겨줍니다.
경순의 변화는 재혁을 더욱 필사적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제게도 '제발, 빨리'라고 속으로 소리를 치게 만듭니다. '연가시'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보다, '연가시'에 감염된 사람들이 훨씬 힘들 것이라는 연주(이하늬)의 말처럼, 약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인 재혁보다는 '연가시'에 감염되었음에도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경순이 훨씬 힘들었을 것입니다.
좋은 아빠 재혁보다, 좋은 아내 경순을 그린 이 영화의 선택이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좋은 엄마, 착한 아내인 경순이 이대로 희생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저는 재혁을 향해 소리칩니다. '이 바보같은 녀석아. 빨리 약을 구하란 말이야.' 그 순간만큼은 경순이 희생될까봐 저는 두려웠습니다.
연가시가 무섭다고? 아니, 난 사람이 더 무섭다. (스포 포함)
그런데 박정우 감독은 '연가시'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진짜 무서운 존재를 꺼내 놓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그들의 모습은 제 소름을 쫘악 끼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연가시'는 곤충의 몸에 기생하는 기생충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사람에게도 감염이 되는 변종 '연가시'가 있다고 설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영화속 상황에서도 물가만 피하면 '연가시'에 감염될 염려가 없고, 사람과 사람간에 감염될 염려도 없습니다.(웹툰에서는 사람과 사람간에 감염이 될 수 있다고 설정된 듯 하지만...)
사실 '연가시'보다 더 무서운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얼마나든지 사람과 사람간에 감염이 될 수 있는 바이러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리우드의 감염 재난 영화는 거의 대부분 바이러스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바이러스와 비교한다면 '연가시'는 그다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박정우 감독은 이 영화에 살을 덧붙입니다. 바로 변종 바이러스를 만들어낸 사람들입니다. 단지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죽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연가시'의 그 끔찍한 모습보다 훨씬 더 무서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변종 인간들입니다. 변종 '연가시'가 사람들에 의해서 곤충이 아닌 사람을 숙주로 삼을 수 있게끔 만들어졌다면, 그들 변종 인간들은 돈이 최고인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변종인 셈입니다.
돈을 차지하기 위한 그들의 욕심은 죄책감도 없을 것입니다. 단지 자신의 욕심을 채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만 있겠죠. 그런데 그러한 일이 비단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아니 꼭 돈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자신의 입이, 자신의 글이 남에게 치명적인 비수가 될 수 있음을...
영화를 보고 나오니 밖은 여전히 시원하게 비가 내립니다. [연가시]를 보고나서 물이 무섭게 느껴진다는 분들을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물보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이 더 무서웠습니다.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저를 헤칠 수도 있으니까요. (가끔 저는 지하 주차장에서, 혹은 으쓱한 골목길에서 저를 습격하는 사람들을 상상합니다.) 하늘에서 시원하게 내리는 저 비가 사람들 마음 깊숙히 자리잡은 욕심과 분노를 시원하게 씻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변종 '연가시'에 의한 감염은 1차 감염 사태만 진정시킨다면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변종 인간들의 욕심은 인간 사회가 계속되는 동안 영영 계속될 것이다.
정녕 변종 '연가시'보다 더 무서운 것은 변종 인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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