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대승
주연 : 조여정, 이동욱, 김민준, 박지영
개봉 : 2012년 6월 6일
관람 : 2012년 6월 12일
등급 : 18세 이상 관람가
나홀로 영화관람족의 비애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저는 극장에서 보는 영화 중 절반 이상을 혼자서 봅니다. 결혼 초반에는 구피가 항상 함께 해줬었지만 영화 관람에 대한 제 왕성한 욕심에 결국 '너무 힘들다'며 영화 보기를 거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제겐 기대작이지만 구피 취향의 영화가 아니라면 혼자 극장으로 향해야만 합니다.
처음엔 혼자 극장에 가는 것이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제가 모태솔로라는 신분으로 지냈던 20대에 극장보다 비디오로 영화를 더 자주 관람했던 것은 혼자 극장에 가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혼자 우두커니 영화 상영을 기다리는 것 만큼 끔찍한 것은 없었거든요.
게다가 20여년 전에 당한 [죽은 시인의 사회] 사건도 혼자 영화보기에 대한 제 공포를 더욱 키웠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 사건이란... 고등학생 시절 종로의 피카소 극장(피카디리 극장 옆)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를 혼자 보러 갔다가 당한 굴욕 사건입니다. 극장 매표직원의 실수로 제가 앉은 좌석 번호가 중복으로 발행되었습니다. 그로인해 저는 영화를 한참 관람하다가 영화 중반에 입장한 커플에게 제 자리를 빼앗겨야 했습니다. 당시 극장 직원은 제게 '당신은 혼자고, 이분들은 둘이니 자리를 양보하세요.'라고 하더군요. 결국 저는 극장 맨 뒤에 간이 의자를 놓고 [죽은 시인의 사회]를 마저 봐야 했습니다. 단지 혼자 왔다는 이유만으로...
그 이후로 저는 혼자서는 절대 극장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극장을 갈 수 없다면 언제나 집에서 비디오로 영화를 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구피와 처음 만나 데이트를 하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보고 싶은 영화를 극장에서 맘껏 볼 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데이트 장소는 항상 극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구피가 더 이상 저를 쫓아 극장에 다니기 힘들다며 제게 이젠 혼자서 영화를 보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정말 구피가 미웠고 혼자 극장에 가야하는 상황이 막막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편한 반바지 차림에 혼자서 극장에 잘 갑니다. 익숙해진 것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야하다고 소문난 영화를 혼자 극장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괜히 다른 사람들이 저를 변태라며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기대작임에도 불구하고 야한 영화라서 놓친 영화들이 한 두편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후궁 : 제왕의 첩]을 기대했으면서 이제서야 이 영화를 본 이유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개봉 전부터 조여정의 파격적인 노출로 화제가 되었던 이 영화, 하지만 구피는 '이 영화는 혼자서 봐.'라고 선언해 버렸습니다. 결국 저는 극장에 사람들이 가장 없는 요일을 기다리고 나서야 [후궁 : 제왕의 첩]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가 야해? 왜?
[후궁 : 제왕의 첩]은 개봉 전부터 노출 마케팅을 벌여 왔습니다. 이미 [방자전]을 통해 파격적인 노출 연기를 선보였던 조여정이 [방자전] 이후 선택한 영화이기 때문이도 했지만, [쌍화점], [방자전] 등 에로틱 사극 영화들이 흥행에서 좋은 성적을 낸 것을 의식한 영화사의 노림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가 개봉하고 나서 저는 [후궁 : 제왕의 첩]을 걱정했습니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눈이 혹시 '조여정이 얼마나 벗었나? [방자전]보다 야한가?'에 쏠려 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다행히도 이 영화는 조여정의 노출 보다는 궁이라는 공간에서의 광기어린 야망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그만큼 영화 자체가 잘 만들어졌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화요일 밤에 [후궁 : 제왕의 첩]을 봤습니다. 이 영화가 박스오피스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인지 목동 메가박스에서 가장 큰 상영관인 M관에서 상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화요일 밤이라서 관객은 거의 없더군요. 제가 원하는 방식의 관람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본 후 느낀 것은 '이 영화가 야해? 왜?'입니다. 만약 제가 야한 영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후궁 : 제왕의 첩]을 봤다면 저는 분명 실망했을 것입니다.
단순한 제 느낌 뿐일지도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 [후궁 : 제왕의 첩]은 [방자전]보다 야하지 않았고, 동성애 코드를 은근히 내세웠던 [쌍화점]과 비교해서도 별로 파격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는 영화 속에 등장한 섹스씬이 '야하다'는 느낌보다는 '슬프다'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김대승 감독은 궁이라는 거대한 무대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또는 주체할 수 없는 광기의 욕망 때문에 벌이는 섹스를 연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섹스는 쾌락을 위한 야한 섹스가 아니었습니다. 살기 위한, 또는 가질 수 없는 것을 죽도록 원하는 슬픈 섹스였습니다.
[방자전]의 섹스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춘향전'을 비틈으로서 이루어낸 조연의 역습과도 같은 쾌감의 섹스였고, [쌍화점]의 섹스 또한 홍림(조인성)과 왕후(송지효)의 심정 변화에 의한 애틋한 섹스였습니다. 하지만 [후궁 : 제왕의 첩]은 그러한 쾌감, 애틋함이 없습니다. 오로지 광기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섹스가 아닌 슬픈 몸부림이다.
[후궁 : 제왕의 첩]은 초반부터 스피드하게 진행됩니다. 왕의 이복동생인 성원대군(김동욱)은 신참판(안석환) 집의 여식인 화연(조여정)에게 한눈에 사랑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미 화연은 권유(김민준)와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이 영화는 가장 중요한 성원대군과 화연, 그리고 권유의 엇갈린 사랑을 표현하는데 긴 시간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저 화연을 바라보는 성원대군의 눈빛과 권유를 어루만지는 화연의 손길 만으로 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넘어갑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권유와 화연의 섹스는 슬펐습니다. 궁에 들어갈 운명을 비관하며 도망친 권유와 화연.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섹스를 나눕니다. 이러한 화연과 권유의 섹스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섹스씬입니다. 그래서 비록 장소는 산 속의 누추한 오두막이지만 화려한 궁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섹스씬보다 부드럽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더욱 슬펐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섹스는 바로 처참한 비극을 알리는 신호탄이기 때문입니다.
초반의 감정적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이후 [후궁 : 제왕의 첩]은 조용히 그 다음 폭풍을 준비합니다. 초반의 폭풍보다 더욱 거대한 폭풍을 말입니다.
너무나도 사랑했지만 이미 형수가 되어 버린 화연을 바라보는 성원대군의 모습은 이 영화가 앞으로 몰고올 폭풍의 전주곡입니다. 여기에 자신을 버리고 궁으로 도망친 화연에 대한 복수심을 간직한 권유가 내시가 되어 궁으로 들어옵니다. 엇갈린 사랑의 운명을 간직한 주인공들이 한데 모인 것입니다. 그리고 도화선에 대비(박지영)가 불을 붙임으로서 거대한 감정의 폭풍이 완성됩니다.
그러한 가운데 이 영화에는 섹스씬 몇 장면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왕이 되었지만 여전히 화연을 가질 수 없었던 성원대군이 화연의 몸종인 금옥(조은지)과 벌이는 섹스, 그리고 영화의 대미를 완성하는 성원대군과 화연의 섹스. 과연 이들 장면을 보며 '야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광기어린 성원대군과 순박한 금옥의 섹스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화연이 성원대군과 벌이는 섹스도, 그저 슬픈 몸부림일 뿐입니다.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결코 움켜쥘 수 없는 권력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이들의 슬픈 몸부림. 그건 섹스가 아닙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향한 슬픈 광기와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일 뿐입니다.
이은주, 하지원 이후에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여배우가 생겼다.
[후궁 : 제왕의 첩]은 보는 내내 '정말 대단하다.'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야하다, 잔인하다, 라는 단순한 수식어만으로 이 영화를 설명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김대승 감독은 권력에 의한 지옥도를 궁에 마련해 놓고, 그러한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한 화연의 처절하고 슬픈 몸부림을 그려냅니다. 그리고 그러한 처절하고 슬픈 몸부림 위에는 조여정이라는 배우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실 [방자전]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조여정이라는 배우는 제 관심 밖의 인물이었습니다. [방자전]을 보고 나서도 '이 배우 제법인데...'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 뿐입니다. [방자전]에서 돋보였던 것은 조여정이 아닌 '춘향전'을 비튼 발칙한 상상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확실히 [후궁 : 제왕의 첩]은 조여정의 영화이며, 그녀가 진정한 배우로 발돋음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 화연은 여배우로서 부담스러운 캐릭터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노출씬이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화연이 느꼈을 모든 복잡하고 처절한 감정을 몸짓 하나, 표정 하나에 모두 담아내야 하게 때문입니다.
저는 이은주라는 배우를 좋아합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배우들이 맡기 부담스러워하는 캐릭터를 척척 해냈습니다. 그녀의 유작이 되어 버린 [주홍글씨]가 그러한 예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한동안 제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하지원이라는 배우도 좋아합니다. 여배우로는 드문 강한 카리스마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끔 그녀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벗어 던지기 위한 안일한 선택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그녀의 연기가 좋지만, 가끔 그녀는 저를 실망시키곤 합니다.
이제 여기에 조여정이라는 배우의 이름도 추가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영화 초반 권유를 어루만질 때의 부드러운 모습, 아버지가 역모죄로 참형을 당했을 때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모습, 잠이 든 어린 아들을 보며 살아남겠다고 다짐하는 강인한 모습, 이 모든 복합적인 모습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성원대군과의 섹스씬에서 드러난 표정의 변화입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소름이 돋는 오싹함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의 얼굴에서 저렇게 일순간에 다양한 표정이 나올 수 있는지... 조여정의 발견만으로도 [후궁 : 제왕의 첩]은 제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명작입니다.
[후궁 : 제왕의 첩]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의 절반도 아직 하지 못했다.
그 만큼 이 영화의 감정의 폭풍은 나의 글솜씨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다.
글로 표현할 수 없으니 가슴 속 먹먹함으로 간직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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