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짧은영화평/2012년 아짧평

[비버] - 나에게 '비버'가 필요한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쭈니-1 2012. 4. 16. 08:50

 

 

감독 : 조디 포스터

주연 : 멜 깁슨, 조디 포스터, 안톤 옐친, 제니퍼 로렌스

 

 

웅이의 눈에 비친 내 모습

 

지난 토요일, 오랜만에 화창한 주말 날씨를 맞이하여 웅이와 학교 운동장에서 야구를 했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공을 던지는 것도, 받는 것도, 치는 것도 서투른 웅이. 그래도 저는 시합에 들어가면 웅이가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일부러 아슬아슬한 스코어로 져줍니다.

야구를 마치고 땀에 흠뻑 젖은 웅이는 집으로 향하는 길에 제게 묻습니다. "아빠는 언제부터 그렇게 야구를 잘했어요?" 그렇습니다. 웅이는 제가 야구를 엄청나게 잘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왜 야구 선수를 하지 않았냐고 물어볼 정도이니까요. 하지만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저는 야구를 잘하지 못합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주신 야구 글로브와 야구 배트 덕분에 동네 야구 시합에 자주 끼긴 했지만 저는 언제나 후보 선수였습니다. 겁이 많아 공을 두려워했고, 운동신경은 제로라서 공을 제대로 치지도 못했습니다. 제가 야구 시합에 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야구 글로브와 야구 배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에게만큼은 무엇이든지 잘하는 슈퍼맨이고 싶은 것이 이 세상 모든 아빠들의 마음이 아닐까요? 결국 저는 "어린 시절부터 열심히 노력했더니 지금처럼 야구를 잘하게 되었어."라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두렵습니다. 언젠가 웅이는 아빠가 야구를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테니까요.

 

그도 한때는 지구를 지키던 액션 스타였다.

 

일요일 저녁. [비버]를 봤습니다. 한때 액션 스타로 이름을 날리던 멜 깁슨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그러나 액션 영화는 아닙니다. 멜 깁슨이 연기한 월터 블랙이라는 남자는 우울증에 걸린 무기력한 중년입니다.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장난감 회사의 CEO이지만 회사는 나날이 기울어져만 가고 있었고, 그의 우울증에 지친 가족들은 그를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벼랑 끝에 몰린 그는 자살을 결심합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뜻밖의 목소리가 말을 겁니다. 바로 우연히 쓰레기통에서 가져온 비버 손인형이죠.

월터 블랙은 절묘하게 멜 깁슨과 닮은 캐릭터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멜 깁슨은 [매드 맥스]로 조지 밀러 감독과 함께 화려하게 할리우드에 입성한 액션스타입니다. 그는 할리우드 입성 후에도 [리쎌웨폰]이라는 걸작 버디 무비 시리즈를 남겼고, 감독으로 변신하여 [브레이브 하트]로 아카데미를 석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그는 알콜중독, 유대인 비하 발언, 음주 운전, 폭행, 이혼 등 불미스러운 사건을 겪으며 하향세를 겪고 있습니다. 한때 지구를 지키던 액션 스타였던 그는 이제 트러블 메이커로 전락하고 만 것이죠. 그런 그의 모습은 아내에겐 무기력한 남편, 아들에겐 부끄러운 아버지, 회사에선 무능한 사장인 월터 블랙과 절묘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

 

[비버]의 중반까지는 월터 블랙이 비버 인형을 통한 제 2의 자아로 자신에게 놓인 위기를 모면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감추고 대신 비버라는 제 2의 자아를 내세운 월터 블랙.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지만 치료 효과는 탁월했습니다. 비록 큰 아들인 포터(안톤 옐친)는 여전히 그를 경원시하지만 막둥이인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비버를 좋아합니다. 그러한 둘째 아들을 보고 고안한 비버 공구 세트는 불티나게 팔리며 회사도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비버를 통한 월터 블랙의 우울증 극복기일까요? 하지만 영화의 후반에 가면서 이야기는 갑자기 급변하기 시작합니다. 아내 메레디스(조디 포스터)는 제 2의 자아인 비버에게 본 모습을 빼앗기고 있는 남편이 못마땅하고, 큰 아들 포터 역시 아버지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창피하기만 합니다. 우울증만 극복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월터 블랙에게 또 다른 문제가 등장한 것이죠.

[비버]에는 흥미로운 대사가 나옵니다. 월터 블랙이 자살을 결심하던 날, TV 중국 영화에서 나오는 대사인데 '과거에 집착하면 현재를 잃어버리지만, 과거를 버리면 미래를 잃어버린다.'라는 내용의 대사입니다. 하지만 월터 블랙은 과거를 버리려 합니다. 과거의 사진을 가지고 예전으로 돌아가달라고 애원하는 메레디스에게 월터 블랙은 외칩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어.' 결국 월터 블랙의 제 2의 자아는 과거를 부정함으로서 새롭게 태어나려는 월터 블랙의 의지인 셈입니다.

 

과거를 부정한다면 현재는 존재할까?

 

과거의 부정. 하지만 그것은 월터 블랙의 우울증을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새롭게 태어난 월터 블랙은 분명 우울증에서 벗어난듯 보이지만 메레디스는 그런 남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과거가 없는 현재가 존재할까요? 아닙니다. 과거를 부정하고 현재를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려는 월터 블랙의 해결 방식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과거를 인정하고 현재의 자신의 모습에서 해결책을 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화의 메시지는 포터와 노아(제니퍼 로렌스)의 이야기에서도 드러납니다. 오빠의 죽음으로 상처를 입은 노아. 그녀는 학교 제일의 퀸카이고 우등생이지만 그녀의 내면은 오빠의 죽음을 애써 부정함으로서 닫혀져 있습니다. 그런 노아에게 포터는 과거를 부정하지 말라고 조언을 합니다.

결국 월터 블랙은 과거를 직시합니다. 그리고 제 2의 자아인 비버를 떼어냅니다. 그 결과 회사에서 물러나고, 정신병원에 갇힌 신세이지만, 모든 것을 내려 놓은 그의 모습은 오히려 편안해보입니다. 그는 앞으로 과거를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자신의 우울증을 가족과 함께 극복해 나갈 것입니다.

 

잘만든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비버]는 개인적으로 잘 만든 영화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월터 블랙이라는 캐릭터 설명도 짧았고, 그가 비버를 통해 제 2의 자아를 받아들이는 과정 역시 공감되게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1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이 문제인데, 러닝타임을 30분 정도 늘려서 월터 블랙의 캐릭터를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그가 제 2의 자아인 비버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관객인 제게 공감을 시켰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뭐가 그리도 급했는지 조디 포스터 감독은 서두르기만 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버]는 영화를 본 후 생각할 꺼리가 많은 영화였습니다. 냉혹한 경쟁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정도의 우울증을 안은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우울증으로 인해 가족을 죽이고,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제 뉴스에서 흔한 사건 사고일 뿐입니다.

어쩌면 저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특히 '아빠, 최고'를 외치던 웅이가 성장하고 아빠가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쩌면 저는 상당한 상실감과 무기력증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보며 나에게 비버가 필요한 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내 모습에 당당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