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마커스 니스펠
주연 : 제이슨 모모아, 레이첼 니콜스, 스티븐 랭, 론 펄먼
2011년 최고의 망작이 내 호기심을 불살랐다.
고백하건데 1982년도에 만들어졌다는 존 밀리어스 감독의 [코난 : 바바리안]을 저는 보질 못했습니다. 1982년이라면 저는 아직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이전이었고, 영화에 푹 빠진 이후에도 한동안 잔인한 액션 영화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터라 당시 맹활약했던 아놀드 슈왈제네거, 실베스타 스탤론의 초창기 영화들은(예를 들어 [람보], [코만도], 그리고 [코난 : 바바리안] 같은 영화들) 아직도 제게 미관람 목록 영화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코난 : 바바리안]의 리메이크인 [코난 : 암흑의 시대]의 북미 개봉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시큰둥했습니다. 원작에 대한 추억이 없으니 리메이크에 대한 기대감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코난 : 암흑의 시대]는 북미 개봉에서 흥행 참패를 기록하며 2011년 최고의 망작 리스트에 올랐습니다. 이쯤되면 [코난 : 암흑의 시대]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꺼져버려야 맞을텐데... 저는 '그래? 도대체 얼마나 엉망이길래?'라는 심보로 오히려 없었던 관심마저 되살아났습니다.
만만치않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코난 : 암흑의 시대]는 원래 관람 리스트에 없었습니다. 뒤늦게 국내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치고 재미있었던 경우가 드물거든요. 하지만 막상 영화가 시작하자 '우와! 어쩌면 굉장한 세계관을 지닌 새로운 판타지 영화의 등장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런 생각을 했던 이유는 영화 오프닝씬에 등장한 [코난 : 암흑의 시대]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 덕분이었습니다.
[코난 : 암흑의 시대]의 시대적 배경은 초고도 문명인 아틀란티스 대륙이 바다 속에 가라앉고 이후 인류의 역사 시대가 시작되기 이전의 세계인 하이보리아 연대기의 시대입니다. 이 세계에는 인류 외에도 지성과 마력을 지닌 무시무시한 생명체들이 존재했었고, 다양한 형상의 괴물들이 득실거린다고 합니다. 마치 [반지의 제왕]의 오프닝을 연상하게 하는 [코난 : 암흑의 시대]의 기본적인 세계관 설명이 끝날 때쯤 저는 자세를 고쳐 잡고 판타지의 새로운 세계에 빠질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멋진 세계관을 하드고어 액션물로 변형시키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코난 : 암흑의 시대]의 멋진 세계관은 오프닝에서의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마치 먼지와 같이 사라집니다. 이후부터는 야만인스러운 코난(제이슨 모모아)의 아버지에 대한 단순 복수극으로 영화를 이끌어 나갑니다.
마커스 니스펠 감독은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 [13일의 금요일] 등 전설적인 하드고어 공포 영화의 리메이크 영화를 완성했던 감독답게 [코난 : 암흑의 시대] 역시 그런 분위기로 만들었습니다. 머리가 잘려 나가는 것은 예사요, 어떻게하면 좀 더 잔인한 방법으로 극중 캐릭터들을 죽일 것인지 연구라도 한 것처럼 이 영화의 액션은 야만스러운 잔인함이 가득 넘쳐 납니다.
뭐 좋습니다. 원작 자체가 그러하고, 시대적 배경 자체가 잔인한 암흑의 시대라고 하니 그런 잔인한 액션에 눈쌀을 찌푸릴 정도로 제가 꽉 막힌 관객은 아닙니다. 문제는 잔인한 액션 외에 이 영화는 그 이상의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아버지의 복수? 사랑하는 여인의 구출?
주인공인 코난 자체가 단순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카라짐(스티브 랭)에 대한 복수심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하지만 마커스 니스펠 감독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나봅니다. 이런 류의 액션 영화에 꼭 필요한 캐릭터인 타마라(레이첼 니콜스)를 등장시켜 놓고 뜬금없이 타마라와 코난의 사랑을 진행시킵니다.
이건 뭐 너무 뻔해서 웃음이 날 지경입니다. 타마라는 예정대로 카라짐에게 납치되고, 코난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타마라를 구하기 위해 나섭니다. 아버지의 복수와 사랑하는 여인의 구출이라는 이중의 동기가 부여되었으니 코난의 전투력이 몇 배로 상승한 것은 당연한 일이죠.
여기에 카라짐을 비롯한 악당 캐릭터의 부실도 제게 헛웃음을 안겨줍니다. 마지막 순간 카라짐은 왜그리 말이 많은지, 그리고 왜그리 뜸을 들이는지, 이건 '날 좀 죽여주세요.'라고 코난에게 일부러 기회를 주는 격인데... 이런 식의 설정은 오히려 영화의 긴장감을 꺾어버리는 요소가 됩니다. 진정 마커스 니스펠 감독은 그러한 사실을 몰랐을까요?
망작이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이 영화는 B급 저예산 영화로 제작되었어야 마땅했습니다. 영화의 스토리 구조가 그러하고, 영화를 이끌어갈 주연 배우들의 매력이 그러하며, 영화가 지니고 있는 특수효과 수준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제작비가 무려 9천만 달러가 들어간 블록버스터급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많은 제작비를 도대체 어디에 썼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코난 : 암흑의 시대]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실책을 범한 셈입니다.
물론 9천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간 만큼 괜찮은 장면도 몇몇 있습니다. 특히 카라짐의 딸인 마리큐(로즈 맥고완)가 소환한 모래 용병들과 코난의 결투씬은 꽤 박진감이 넘치더군요. 코난이 타마라를 구하기 위해 들어간 카라짐의 소굴에서 만난 물 속 괴물 장면도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이 영화의 세계관과 부합되는 몇 안되는 장면이라 흥미로웠습니다.
그 외의 모든 요소들은 그저 비디오용 영화를 한편 본 느낌입니다. 이 영화의 원작가라고 할 수 있는 로버트 하워드가 이룩해 놓은 하이보리아라는 근사한 세계관을 잇지 못했고, 캐릭터들은 평면적이었으며, 스토리 전개는 부실하기만 했습니다. 결국 '도대체 얼마나 엉망이길래?'라는 호기심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한 저는 '이래서 2011년 최고의 망작이 되었구나.'라는 답만 얻은채 영화 관람을 마쳤습니다.
P.S. 1. [코난 : 암흑의 시대]에서 압도적인 비주얼을 자랑하는 악녀 마리큐 역의 로즈 맥도완은 [코난 : 바바리안]의 외전격인 1985년작 [레드 소냐]의 리메이크에 주연을 맡았다고 합니다. 과연 이 영화는 [코난 : 암흑의 시대]와는 다른 흥행을 선보일지 궁금하네요.
P.S. 2. 원래 [코난 : 암흑의 시대]는 [러시아워] 시리즈의 브렛 레트너가 메가폰을 잡기로 되었지만, 결국 그가 손을 떼고 마커스 니스펠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하네요. 만약 브렛 래트너가 예정대로 메가폰을 잡았다면 좀 덜 고어적인 '코난'이 탄생했을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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