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다치바나 마사키
더빙 : 하나자와 카나, 시와시로 미유키, 후지무라 아유미
러닝 타임이 짧았기 때문에 선택했다.
올해로 저는 딱 마흔에 접어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2012년 들어서자마자 감기에 걸렸다가 겨우 회복했다가 다시 걸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4월임에도 불구하고 날씨는 여전히 춥고, 회사 일은 갑자기 많아지고, 즐겁기만 했던 블로그 생활에도 지난 2월부터 제동이 걸리며 자꾸 삐거덕거리고 있으니 제 몸도 마음도 지쳐만 갑니다.
원래 주중에 [시체가 돌아왔다]를 보러 갈 예정이었지만 월, 화요일 감기 기운 때문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느라 영화 보기를 포기한 상황. 수요일 밤에도 몸이 영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영화 한 편은 보고 자야겠다는 일념아래 선택한 영화가 [닷핵퀀텀 : 숨겨진 몬스터의 비밀]이었습니다.
왜 이 영화였냐고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러닝타임이 1시간 15분으로 짧았기 때문입니다. 감기 몸살 기운으로 빨리 자야했기 때문에 러닝타임이 긴 영화는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래도 영화 한 편을 보고 싶다는 욕심 끝에 내린 고육지책인 셈이죠.
가까운 미래, 가상 공간의 게임이 현실이 되는 세계
사실 [닷핵퀀텀 : 숨겨진 몬스터의 비밀]은 그다지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가상 공간에서의 게임인 '더 월드'에 푹 빠져 있는 아스미와 에리, 이오리. 이 세 친구에게 어느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깁니다. '더 월드'에서 버그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일이 발생하고 에리는 아스미를 구하다가 게임 밖 현실 세계로 로그아웃을 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게임 속 에리 뿐만 아니라 현실 속 에리 역시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는 것. 아스미와 이오리는 가상 공간과 현실의 세계가 모호해진 이 알수 없는 상황에 맞서 에리를 구해내야 합니다.
이미 많은 영화들이 가상 공간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담아냈었습니다. 어제 1996년 영화노트에 소개한 [가상현실]도 그러하고, 2010년 12월에 개봉했던 [트론 : 새로운 시작], 비슷한 분위기의 일본 애니메이션인 [썸머워즈]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그러한 일이 마냥 먼 훗날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미 '더 월드'와 같은 형식의 게임은 충분히 현실화될 수 있는 상황이고, 가상 공간이 점점 발전한다면 현실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될테니까요.
가상 공간의 나는 현실보다 멋있겠지?
이렇게 사람들이 가상 공간에 점점 집착하게 되는 이유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현실의 나는 보잘것 없고 평범하지만, 가상 공간에서의 나는 무시무시한 몬스터를 무찌를 수 있는 멋진 용사이고, 현실에서는 결코 할 수 없는 마법을 부르는 마법사이까요.
이건 게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저만 해도 현실에서는 이제 마흔이 되어 툭 하면 감기에 걸려 비실거리는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가상 공간이라 할 수 있는 블로그에는 제가 그토록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 놓으며, 많은 영화 친구들을 거느린 블로거입니다. 현실에서 영화는 취미 이상이 될 수 없지만 블로그에서 영화는 제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학창 시절의 꿈이 가상 공간인 블로그를 통해 이루어진 셈입니다.
[닷핵퀀텀 : 숨겨진 몬스터의 비밀]도 그러한데, 이제 고2인 아스미와 에리, 이오리. 현실에서 그녀들은 고3을 코 앞에둔 수험생일 뿐입니다. 하지만 '더 월드'에서는 멋진 복장을 한 용사입니다. 그녀들이 '더 월드'에 흠뻑 빠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가상 공간과 현실을 혼동하지는 말자.
만약 '더 월드'와 현실의 공간이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다면 그들에게도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가상 공간에서의 일이 현실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상 공간에서 멋진 모험을 할 수 있는 것도 그것이 현실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임에서 총에 맞아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죽더라도 얼마든지 다시 되살릴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상 공간에서의 일이 현실과 이어진다면? 그것은 더이상 가상 공간으로서의 매력을 잃어 버리는 것이겠죠.
우리는 흔히 가상 공간과 현실의 경계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게임 속 아이템을 위해 폭력을 휘두르고 급기야는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뉴스에 등장하고, 블로거의 지위를 이용해 현실에서도 대단한 사람인것처럼 행세를 하다가 낭패를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 역시 블로그 세상에서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생깁니다. 영화에서는 가상 공간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영화적 상상력을 덧붙여 극단적으로 표현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가상 공간과 현실의 경계를 잃어버린다면 얼마든지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가상 공간과 현실을 혼동하지 않고 확실한 경계선을 만드는 것. 어쩌면 우리에겐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일 겁니다.
우리 모두 허버트는 되지 말자.
현실의 세계에서는 의식 불명 상태인 허버트는 현실의 자신을 살리기 위해 가상 공간에서 끊임없이 자신에게 장기기증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이렇게 가상 공간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허버트로 인하여 '더 월드'의 세계는 혼란에 빠지고, 그러한 혼란은 현실과 연결이 됩니다.
물론 허버트의 사정은 딱합니다. [닷핵퀀텀 : 숨겨진 몬스터의 비밀]은 '더 월드' 속의 허버트 캐릭터를 귀엽게 설정함으로서 그의 딱한 사정을 최대한 부각시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약간의 여운이 남는 것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허버트는 자신이 '더 월드'와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렸기 때문에 현실에서 의식불명인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는 진실에 대해서는 외면합니다. 자기 자신만이 중요한 그에게 가상 공간에서의 만행은 그 어떤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는 허버트가 아닐까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가상 공간의 익명성을 무기로 남에게 폭력을 휘두르고는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지는 않았나요? 가상 공간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가까운 미래 사회를 그린 SF 애니메이션 [닷핵퀀텀 : 숨겨진 몬스터의 비밀].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니 내가 몸 담고 있는 우리 블로거들의 이야기가 아닌지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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