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인항
주연 : 풍소봉, 여명, 유역비, 장한위, 황추생
내가 '초한지'에 대해 알고 있던 모든 것.
아마도 중학교 시절 세계사를 배울 때였을 것입니다. 세계사 선생님께서 초나라와 한나라의 전쟁을 설명하시며 '유방이 항우를 이겨서 한나라를 세웠다.'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때 몇몇 아이들은 '킥킥'거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성적인 것에 관심이 많은 사춘기 시절의 나이였기에 한고조 유방의 이름이 여성의 신체 부위를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세계사 선생님은 여선생님이셨는데 '킥킥'거리며 웃는 아이들의 의도를 눈치채시고는 '유방이 가슴으로 이겼다고 외우세요.'라며 마치 '마징가 Z'의 여성 로봇인 '아프로다이 A'가 가슴 미사일을 쏘는 시늉을 하였습니다. 물론 반 아이들이 웃음을 터트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요.
거의 25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초한지'를 전혀 읽어 본 적이 없는 저는 그 날 이후로 유방이 항우를 이겨 한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결코 잊혀지지가 않았습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그날 세계사 선생님은 제게 절대 잊혀지지 않은 세계사의 지식을 심어준 셈입니다. 그리고 유방이 항우를 이겼다는 가장 기초적인 지식은 오랫동안 '초한지'에 대해서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역사는 이긴 자를 위한 기록이 마땅하지 않은가?
이렇게 '초한지'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시피한 저는 [초한지 : 천하대전]을 접하며 '역사의 승자인 유방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그린 영화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제 생각에 맞게 이 영화는 유방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고 결국 전열을 가다듬어 항우를 이기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주는 '홍문의 연희'의 수수께끼로 시작합니다.(영화의 원제 역시 [홍문연]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제 생각을 뒷받침하듯이 유방 역을 맡은 배우는 유명한 중국 배우인 여명입니다. 하지만 항우 역을 맡은 배우는 풍소봉이라는 제겐 상당히 낯선 배우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캐스팅 하나만 보더라도 [초한지 : 천하대전]은 유방을 위한 영화임이 마땅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제 생각을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초한지 : 천하대전]은 역사의 승자인 유방과 장량(장한위)보다는 역사의 패자인 항우와 범증(황추생)을 더욱 매력적으로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며 유방의 매력을 찾아 보려고 애를 썼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풍소봉의 호탕한 외모와 항우와 우희(유역비)의 비극적인 사랑에 매료되고 있는 저를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진정 유방은 승리한 것인가?
[초한지 : 천하대전]은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역사의 승자인 유방과 장량보다는 역사의 패자인 항우와 범증을 더욱 멋지게 표현합니다. 특히 범증이 장량의 꾐에 넘어간 항우에 의해 쫓겨나 객사하는 장면에서는 범증이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안타까움 마저 표현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범증을 잃은 항우가 결국 유방 연합군에 의해 사면초가의 위기 속에서 우희와 함께 자결하는 장면은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의 슬픈 사랑을 보는 것처럼 제 눈시울을 뜨겁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항우에게 승리하여 천하를 손에 쥔 유방은 어떠했을까요? 바로 이 부분에서 [초한지 : 천하대전]은 비범함을 드러내는데 장량, 한신을 비롯한 공신들을 처형하고 결국 말년에는 아무도 믿지 못하고 불안함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통해 '유방은 천하를 얻었지만 진정 그는 승리했는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집니다.
이는 이인항 감독의 전작인 [삼국지 : 용의 부활]과도 교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삼국지 : 용의 부활]은 유비, 관우, 장비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려던 조자룡의 비극적 영웅담을 그린 영화입니다. 이인항 감독은 이 두 영화를 통해 천하 통일이라는 대업을 향해 달려 갔던 이들의 비극을 그리며 전쟁이라는 폭력을 통해 대업을 이루려던 그 시대의 영웅들을 모두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승자였건, 패자였건 말입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초한지'에 관심이 생겼다.
저는 그저 유방의 호쾌한 영웅담을 보게 될 것이라 생각하며 [초한지 : 천하대전]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제 눈 앞에 펼쳐진 영화는 혼탁한 세상에서 전쟁을 통해 평화를 염원했던 영웅들의 비극적인 일생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멍한 느낌이 들며 좀 더 이들 영웅들의 비극적인 삶에 대해 알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습니다.
'초한지'를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일단 포털 사이트 검색을 통해 '초한지'의 주요 캐릭터들의 일생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초한지 : 천하대전]이 그려냈던 유방, 항우를 비롯한 여러 캐릭터들의 모습이 중국의 유명 역사가인 사마천의 '사기' 등에서 묘사한 것과 비슷하다는 사실입니다.
항우와 우희의 슬픈 사랑은 중국의 유명한 경극 '패왕별희'로 재탄생했다는 놀라운 사실과 실제로 유방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한나라를 세운 이후 개국 공신들을 역적이라며 사형시켰다는 것, 그리고 장량의 말년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상을 등지고 신선처럼 살았다는 전설까지... [초한지 : 천하대전]은 적절하게 영화적 각색 작업을 통해 재탄생시킨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에선 나오지 않았지만 유방의 아내인 여치는 측천무후, 서태후와 더불어 중국의 3대 악녀로 꼽히며 유방의 죽음 이후 한나라의 정권을 움켜 잡고 극악스러운 짓을 했다고 합니다. 우희가 '삼국지'의 초선, '열국지'의 서시, 당나라의 양귀비와 함께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히는 반면 여치는 중국의 3대 악녀라고 하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실까지 읽고나니 더욱 비록 역사의 승자는 유방이지만 우희와 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항우가 어쩌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승자가 아닌 패자의 이야기이다.
[초한지 : 천하대전]은 그러한 면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물론 '홍문의 연희'라는 단편적인 사건에 묶이지 않고 유방과 항우에 대한 폭 넓은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2시간 15분이라는 제법 긴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생략된 부분이 조금 눈에 띕니다.
특히 영화의 후반, 항우가 장량의 꾐에 넘어가 범증을 내치는 장면은 너무 소홀하게 표현되었는데 영화의 중반만 하더라도 항우와 범증의 관계가 돈독하게 보여 단지 단 한 장면으로 항우가 범증을 의심하게 된다는 설정은 너무 무리가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항우가 유방을 치기 위해 무리하게 군사를 이끌고 나가 결국 대패하는 장면 역시 무리한 생략이 보입니다. 영화 내내 유방에 비해 압도적인 군사력의 차이를 보여준 항우가 어쩌다가 유방의 연합군에 패하게 되었는지 영화는 제대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유방이 항우에게 평화협정을 제의했고, 항우가 이에 응하며 인질로 잡고 있던 유방의 가족들을 유방에게 돌려 보냈는데 항우가 뒤돌아서자 마자 유방이 평화 협정을 깨고 항우를 공격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유방은 참 야비한 인물인 셈입니다.)
사실 영화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장면들이 무리하게 생략된 것이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한지 : 천하대전]은 승자가 아닌 패자의 이야기를 하며 '초한지'에 대해서 다른 방향으로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정말 흥미로운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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