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브렛 래트너
주연 : 벤 스틸러, 에디 머피, 케이시 애플렉, 매튜 브로데릭, 앨런 알다, 테아 레오니
약속을 지키지 않은 구피는 각성하라!!!
원래는 지난 일요일에 구피와 [인류멸망보고서]를 보러갈 계획이었습니다. 제가 조금은 독특한 영화라고 경고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워낙에 SF영화를 좋아하는 구피는 그래도 [인류멸망보고서]를 보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난 일요일에 여의도의 봄꽃축제에 다녀오느라 초죽음이 된 상태라 [인류멸망보고서] 관람은 미뤄졌습니다.
지난 월요일... 구피에게 전날 보지 못한 [인류멸망보고서]를 보자고 했습니다. 월요일이라 조금 피곤해하던 구피. 그런데 구피와 [인류멸망보고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구피가 [인류멸망보고서]를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 미국 영화 아니었어?"
구피는 [인류멸망보고서]의 '천상의 피조물' 예고편을 보고 이 영화가 [아이, 로봇]과 같은 미국 SF영화인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남편이 영화 블로그를 운영하는데 어떻게 그런 착각을... 그리하여 [인류멸망보고서]의 관람은 또 하루가 미뤄졌습니다.
지난 화요일... 저는 더는 못기다리겠다며 [인류멸망보고서]를 보러 가자고 졸랐습니다. 그러나 구피는 [인류멸망보고서]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렸습니다. 제 블로그의 방명록에 쓰여 있는 [인류멸망보고서]가 개인적으로 최악의 영화였다고 평가한 슈마이님의 글을 본 것입니다. 저는 약속을 지키라고 울부짖었지만 저를 외면하는 구피. 암튼 정치인들이 선거공약도 지키지 않고 말 바꾸기를 하더니, 구피도 그러네요. 에궁~
[인류멸망보고서]의 아쉬움은 [타워 하이스트]로...
혼자 [인류멸망보고서]를 보러 갈 수도 있었지만 구피와 함께 보려고 생각했던 영화라 구피가 안 본다고 하니 김이 팍 빠져 버리네요. 그래서 '나 삐쳤어!'라는 항의의 표시로 방에 혼자 들어가 [타워 하이스트]를 봤습니다. 가벼운 코미디영화로 [인류멸망보고서]의 아쉬움을 달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타워 하이스트]는 기본적으로 코미디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벤 스틸러의 어벙함과 에디 머피의 쉴새없는 속사포 입담 속에 유쾌한 범죄극이 펼쳐질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의외로 진중했습니다.
[타워 하이스트]의 주인공인 조시(벤 스틸러)는 뉴욕의 최고 상류층이 모여사는 타워를 책임지는 지배인입니다. 그는 입주민을 향한 헌신적이고 영리한 봉사로 능력도 인정받고, 평판도 좋은 편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위기가 찾아옵니다. 동료들의 퇴직연금을 펜트하우스에 사는 쇼(앨런 알다)에게 맡겼는데 쇼가 사기혐의로 FBI에 체포된 것입니다.
쇼가 사기친 금액에 비한다면 조시와 그의 동료들의 돈은 껌값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뻔뻔한 쇼는 자신의 전재산을 숨겨놓고는 조시와 그의 동료들의 사정을 나 몰라라 합니다. 그에 조시는 참고 참았던 분노를 터트린 것입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조시의 일상을 꼼꼼하게 설명하고, 그가 쇼에게 분노를 터트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세밀하게 보여줍니다. 조금은 지루해질 수도 있는 정공법을 택한 셈인데, 그 덕분에 쇼가 감춰둔 돈을 훔치겠다는 조시의 어처구니없는 계획에 나도 모르게 응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코미디가 될 수도 있었지만...
브렛 레트너는 분명 [타워 하이스트]를 코미디로 완성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코미디에 능한 배우들이 전진배치되어 있으니 어쩌면 애초의 의도는 코미디영화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혀 웃기지 않습니다. 벤 스틸러는 이전 코미디영화와는 다르게 어벙한 캐릭터로 관객들을 웃기려 들지 않았고, 에디 머피 역시 속사포같은 입담은 여전했지만 비중이 크지 않았을 뿐더러, 그가 맡은 전문 털이범 슬라이드는 그다지 웃긴 캐릭터도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의 부실한 코믹 코드가 브렛 레트너의 연출력 부재 때문인지, 아니면 의도된 연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부실한 코믹 코드 덕분에 [타워 하이스트]는 꽤 진중한 범죄극으로 완성됩니다.
가진 자들을 향한 못 가진 자들의 통쾌한 한방.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힘없는 소시민들의 로망입니다. 많은 것을 가졌으면서 조금 더 갖기 위해 못 가진자들의 주머니까지 터는 그들. 힘 없는 소시민들은 그런 가진 자들의 행패를 알면서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본주의니까요. 그것이 억울하면 악착같이 돈을 벌고 힘을 키워야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타워 하이스트]에서 조시가 벌이는 범죄는 판타지와 같습니다. 국민을 학살하고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지만 아직도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숨겨놓고 호의호식하는 우리나라의 전직 대통령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굳이 강풀의 웹툰 [26년]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학살자인 전직대통령에게 통쾌한 한방을 날리고 싶은 이들은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힘 없는 소시민들은 그의 손 끝하나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힘 있는 자의 위력입니다.
퀸을 희생해야만 이길 수가 있다.
그래서 [타워 하이스트]는 판타지같은 범죄물입니다. 사실 [오션스 일레븐]과 같은 치밀한 범죄 따위는 이 영화에 없습니다. 조시의 계획은 처음부터 허점 투성이였고, 그들이 그러한 허점 투성이 범죄를 어떻게 완성해 나가는지 영화에서도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브렛 레트너 감독은 관객이 이 영화에 원하는 것은 벤 스틸러와 에디 머피라는 걸출한 코미디 배우를 내세운 포복절도의 코미디도 아니고, [오션스 일레븐]과 같은 치밀한 범죄스릴러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는 현실에선 불가능한 판타지와도 같은 가진 자들을 향한 못 가진자들의 통쾌한 한 방에 영화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킵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그러한 통쾌한 한 방이 퀸을 희생하여 승리를 거머쥐는 체스 경기처럼, 조시의 희생을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회성 강한 영화가 아닌 [타워 하이스트]와 같은 가벼운 오락 영화에서 주인공을 희생시키는 것은 보기 드문 경우입니다. 그러나 브렛 래트너는 조시를 희생했고, 그 결과 쇼를 이김으로서 가진 자들을 향한 통쾌한 한 방을 완성짓습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고나서 속이 후련해지기 보다는 조금 먹먹합니다. 판타지와 같은 범죄물을 완성해 놓고, 결말만은 씁쓸한 현실을 보여주는 [타워 하이스트]. 과연 자기 자신을 희생시켜 못 가진 자들의 승리를 안겨줄 주인공이 우리에겐 없는걸까요? 아직까지 부정부패를 대놓고 저지르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면서 저는 조시와 같은 주인공이 '뿅'하고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상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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