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에르게스 레스
주연 : 샘 워싱턴, 엘리자베스 뱅크스, 제이미 벨, 제네시스 로드리게즈, 에드 해리스
개봉 : 2012년 2월 22일
관람 : 2012년 3월 7일
등급 : 15세 관람가
결국 휴가를 내고 말았다.
지난 2월부터 하루 연차 휴가를 내야 겠다는 생각을 거의 매일 했습니다. 하지만 일이 너무 밀렸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부하직원이 갑작스럽게 사표까지 제출하는 바람에 연차 휴가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3월이 되었고, 일본에 살고 계신 제 블로그의 절친 나희천사님께서 한국에 방문하셨습니다. 나희천사님에게 입버릇처럼 '한국에 오시면 영화를 보여주겠다.'고 이야기했었는데, 나희천사님이 막상 한국에 오시니 저는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바쁜 일정 속에서 헐떡거리고 있네요.
지난 주말 소연님, 우리니님과 함께 나희천사님을 만나 걸죽하게 술 한잔걸쳤지만 영화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못한 상황. 결국 저는 고민 끝에 회사에 연차 휴가계를 제출했습니다. 겨우 하루간의 연차 휴가지만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퇴사한 직원의 후임으로 새롭게 채용한 직원이 출근을 시작한지 고작 3일이 지난 시점이기 때문에 연차 휴가는 분명 무리수였습니다.
정말 두 눈 질끈 감고 연차 휴가를 냈습니다. 너무 바빠 휴가를 내지 못하고 있는 동료 직원들에게 미안했고(제가 휴가를 내는 바람에 그들은 더욱 바빠졌을 것입니다.) 직장 상사의 눈치도 보였지만 어쩌겠습니까? 내 몸도 하루정도 여유를 갖고, 나희천사님과의 약속도 지키려면 어쩔 수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연차 휴가를 낸 저는 열심히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단 나희천사님과는 오후에 만나 뮤지컬 [서편제]의 프레스콜 행사에 함께 참석하고, 요즘 흥행 대박 중인 [러브 픽션]을 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남는 오전 시간대에는 저 혼자 보고 싶은 영화를 볼 계획을 세웠습니다. 정말 어렵게 낸 휴가인 만큼 단 몇 초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후보작은 메릴 스트립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철의 여인]과 지난 2월 넷째주의 기대작 1순위였던 [맨 온 렛지]였습니다. 서로 개성이 다른 영화였지만 제겐 보고 싶은 마음이 서로 비슷했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어느 영화를 선택할지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선택한 것이 목동 CGV 에 도착하자마자 입장이 가능했던 [맨 온 렛지]였습니다. 어쩌면 조금은 가벼운 영화를 보고 싶다는 제 마음 속 깊은 곳의 목소리도 한 몫을 했겠죠. 암튼 하루간의 꿀맛과도 같았던 연차 휴가 이야기는 [맨 온 렛지]의 영화 이야기를 시작으로 나희천사님과 함께 한 뮤지컬 [서편제]의 프레스콜 이야기와 [러브 픽션]의 영화 이야기, 그리고 연차 휴가날의 대미를 장식한 소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의 책 이야기까지 이번 주내내 해야 할 것 같네요.
건물 난관에 서있는 남자... 그의 정체는?
[맨 온 렛지]는 어느 남자가 초조한 표정으로 호텔에 묵고, 만찬을 즐긴 이후 갑자기 지문을 지우고 호텔의 난관으로 나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다짜고짜 난관에 서서 자살 소동을 하는 남자의 이야기라니... 꽤 빠른 전개인 셈이죠.
[맨 온 렛지]는 이렇게 처음부터 쉬지 않고 달려갑니다. 난관에서 자살 소동을 벌이는 남자로 시작하여 그의 한달 전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의 이름은 닉 캐시디(샘 워싱턴). 경찰이었던 그는 다이아몬드를 훔친 죄로 감옥에 수감됩니다. 하지만 그는 결백을 주장하고, 아버지의 장례식날 탈출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호텔의 난관에 서있는 것이죠.
시작부터가 참 불친절합니다. 닉 캐시디가 누구이고, 어떤 죄를 지었으며, 어쩌다가 누명을 썼는지는 캐릭터들의 대화로 관객들 스스로 알아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맨 온 렛지]는 닉 캐시디가 난관에 설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의 첫 부분을 아예 생략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을 과감하게 잘라내고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간 만큼 이 영화는 닉 캐시디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본론에 좀 더 충실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캐릭터 설정이 비단 닉 캐시디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유능한 네고시에이터였지만 경찰관의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져 있는 리디아 머셔(엘리자베스 뱅크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리디아 머셔가 주인공이라면 그녀가 지닌 과거의 충격적인 사건은 영화의 오프닝을 장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인 닉 캐시디의 과거조차 설명을 거부한 이 영화는 리디아 머셔의 과거 역시 과감히 생략해 버립니다. 그래서 리디아 머셔의 캐릭터 역시 영화 속 캐릭터들의 대화로 대강 유추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악당이라 할 수 있는 데이빗 잉글랜더(에드 해리스), 사건의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 닉 캐시디의 파트너 마이크 애커먼(안소니 마키)은 물론이고, 닉 캐시디를 도와 그의 결백을 도와주는 조이 캐시디(제이미 벨)과 앤지(제네시스 로드리게즈) 커플까지... [맨 온 렛지]는 아예 작정하고 캐릭터 구축을 포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캐릭터 구축을 포기함으로서 [맨 온 렛지]는 좀 더 딕 캐시디의 무죄 증명을 위한 치밀한 작전에 시간을 할애했고, 그만큼 영화는 지루할 틈이 없이 쉬지 않고 달려나갑니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었으니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어려웠고, 감정이입이 어려우니 닉 캐시디의 계획을 별 감흥없이 그저 멀찌감치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미있지만 그 이상은 되지 못한 이유
솔직히 저는 [맨 온 렛지]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제가 [맨 온 렛지]에게 감동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던 만큼 이 영화는 할리우드 킬링타임용 영화로 딱 알맞은 영화적 재미를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이상은 되지 못했습니다. 영화를 보는 1시간 40분 동안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영화를 즐겼을지 모르지만 영화가 끝나고나면 순식간에 제 기억 속에서 이 영화의 재미가 지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한 캐릭터의 부재입니다. 저는 영화 속의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영화를 감상하는 편인데(그래서 제 감정이입을 방해하는 극장 안의 그 어떤 행위도 싫어합니다. 특히 영화보는데 제게 말을 거는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맨 온 렛지]는 캐릭터 설명을 아예 생략하다보니 감정이입을 할 대상이 찾기 어려웠습니다.
만약 영화가 조금 지루해지더라도 닉 캐시디의 캐릭터를 처음부터 차근 차근 쌓아갔더라면 어땠을까요? 동료 경찰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로인해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절망감과 복수심에 가득 찬 닉 캐시디에 제가 감정이입을 할 수있었다면 저 역시 호텔 난관에 서있는 기분으로 영화 속에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마지막 자신의 결백과 복수를 완성하는 닉 캐시디의 모습에서 묘한 쾌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마치 내 자신의 결백이 증명이라도 된 것처럼, 내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이 바로 감정이입의 힘입니다.
그런데 [맨 온 렛지]는 오락영화적인 재미를 위해서 캐릭터를 포기하고 그저 닉 캐시디의 치밀한 계획에만 매달립니다. 그러한 [맨 온 렛지]의 선택은 1시간 40분 간의 재미를 보장하는 대신 나머지 모든 것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선택이었습니다.
높은 건물의 난관에 서서 자살 소동을 벌이는 사람의 심정은 절박함일 것입니다. 인생의 벼랑 위에 서 더이상 탈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자살을 결심하고 난관에 섭니다. 그것은 [맨 온 렛지]의 닉 캐시디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억울하고, 화도 났을 것입니다. 아무 죄도 없는데 감옥에 가야했고, 믿었던 동료들은 배신을 했습니다.
[맨 온 렛지]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바로 절박함입니다. 닉 캐시디가 느꼈을 절박함. 인생을 포기하고 자살을 선택한 이들의 절박함. 그런 절박함이 없는 [맨 온 렛지]는 영화를 보는 동안 재미는 있지만 결코 그 이상은 될 수가 없었던 영화인 것이죠.
배우들의 매력에 위안을 삼아 본다.
그래도 제겐 [맨 온 렛지]를 보고나서 조금 남는 것도 있었습니다. 특히 제 눈길을 사로 잡은 배우가 있었으니 바로 제네시스 로드리게즈라는 조금은 낯선 배우입니다.
[맨 온 렛지]에서 그녀의 역할은 단순합니다. 화끈한 몸매를 보여줌으로서 관객의 눈요기를 충실히 만족시켜주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캐릭터 역시 완벽하게 생략되어졌고, 대신 그녀의 몸매만이 부각되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연기한 앤지라는 캐릭터는 꽤 매력적입니다. 닉 캐시디와 조이 캐시디는 누명을 벗기 위해서 이 위험한 일에 끼어들었다고 치더라도 앤지는 조이와 사귀는 사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닉 캐시디의 계획에 끼어들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위험한 계획을 즐기는 듯이 보였던 그녀의 표정은 잠시 고백했던 자신의 문제아 시절의 과거와도 맞닿아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조이 캐시디의 애간장을 녹이는 그녀의 표정과 몸짓, 눈빛, 그리고 위험한 매력까지 굉장히 매력적이더군요. 그녀의 차기작을 보니 김지운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 [라스트 스탠드]에 출연 배우로 이름이 올라와 있습니다. [라스트 스탠드]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앞으로 눈여겨 봐도 좋을 배우인 듯 합니다.
그 외에도 [빌리 엘리어트)에서 발레가 하고 싶었던 귀여운 소년을 연기했던 제이미 벨이 위험한 작전 속에서도 앤지에게 찌질한 질투를 해대는 조이 캐시디 역을 맡아 꽤 좋은 인상을 남겨줬습니다. 그 역시 봉준호 감독의 다국적 프로젝트 [설국열차]에 출연한다고 하니 더욱 눈여겨봐야 할듯...
에드 해리스의 부패한 상류층 연기도 좋았고, 샘 워싱턴과 엘리자베스 뱅크스의 연기 역시 그럭저럭 불만은 없었습니다.
단, 아쉬운 배우를 한 명 고르라면 에드워드 번즈입니다. [타임코드]에서도 안습의 모습을 보였던 그는 [맨 온 렛지]에서도 존재감이 희미한 리디아 머셔의 동료 잭 도허티 역을 맡았습니다. 약간 비호감적인 목소리와 과거 액션 히어로를 맡았던 배우라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둔탁해진 몸매까지 선보이더군요.
암튼 [맨 온 렛지]는 영화를 보는 시간 동안만 가볍게 즐길 영화를 찾는 분이라면 알맞은 영화입니다. 하지만 저처럼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하며 영화를 즐기는 분이라면 결코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영화였습니다.
나만 느끼는 건가?
미국 포스터에 비해 한국 포스터는 참 산만하다.
고층 난관에 선 남자의 절박함...
영화에도 부족하지만 한국 포스터에도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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