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2년 영화이야기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 - 판타지는 현실을 반영한다.

쭈니-1 2012. 3. 15. 13:45

 

 

감독 : 앤드류 스탠튼

주연 : 테일러 키취, 린 콜린스, 도미닉 웨스트

개봉 : 2012년 3월 8일

관람 : 2012년 3월 13일

등급 : 12세 관람가

 

 

[샐러리맨 초한지] 마지막회도 포기했단 말이다.

 

TV 드라마를 자주 보지 않지만 한번 드라마를 보게 되면 단 한 회도 빠뜨리지 않고 꼭 챙겨 봅니다. 요즘은 [샐러리맨 초한지]가 그러합니다.

제가 [샐러리맨 초한지]를 보기 시작한 것은 지난 2월에 본 영화 [초한지 : 천하대전]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초한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던 저는 [초한지 : 천하대전]을 통해 '초한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TV에서 '초한지'의 주인공 이름을 그대로 본 딴 [샐러리맨 초한지]를 보게 되었고, 결국 열혈 시청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22부작인 [샐러리맨 초한지]의 마지막 회를 남겨뒀던 지난 화요일, 저는 크나큰 결심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회사 일로, 그리고 개인적인 약속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지난 주 개봉작을 단 한 편도 보지 못했던 저는 새로운 영화들이 개봉하기 전에 최소한 [화차]와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은 봐야 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둘러 영화를 봐야 했고, [샐러리맨 초한지] 마지막회냐, 아니면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이냐, 선택에 기로에 놓인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유방과 여치의 마지막 복수, 모가비의 최후, 21회의 마지막 장면에서 차에 치인 우희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저는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이 최소한 [샐러리맨 초한지] 마지막회보다 재미있기를 바래야 했습니다. 그리고 분명 재미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일단 저는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의 감독을 맡은 앤드류 스탠튼에 대한 믿음이 굳건했습니다. [벅스 라이프]와 [니모를 찾아서], 그리고 제겐 최고의 애니메이션이었던 [월 - E]를 연출했던 앤드류 스탠튼. 그가 연출한 애니메이션이 모두 최고의 영화들이었기에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 역시 재미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단 한가지 불안했던 것은 앤드류 스탠튼이 실사 영화 경험이 전무한 애니메이션 감독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불안감도 최근 개봉했던 [미션 임파서블 : 고스트 프로토콜] 덕분에 깨졌습니다. [미션 임파서블 : 고스트 프로토콜]을 연출한 브래드 버드 감독은 [인크레더블], [라따뚜이]를 연출했던 애니메이션 전문 감독이었지만 자신의 첫 실사영화이자, 블록버스터인 [미션 임파서블 : 고스트 프로토콜]을 멋지게 완성해 냈으니까요.

SF 소설의 고전인 에드거 라이스 버로프스의 '화성의 프린세스'를 원작으로 했다는 점도 든든했습니다. 이렇게 믿음직한 감독과 오랜 세월 사랑을 받은 고전 SF를 원작으로 했다는 점 등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은 유명 배우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제게 [샐러리맨 초한지]의 마지막 회를 포기시킬 만큼 충분한 기대감을 안겨준 영화입니다.

 

 

'화성의 프린세스'는 어떤 작품?

 

일단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이 영화의 원작인 '화성의 프린세스'부터 알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아바타], [스타워즈]를 탄생시킨 불멸의 원작이라며 떠들석하게 '화성의 프린세스'를 띄워줍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 워낙 과대 광고에 많이 속은 저로서는 그러한 광고 카피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본 이후 포털 사이트에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의 원작을 검색했습니다. 결과는... 광고 카피가 결코 과장은 아니더군요.

우리에게 '화성의 프린세스'를 비롯한 '바숨 시리즈'는 그다지 널리 알려진 소설이 아닙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SF 소설의 고전 대작으로 손꼽힌다고 합니다. [아바타]의 제임스 카메론,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가 '바숨 시리즈'에 영감을 얻은 것은 물론이고, 수 많은 SF 소설 작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한 예로 저명한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로버트 저멕키스 감독의 [콘텍트]의 원작자입니다.)은 어린 시절 읽은 '화성의 프린세스'로 인하여 외계에 관심을 가지고 천문학자가 되었다고 하니 서양에서의 '바숨 시리즈'의 영향력은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 넘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에드가 라이스 버로프스가 '화성의 프린세스'를 처음 출간한 것은 무려 100년 전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100년 전에 이미 지구를 넘어 우주의 화성의 역사를 완성해 놓은 에드가 라이스 버로프스의 상상력이 놀랍기만 합니다.

'화성의 프린세스'가 100년 전의 작품이다 보니 탄탄한 구성력, 과학을 기반으로 한 치밀한 상상력이 부족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러한 면은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사실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을 보면서 저는 조금 촌스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화성의 문명에 대한 설명이라던가, 화성인들의 의상, 화성의 동물 등... 조지 루카스가 창조해낸 [스타워즈]와 비교해서 그 완성도가 많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스토리 라인 역시 상당히 단순한 편인데, 우연히 화성에 가게된 지구인 존 카터(데일러 키취)의 모험담은 치밀한 구성력 대신 단순한 선과 악의 구도 속에서 특별함이 없이 진행됩니다. 그러한 이 영화의 촌스러움, 단순함이 저는 부진한 흥행 결과로 연결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원작에 충실하기 위한 앤드류 스탠튼 감독의 의도였다는 것을 알게 되니 그러한 촌스러움이 새롭게 보여집니다. 암튼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이 시리즈로 기획된 것으로 아는데, 부디 '바숨 시리즈'가 온전히 시리즈로 영화화되기를 기원할 따름입니다.

 

 

혼란의 시기, 그는 화성에서 평화를 찾다.

 

영화의 설명은 이쯤에서 끝내고... 저는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을 그다지 재미있게 본 편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2억5천만 달러라는 제작비가 도대체 어디에 쓰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 영화의 특수효과, 스펙타클은 조금 유치한 수준입니다.

게다가 단순한 스토리 라인이라니... SF영화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진 우리 관객들을 만족시키기에 분명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은 부족함이 많습니다. 아무리 100년 전의 원작에 충실한 결과물이라해도 부족한 것은 부족한 것입니다.

하지만 SF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도로 저는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이 흥미로웠습니다. 그 이유는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미국 남북 전쟁 시대의 혼란함과 화성의 상황이 흥미롭게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존 카터는 남북 전쟁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잃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군인이었지만 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상관의 말을 듣기를 거부합니다. 모든 판타지 영화가 그러하듯이 존 카터에게 현실은 너무 냉혹했고, 그러한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판타지의 공간은 바로 바숨 곧 화성입니다.

 

현실의 세계에서 도피하여 판타지 공간에 온 주인공들이 거의 그러하듯이 존 카터도 바숨에서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됩니다. 바로 지구의 중력과는 다른 바숨의 중력 덕분에 얻게 된 점프 능력입니다.

그는 다른 바숨인들은 절대 흉내조차 내지 못할 놀라운 점프 능력으로 영웅이 되고 헬리움의 당찬 공주 데자 토리스(린 콜린스)와 새로운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이러한 존 카터의 바숨에서의 모험담은 전형적인 판타지의 전개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존 카터의 바숨에서의 모험담를 되짚어 보면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존 카터 내면의 판타지가 보입니다.

바숨은 헬리움과 조단가라는 두 종족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종족인 타르크족은 헬리움과 조단가의 전쟁에서 한발자국 뒤로 빠져 있으면서 두 종족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남북 전쟁 당시 미국을 연상시킬 수 있는데, 헬리움과 조단가의 전쟁은 미국의 남부과 북부의 전쟁을, 타르크족은 미국 원주민인 인디언족을 연상시킵니다.

현실에서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가족을 잃고 절망감에 빠진 존 카터는 바숨에서는 위기에 빠진 데자 토리스를 구하고 타르크족을 규합하여 전쟁을 마무리짓습니다. 현실에서 존 카터가 간절히 바랬던 것이 판타지의 공간인 바숨에서 이루어 진 것입니다.

 

 

판타지는 현실을 반영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세계 경찰국임을 자부하는 미국의 국제적 위치도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에 녹아 있다는 점입니다.

존 카터는 바숨 전쟁에서 헬리움을 도와 달라는 데자 토리스의 요청에 '전쟁은 창피한 것이다.'라며 극구 거절합니다.

이는 현실에서 전쟁의 참혹함과 전쟁 끝의 무상을 뼈저리게 느낀 존 카터의 개인적 경험에 의한 인식입니다. 이는 전쟁을 반대하는 미국의 반전주의자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존 카터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바숨 전쟁에 뛰어 듭니다.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고 목숨을 건 모험을 선택한 것이죠. 마치 베트남 전쟁에 뛰어든 미국처럼, 혹은 걸프전을 일으킨 미국처럼, 정의라는 명분 아래(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정말 정의였는지 불분명하지만...) 존 카터는 남의 전쟁에 적극 가담을 한 것입니다.

바숨 전쟁 또한 존 카터가 남부군 출신임을 감안한다면 바숨에서의 전쟁은 남부군이 인디언의 도움으로 힘의 우위에 있던 북부군을 무찌르고 전쟁을 종식시킨다는 설정으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어쩌면 제가 너무 확대 해석을 해서 이 영화를, 이 영화의 원작을 이해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판타지라는 것이 현실의 세계와 맞닿아 있음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바숨에서의 세계관은 원작자인 에드가 라이스 버로프스의 생각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죠.

이러한 관점에서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을 보니 저는 영화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비록 겉은 존 카터의 화성에서의 모험담이라는 평범한 설정이지만 그 안에 담겨진 세계관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판타지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가끔 현실의 일상이 힘들어 버둥거릴때 행복한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저는 판타지 영화에서 제 상상 속의 세계를 간접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세계에서 저는 무한한 힘을 가진 영웅이고, 온갖 모험 속에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행복한 사나이가 됩니다.

뜻하지 않게 다시 지구로 돌아왔지만 바숨으로 돌아가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존 카터의 심정이 이해가 되더군요. 아무리 현실에서 수 많은 돈을 번 떼부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판타지의 공간인 바숨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이 영화가 남북 전쟁에서 패한 남부군을 지지하거나, 미국이 다른 나라의 전쟁에 끼어드는 것을 미화시킨다고 할지라도 판타지의 공간은 그 모든 현실을 뛰어 넘는 매력이 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어쩌면 2012년 첫 망작으로 기록될 이 영화...

하지만 현실의 소망을 반영한 판타지 본연의 임무에는 충실했던...

흥미로운 판타지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