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변영주
주연 : 이선균, 김민희, 조성하
개봉 : 2012년 3월 8일
관람 : 2012년 3월 14일
등급 : 15세 관람가
밀린 리뷰의 압박은 사랑으로 극복.
저는 영화를 본 후에는 지난 20년간 꼭 리뷰를 썼었고, 그것이 몸에 배어 버렸습니다. 좋은 점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제가 쓴 글을 다시 읽으면 영화를 봤던 당시의 기억, 영화에 대한 느낌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는 점이고, 안좋은 점은 영화 리뷰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가끔 영화 보기가 꺼려지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요즘이 특히 그런데,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면 되지만, 문제는 너무 바쁜 일상 때문에 리뷰쓸 시간이 현저하게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려고 하다가도 '리뷰 쓸 시간이 없는데...'라며 주저하게 됩니다.
[화차]를 볼 당시가 그러했습니다. 전날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을 봤고, 아직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의 영화 이야기를 쓰지 못한 상황에서 [화차]를 볼 시간적 여유가 생겼습니다. 요즘 국내 박스오피스에서 압도적인 1위를 지키고 있으며, 네티즌들의 입소문도 상당히 좋은 편이라서 당연히 시간적 여유가 생겼을때 주저하지 않고 극장으로 달려가는 것이 맞았지만, 저는 한참 동안을 고민해야 했습니다.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의 영화 이야기를 쓰기도 전에 [화차]를 보고나면 영화 이야기가 또 다시 두 개가 밀려 버리는 셈이니, 아직 회사 일에 치여 정신이 없는 제겐 그 자체가 커다란 압박이 되는 것이죠.
결국 볼까? 말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제게 그냥 보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게 해 준것은 구피의 한마디 덕분이었습니다.
스릴러 영화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구피는 일찌감치 '난 [화차] 안 볼거니까, 보려면 혼자 봐.'라고 선언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화차]의 입소문이 굉장히 좋다는 말에 보는 것으로 마음의 결정을 바꾸더군요.
구피와 함께 [화차]를 볼 수 있다면 그깟 밀린 영화 이야기에 대한 압박감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결국 저는 늦은 밤, 구피와 함께 또 다시 극장으로 차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야심한 밤, 그것도 화이트데이에 오들오들 떨면서 이 영화를 봤습니다. 무서운 장면이 나오지 않는데 이렇게 영화를 보며 '무섭다'라고 느끼긴 또 처음인 것 같습니다. 구피 역시 영화를 보고나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난 정말 이런 영화 무서워서 싫어'라며 질색을 하더군요.
영화를 보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선영(김민희)의 표정이 자꾸만 떠오르더군요. 아버지의 사채빚 때문에 당해야 했던 고난의 인생에서 연민이 느껴지면서, 행복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인한 그녀의 행동들에게 그 어떤 공포 영화보다 섬뜩한 공포가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인간에 대한 연민과 공포가 동시에 느껴지는 영화는 또 처음 인듯...
집중과 포기에 능했다.
[화차]는 문호(이선균)와 선영(김민희)이 결혼 준비를 위해 문호의 시골 아버지댁에 내려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너무나도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 이선균의 믿음직한 목소리와 김민희의 예쁜 모습이 그들의 행복감을 대변하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선영에게 걸려 온 한 통의 전화. 그리고 휴게소에서 사라진 선영. 영화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선영을 찾아 헤매는 문호. 그는 선영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압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실종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취를 감춘 것이라는 사실을...
변영주 감독은 처음부터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집중할 것은 집중하면서 영화를 시작합니다. 만약 욕심이 많은 감독이었다면 영화 초반에 선영의 실종 미스터리를 관객에게 제시했을 것입니다. 선영을 찾아 헤매는 문호의 모습에 집중하면서 '선영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누가 선영을 납치한 것일까?' 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관객에게 제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변영주 감독은 처음부터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변영주 감독은 선영이 실종된 것이 아닌 스스로 사라진 것임을 휴게소에서 선영이 전화를 받는 장면을 통해 그냥 밝혀버립니다. 영화 초반을 이끌어나갈 재미 요소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죠. 하지만 작은 재미를 포기한 변영주 감독은 '왜 그녀는 선영으로 살 수 밖에 없었나?'라는 질문에 집중하면서 큰 재미를 잡아 냅니다.
그러면서 등장하는 것이 문호의 사촌형이자 전직 경찰인 종근(조성하)이라는 캐릭터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변영주 감독은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집중할 것은 집중하는 노련한 연출력을 선보입니다.
캐릭터 면에서 변영주 감독이 포기한 것은 놀랍게도 문호와 선영입니다. 특히 문호 캐릭터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거의 대부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생략된 문호는 이선균의 연기와 이미지로 채워집니다. 그러한 면에서 이선균의 캐스팅은 굉장히 절묘했습니다. 이선균이 가지고 있던 배우로서의 이미지 자체가 그냥 문호라는 캐릭터가 되어 버린 것이죠.
문호가 이선균의 배우로서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연기로 채워졌다면 선영은 캐릭터 설명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풀어헤쳐 나갑니다. 그녀의 캐릭터 설명 자체가 영화의 스토리 라인이다 보니 변영주 감독은 결코 서두르지 않고 선영의 캐릭터를 완성해 나갑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종근의 캐릭터는 처음부터 차근 차근 설명이 되어 갑니다. 문호와 선영이 중심으로 구성된 영화의 스토리 라인에서 종근은 제 3자에 불과했지만 변영주 감독은 그의 캐릭터를 초반부터 상세하게 설명함으로서 선영의 정체를 밝혀 나가는 종근의 캐릭터를 강화시킵니다. 그렇게 강화된 종근의 캐릭터는 선영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영화의 중반부를 치밀하게 구성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됩니다.
원작 소설을 영화화하는 감독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원작의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에 집중할 것인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변영주 감독은 굉장히 노련하게 포기와 집중을 컨트롤해나갔습니다.
그녀에게 대한 연민이 생기다.
하지만 역시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김민희의 연기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문호는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감정이입의 대상자입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문호에게 감정이입이 되면서 선영의 비밀에 조금씩 벗겨지는 순간의 충격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그러기위해선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문호에게 감정이 이입된 관객들은 문호가 그러했듯이 선영을 사랑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종근이 선영의 추악한 과거를 들려줘도 '선영이 그럴리가 없어. 당신이 뭘 알아?'라고 울부짖을 정도로 선영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김민희의 캐스팅은 처음엔 불안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라 할 수 있는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가 당대 최고의 여배우인 손예진을 캐스팅함으로서 관객의 사랑을 갈구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아무래도 김민희의 캐스팅이 약해 보였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배우로서 그녀는 아직 확실한 대표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활약이 미미했었으니까요.
하지만 [화차]가 개봉한 이후 김민희의 연기에 대해서 찬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김민희의 재발견'이라는 단어가 연일 영화 뉴스에 쏟아져 나올 정도로 김민희는 모두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여인으로 선영을 완벽하게 연기해 낸 것입니다.
영화 초반의 그녀의 싱그러운 미소는 짧지만 강렬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진가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불우했던 과거가 드러나면서 부터입니다.
아버지의 사채빚으로 조폭들에게 시달리며 고난한 인생을 살았던 선영. 종근이 선영의 과거를 파헤칠 때마다 선영이라는 가짜 신분으로 문호와 결혼하려 했던 그녀에게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어?'라고 원망하기 보다는 '불쌍하다, 보호해주고 싶다'라는 연민의 감정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너무나 힘든 인생을 산 그녀였기에, 저는 그녀를 감싸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만이 사채업자에 대한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아는 그녀는 '제발 아버지를 죽여주세요.'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그녀 입장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가녀린 그녀로서는 결코 견딜 수 없는 고통. 그러한 그녀에 대한 연민이 그녀의 거짓 인생에 대한 원망보다 앞섰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마저도 변영주 감독이 파놓은 함정이었습니다. 문호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선영의 감춰진 비밀에 가슴 아파할 관객들을 보며 변영주 감독은 후반에 가서 마지막 히든 카드를 꺼내듭니다. 그러한 마지막 히든 카드는 바로 인간에 대한 공포입니다. 비슷한 분위기의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는 손예진이 연기한 미호라는 캐릭터에 대한 연민은 이끌어 냈지만 그녀에 대한 공포는 이끌어 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화차]와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의 차이점일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가? (스포 포함)
문호가 선영의 정체를 알면서 끝까지 그녀에 대한 연민의 끈을 놓지 못했던 것은 최소한 그녀는 살인자가 아닐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영특하게도 그러한 믿음은 선영의 어머니 죽음의 진실을 밝혀지는 부분에서 더욱 확고하게 관객의 마음 속을 파고듭니다. 처음부터 끊임없이 그녀가 선영의 어머니와 진짜 선영을 죽이고 선영 행세를 했다고 주장하는 종근. 그럴때마다 문호가 그랬듯이 '아냐, 그럴리가 없어.'라고 저는 외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영 어머니가 죽은 날, 그녀의 가슴 아픈 알리바이가 밝혀지는 부분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것이죠. '역시 그녀가 그랬을리가 없어.'라며...
변영주 감독은 바로 그러한 관객에게 갑자기 강력한 카운트 펀치를 날립니다. 선영을 토막 살인한 후 속옷 차림으로 피범벅이 된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너무나도 가여웠지만 그 이면에는 섬뜩함이 느껴졌습니다. 자신의 불행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은 토막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범행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때까지 '아냐, 그녀가 그럴리가 없어.'라고 생각했던 저는 문호가 느꼈을 충격만큼이나 강렬한 충격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김민희의 연기력 덕분이었고, 변영주 감독의 치밀하고 노련한 연출력 덕분이었습니다.
물론 마지막 장면은 조금 미지근했습니다. 어쩌면 그녀가 선영을 토막 살인하는 장면의 충격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그 어떤 장면이 와도 미지근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김민희의 연기는 그러한 미지근한 마지막 장면에서조차 제 가슴을 후벼 파더군요. 문호에게 안긴 그녀가 기계적으로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저 좀 놓아주세요.'라고 말하는 장면. 미지근한 후반부였지만 그 장면 만큼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그녀는 단지 행복해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으로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남의 신분으로라도 행복해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모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며 절망도 하고, 환호도 하는것일 겁니다.
분명 선영의 사정은 가슴이 아플 정도로 불쌍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아닌 아버지의 잘못으로 인하여 어렸을 적부터 행복을 추구하는 기본적인 욕망을 거세당한 그녀. 하지만 그녀가 행복하기 위해 저지른 범행은 섬뜩했습니다. 결코 공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연민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해준 [화차]. 진정 이 영화에 쏟아지는 찬사가 아깝지 않게 느껴지는 영화였습니다.
아마 김민희가 선영을 토막내고 피범벅이 된 장면은
오랫동안 내 악몽 속에 나타날 명장면이다.
여배우로서 그런 혼신의 연기를 하는 모습은 [주홍글씨]의 이은주 이후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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