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2년 영화이야기

[크로니클] - 악당의 사연

쭈니-1 2012. 3. 22. 13:25

 

 

감독 : 조슈아 트랭크

주연 : 데인 드한, 알렉스 러셀, 마이클 B. 조던

개봉 : 2012년 3월 15일

관람 : 2012년 3월 21일

등급 : 15세 관람가

 

 

내가 히어로물을 좋아하는 이유.

 

어렸을때 저는 상당히 심약한 아이였습니다. 갓난 저를 업고 어머니께서 계단을 오르 내리시면 제가 어머니의 등에서 깜짝 깜짝 놀라곤 했다네요.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저를 업고 계단을 오르 내리시는 것조차 조심스러우셨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부터 약도 참 많이 먹었고, 다른 아이처럼 밖에서 뛰어 노는 것 보다는 집에서 혼자 로봇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친구도 별로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반 아이들은 제가 하도 말이 없어서 벙어리인줄 알았다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집에서 로봇 만화영화를 보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던 저는 상상 속에서 거대 로봇을 조종하는 멋진 영웅이 되곤 했었습니다. 현실에서는 친구도 별로 없고, 조용한 아이였지만 상상속에서 만큼은 거대 로봇을 조종하며 지구를 지키는 영웅이었던 셈입니다.

그러한 상황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했습니다. 지금은 친구도 많고, 말도 많지만(네, 전 수다쟁이입니다. ^^)  여전히 힘 없는 소시민인 저는 영화 속 슈퍼 히어로의 활약담에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할리우드의 코믹스 영웅물을 유난히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 제가 좋아하는 슈퍼 히어로물이 국내 개봉을 했습니다. 비록 코믹스 영웅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대한 제작비가 들어간 블록버스터는 아니었지만 저는 [크로니클]을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크로니클]은 1999년에 개봉하여 의외의 흥행 대성공을 거두었던 [블레어 윗치] 이후 이제는 하나의 장르로 정착한 페이크 다큐의 형식을 띈 영화입니다. 

괴수 영화를 페이크 다큐 형식으로 완성한 [클로버필드]와 [트롤 사냥꾼], 외계인을 소재로한 영화이면서 페이크 다큐 형식을 띄고 있는 [포스 카인드] 등 페이크 다큐는 공포 영화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장르 속에 편입되며 진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크로니클]은 이제 슈퍼 히어로물도 페이크 다큐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페이크 다큐로 만들어진 슈퍼 히어로물이라니... 일단 형식 면에서 새로움을 기대해도 좋을 듯이 보였으며, 세 명의 고등학교생이 우연히 초인적인 힘을 가지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내용도 슈퍼 히어로물로 적당해 보였습니다. [클로버필드]를 통해 어지러움증을 느낀 이후 페이크 다큐를 꺼려하는 구피가 [크로니클]를 거부했지만, 저는 혼자서라도 새로운 형식의 슈퍼 히어로물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앤드류... 슈퍼 초능력을 얻다.

 

[크로니클]은 앤드류(데인 드한)의 관점에서 시작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소방관이었지만 현장의 사고로 퇴직을 한 후 연금으로 하루 하루를 버티는 술주정꾼이고, 어머니는 불치의 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습니다. 소심한 성격에 친구도 없는 그는 사촌인 맷(알렉스 러셀)이 유일한 친구입니다.

그런 그가 캠코더를 산 후, 자신의 모든 일상을 캠코더에 기록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가 됩니다. 하지만 어쩌면 현실의 세계를 외면하고 캠코더에 담긴 세상 속으로 숨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앤드류에게 현실은 어린 소년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가혹합니다. 

그런 그가 우연히 초능력을 얻게 됩니다. 함께 초능력을 얻은 맷과 스티브(마이클 B. 조던)는 자신에게 생긴 이 놀라운 능력을 즐거워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원칙을 정해서 자신이 가진 초능력을 제어하려 합니다. 그러나 앤드류는 가혹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할 수도 있는 초능력에 푹 빠져 버립니다. 초능력이 있는 한 그는 더이상 왕따 소년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제가 [크로니클]에 기대한 것은 슈퍼 히어로물을 페이크 다큐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완성해낸 새로움이었습니다. 하지만 [크로니클]의 페이크 다큐는 그저 흉내만 냅니다. 굳이 이 영화가 페이크 다큐의 형식을 띌 필요가 무엇인지 궁금할 정도로 그 효과는 크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기존의 슈퍼 히어로물과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던 [크로니클]의 내용 전개는 전혀 새로웠습니다. 처음부터 앤드류에 모든 포커스를 맞추면서 그가 악당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차근 차근 설명해 나갑니다. 이것은 마치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언브레이커블]에서 한발자국 더 진전한 전개입니다. 슈퍼 히어로를 다뤘으면서 정의의 사도가 아닌 악당에 포커스를 맞춰, 영화를 보던 제게 앤드류에게 감정이입을 하게끔 유도합니다.

어린 시절 거대 로봇을 타고 지구를 지키는 영웅을 꿈꾸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좀 더 복잡한 내면을 지닌 코믹스의 영웅들에게 열광하던 저는 [크로니클]을 보는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초능력을 제어하지 못한 채 점점 악당이 되어 가는 앤드류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왜 악당이 될 수 밖에 없었는가?

 

조슈아 트랭크 감독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슈퍼 히어로물이라면 당연히 영웅의 막강 활약상을 기대하는 관객들이 많을텐데 조슈아 트랭크 감독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초반에는 앤드류의 견디기 힘든 가혹한 현실을 천천히 그려냈고, 중반에는 초능력을 얻은 그가 점점 자신이 가진 엄청난 능력을 키워 나가는 한편 그 힘을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는 장면으로 채워 나갑니다.

그렇게 결코 서두르지 않는 영화의 내용 전개는 제가 앤드류에게 감정을 이입한 충분한 시간을 마련합니다. 어느덧 저는 자신의 무능력을 오히려 아들 탓을 하는 앤드류 아버지에게 분노가 느껴졌고, 초능력으로 그를 조금은 혼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앤드류가 실수로 스티브를 죽였을 때에도 '앤드류 탓이 아냐. 혼자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을 때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잖아.'라고 애써 앤드류를 위로했습니다. 동물 세계의 약육강식 논리를 들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앤드류를 보며 그가 가여웠습니다. 한때 그는 약자였고, 그래서 부당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이제 그는 강자이니 자신을 괴롭혔던 자들을 혼내줘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약값을 구하기 위해 강도 행각을 하다가 결국 폭발 사고로 인하여 의식을 잃은 채 병원에 누워 있는 앤드류. 그런 앤드류에게 아버지가 찾아와 어머니가 결국 죽었으며, 이 모든 것은 앤드류 탓이라며 따집니다. 그때까지 꾹꾹 누르며 참고 참았던 앤드류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 영화의 진정한 액션이 펼쳐집니다. 그때까지 액션다운 액션 한번 나오지 않았던 [크로니클]은 마지막 순간 앤드류의 분노가 폭발함과 동시에 액션도 한 순간에 폭발하여 마구 쏟아져 관객 앞에 펼쳐지는 겁니다.

조슈아 트랭크 감독이 영리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점입니다. 사실 [크로니클]은 제작비가 고작 1천 2백만 달러 밖에 들어가지 않은 저예산 영화입니다. 따라서 다른 슈퍼 히어로 영화처럼 액션씬이 빈번하게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조슈아 트랭크 감독도 그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던 듯이 보입니다. 그는 액션 대신 앤드류의 캐릭터를 완성하는데 영화 러닝 타임의 대부분을 소요했습니다. 그럼으로서 마지막에 펼쳐질 액션의 임팩트를 키워 나간 것이죠.

그러한 조슈아 트랭크 감독의 전략 덕분에 저는 앤드류에게 감정이입이 되었고, 후반부에 결국 터져버린 앤드류의 분노를 함께 느끼고 있었습니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이라는 단순한 기업 논리가 이 영화에서 실현된 셈입니다.

 

 

속 편 나오겠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영화의 제작비는 고작 1천2백만 달러입니다. 하지만 [크로니클]이 북미에서 벌어들인 흥행 수입이 무려 6천3백만 달러가 넘으며, 월드와이드 성적으로는 1억1천6백만 달러에 달합니다. 제작비의 10배에 달하는 흥행 수입을 올린 셈입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속 편이 당연히 나올 것입니다. 영화 자체도 그 여지를 남겨 두었고,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도 수두룩하게 많으니까요.

일단 슈퍼 히어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힘의 원천에 대한 설명이 거의 생략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초능력을 준 그 물질의 정체가 무엇인지, [크로니클]은 끝까지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아마 그러한 비밀을 벗기는 것만으로도 영화 한 편을 뚝딱 만들 수 있을 듯이 보입니다.

[크로니클]의 주인공은 앤드류였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영웅은 맷입니다. 맷은 앤드류와는 달리 자신의 초능력을 제어할줄 알고 있었으며, 앤드류의 폭주를 막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합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여자친구 케이시(애슐리 힌쇼)까지 있으니 슈퍼 히어로의 면모를 모두 갖춘 셈입니다.

 

[크로니클]은 아직 맷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영화 자체가 앤드류에게 올인하다보니 상대적으로 진정한 슈퍼 히어로라고 할 수 있는 맷은 뒷전으로 밀린 셈입니다. 맷의 활약담만으로도 몇 편의 이야기는 또 뚝딱 만들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듯 [크로니클]은 아직 그 이야기거리가 무궁무진합니다. 하지만 [크로니클]의 속 편이 [크로니클]처럼 영화적 재미를 갖출려면 앤드류와 같은 악당이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를 구축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악당이 주인공이었던 영화들은 간혹 있었습니다. 하지만 [메가 마인드]처럼 비록 악당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악당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크로니클]은 진정한 악당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습니다. 앤드류가 악당이 된 사연을 몰랐다면 영화를 보는 저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한채 맷이 앤드류를 무찌르는 장면 정도에 흥미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크로니클]은 앤드류의 사연에 집중함으로서 '당신에게 초능력이 생긴다면 앤드류처럼 그 힘에 압도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과연 나는? 내가 앤드류와 같은 상황이라면? 솔직히 제가 앤드류처럼 악당이 되지 않는다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내 안에 잠재된 분노의 폭발을 억누를 자제력이 과연 나에게 있을지... [크로니클]을 보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곰곰히 생각해봤습니다. 참 어렵고 난감한 질문이었습니다.

 

 

내가 앤드류라면?

솔직히 나를 괴롭힌 친구들을 혼내주고, 나를 무시한 세상에 내 힘을 과시했을지도...

아! 역시 내겐 초능력 따위는 안 생기는 것이 세계 평화를 위해서 나을지도...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