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용주
주연 : 엄태웅, 한가인, 이제훈, 수지
개봉 : 2012년 3월 22일
관람 : 2012년 3월 26일
등급 : 12세 관람가
첫사랑이 왜 이루어지지 않는줄 아니?
여러분의 첫사랑에 대한 기억은 어떠셨나요? 저는 꽤 강렬한 첫사랑을 경험했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때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학원에서 처음 만난 동갑내기 여자아이한테 첫눈에 반해 버린 것이죠. 우연히 마주친 순간 영화에서나 나오는 찌릿한 느낌을 받고는 곧바로 사랑에 빠져버렸었습니다.
하지만 제 첫사랑은 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짝사랑으로만 머물다가 끝나 버렸습니다. 여러번의 고백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그녀도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녀의 친구들에게 들었고, 제 친구들이 그녀의 집 전화번호도 알려줬으며, 학원에서 제 뒷자리에 앉은 그녀가 제 발을 툭툭 건드리며 제게 직접적으로 언질을 줬는데도 저는 고백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여성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누나와 여동생 사이에서 자랐기 때문에 여성들과 친하게 지내는 법을 잘 알았고, 친구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저는 이미 여러명의 편하게 지내는 여자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 앞에만 서면 제 몸은 딱딱하게 굳어지고, 입에선 단 한마디의 말도 나오지 않으니 참 답답할 노릇이었죠.
당시엔 그런 제가 미웠고, 한심했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당시에 저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저는 사랑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0대 시절 그 한심했던 짝사랑 이후에도 제 20대 시절의 사랑 역시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혼자만의 사랑은 다반사였고,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의 노래 가사처럼 친한 친구에게 사랑을 빼앗겼던 적도 있으며, 어느날 갑자기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아 1년 동안 가슴앓이하기도 했었습니다. 당시엔 죽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지만 그건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10대, 20대 시절의 풋사랑을 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주관적인 사랑은 이별을 불러 온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랑에 대한 환상이 많았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하고 싶었던 것도 많았습니다. 결국 저는 사랑에 대한 제 어처구니없는 환상을 채우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원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려고 하지 않은채 그냥 내 주관대로 사랑을 진행시켰고, 내가 아는 방식대로 사랑을 하기만 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구피한테는 잘 하냐고요?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가끔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꺾고, 구피가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여 보려고 노력은 합니다.(가끔 그것이 노력에 그쳐서 문제이긴 합니다만... ^^)
그들의 첫사랑은 어떠했나?
사실 [건축학개론]의 개봉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웬만해선 이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그것은 이 영화가 내 가슴아픈 첫사랑을 떠오르게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입소문이 워낙 좋았고, 지난 주말 박스오피스에서 [화차]를 꺾고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 다짐은 부질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궁상맞게 혼자는 보는 것만큼은 피하려고 발버둥쳤는데, 구피가 한사코 이 영화의 관람을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또 이렇게 달콤한 로맨스 영화를 조조할인으로 극장에 앉아 혼자 감상하고 말았네요. 그런데 다행스러운것은 [건축학개론]을 보러 혼자 극장을 찾으신 분들이 꽤 많았다는 것입니다. 아마 혼자 조용히 첫사랑을 회상하고 싶은 분들이 많이 계셨나봅니다.
암튼 우려했던 것만큼 궁상맞은 영화 관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월요일 아침,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마구 들춰내며 맞이했습니다. 영화를 보며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라는 노래에 흠뻑 빠져들었고, 수지의 풋풋한 모습과 한가인의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며 유난히 눈이 컸고, 유난히 풋풋했던 나의 첫사랑을 맘껏 회상할 수 있었습니다.
[건축학개론]은 30대가 건축가 승민(엄태웅)에게 어느날 15년 전 첫사랑이었던 서연(한가인)이 찾아오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현재의 승민, 서연과 15년 전 과거의 승민(이제훈), 서연(수지)의 이야기를 번갈아 가며 보여줍니다.
일단 이 영화의 관객 공략법은 확연하게 2030세대의 추억을 공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은 물론이고, 무선 호출기 삐삐, 그리고 CD 플레이어 등 제가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을 고스란히 재현한 것 같아 반가웠습니다. (특히 승민이 무스로 머리를 넘겼다가 다시 머리를 감는 장면... 제가 고등학교 시절 그 짓을 많이 해봤습니다. ^^)
그리고 더욱 놀라웠던 것은 대학 새내기 승민과 서연의 풋풋한 첫사랑에 저는 많은 공감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며 답답할 정도로 소심한 승민의 행동에 '바보야! 그냥 남자답게 고백하란말야.'를 외치고 싶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어지만, 돌이켜보면 저 역시 승민처럼 그렇게 답답하고 소심하게 첫사랑을 했으니까요.
결국 사소한 오해 때문에 엇갈린 그들의 사랑을 보며 '그래, 그들도 아직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았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승민이 좀 더 용기를 가졌다면, 승민이 좀 더 서연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승민이 좀 더 서연을 사랑할 마음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다면... 마치 내 자신의 이야기를 보는 것 마냥 저는 그들의 엇갈린 풋 사랑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렇다면 성인이 된 그들은 첫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제 성인이 된 승민과 서연이 다시 만나는 현재의 장면입니다. 과거의 그들은 아직 사랑할 줄을 몰랐기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인이 되어 사랑하는 법을 터득한 후에 다시 만난 승민과 서연은 다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안타깝지만 대답은 NO 입니다. 이미 그들의 앞에서는 현실의 벽이 가로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앞둔 승민은 결혼 후 미국에서 살 생각이고, 남편과 이혼한 서연은 제주도의 옛 집을 리모델링하여 병 든 아버지와 함께 살 계획입니다.
승민과 서연이 제주도의 집을 리모델링하면서 점차 예전의 감정이 되살아나지만 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동화같은 사랑보다는 현실의 삶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번 어긋난 사랑은 15년이 지난 이후에도 결코 다시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성인이 된 승민과 서연의 엇갈린 인연은 풋풋한 대학생이었던 승민과 서연의 엇갈린 첫사랑 만큼이나 아련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건축학개론]은 동화와 같은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 뿐만 아니라 성인이 된 그들이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또다시 서로의 마음을 외면하는 장면에서도 영화를 보는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저 역시 첫사랑은 그저 기억 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살아야 하는 성인이니까요.
제가 [건축학개론]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스토리의 극적 전개가 없습니다. 15년 전 승민과 서연의 엇갈린 사랑 역시 마치 내 자신의 경험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현실의 승민과 서연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할만한 극적 반전이나 아님 현실을 외면해서라도 관객이 좋아할만한 해피엔딩으로 영화를 마무리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용주 감독은 그런 영화적 장치를 끝내 거부합니다.
그 결과 영화의 스토리 라인은 밋밋해졌습니다. 승민과 서연의 이야기는 긴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평범하고 밋밋해졌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이 영화의 아련함은 제 가슴 속을 더욱 깊숙히 파고 들었습니다. [건축학개론]의 사랑 이야기가 각색된, 꾸며진 이야기가 아닌, 내 첫사랑과 닮아 있고, 내 현실과 닮아 있기에 더욱 아련했습니다.
어찌보면 영화적 재미가 부족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영화가 [화차]를 꺾고 지난 주말 박스오피스 1위 자리에 오른 것을 보면 저 처럼 이 영화의 꾸며지지 않은 첫사랑 이야기에 공감하고 아련해하는 관객이 많이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사랑과 건축의 상관 관계
처음엔 첫사랑을 소재로한 영화의 제목이 왜 [건축학개론]일까? 라는 의문을 품기도 했습니다. 그저 승민과 서연이 첫 만남 장소가 '건축학개론'의 수업이 진행중인 강의실이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그 이유가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니 사랑과 건축이라는 것이 참 많이 닮았구나 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용주 감독은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며 건축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처음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난 승민과 서연. 건축학의 걸음마 단계인 개론 수업만큼, 승민과 서연의 사랑은 서투르기만 합니다. 서로에게 다가갈 방법을 알지 못한채 그저 겉돌기만 하다가 어긋나 버립니다.
성인이 된 승민과 서연이 처음 만났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승민은 고객의 눈을 현혹시키는 그럴듯한 건축을 설계할 줄만 알뿐, 진심으로 집을 사랑하고, 그 집에 들어갈 사람들을 위한 건축을 하지는 못합니다. 처음 서연이 제주도 집의 재건축을 의뢰했을 때에도 그럴 듯한 사탕발림으로만 서연을 설득할 뿐,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집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서연과의 옛 추억을 회상하며 그녀에 대한 감정이 다시 되살아나면서 제주도 집의 재건축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자신의 결혼을 뒤로 미루면서까지 서연을 위한, 그리고 서연이 원하는 집을 건축하는 승민의 표정에서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완성된 집의 아름다움은 비록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서연과의 아련한 사랑을 다시 잇지는 못하지만 서연을 향한 승민의 마음이 읽혀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집에서 삽니다. 한 겨울의 찬 바람을 막아주고, 한 여름의 뜨거운 햇빛을 차단시킵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집은 언제나 그 곳에서 바깥 세상의 고단한 삶을 치유해 줍니다.
어쩌면 사랑도 그래야 합니다. 세상의 거친 풍파 속에서 그 사람을 지켜주고 싶고, 고단한 삶에서 유일한 안락처가 되어 주고 싶은 마음... 승민이 서연을 위해 지어줬던 그 아름다운 집 만큼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 마음 속에 지은 그 사람의 집은 그 사람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따뜻하고, 포근하며 편안한 곳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승민과 서연의 사랑은 끝내 어긋났지만 승민이 진심으로 지어준 사랑과 같은 집이 있기에 서연의 마지막 모습은 행복해 보였습니다.
나는 과연 구피를 위해 내 마음 속에 어떤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아니, 구피를 위해 이미 지어진 내 마음 속의 집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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