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2년 영화이야기

[러브픽션] - 사랑 때문에 찌질이가 되어 본 경험이 있는가?

쭈니-1 2012. 3. 9. 11:38

 

 

감독 : 전계수

주연 : 하정우, 공효진, 이병준, 조희봉, 지진희, 유인나

개봉 : 2012년 2월 29일

관람 : 2012년 3월 7일

등급 : 15세 관람가

 

 

로미오이 되고 싶었던 찌질한 나의 사랑

 

지금까지 살아가면서 제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이문세가 불렀던 대중가요 '그녀의 웃음소리뿐'과 세익스피어가 쓴 고전소설 '로미오와 줄리엣'이었습니다. '그녀의 웃음소리뿐'이라는 노래의 가사 중에는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어느 지나간 날에 오늘이 생각날까?

그대 웃으며 큰 소리로 내게 물었지.

그날은 지나가고 아무 기억도 없이

그저 그대의 웃음소리 뿐

제가 이 음악을 처음 들었던 것은 중학교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저는 그 부분을 혼자 조용히 음미하며 제 지나간 날들을 돌아봤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제가 살아온 그 수많은 날들 중에서 기억이 나는 날이 거의 없더라고요. 당시에는 하루 하루가 소중했을텐데, 그 소중한 날을 위해서 하루 하루를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았을텐데... 그렇게 흘렸던 땀, 웃음, 추억들이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과거라는 이름으로 제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것이죠.

그래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그 일기는 영화노트가 되었으며, 영화노트는 영화 이야기로 진화하였습니다. 아마 '그녀의 웃음소리뿐'이라는 노래가 없었다면 전 이렇게 열심히 제 일상을, 제가 본 영화들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오랫동안 제게 어처구니없는 사랑관을 심어줬습니다. 저는 죽음도 갈라 놓을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이 분명 존재할 것이라 믿었고, 생애 단 한번뿐인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아마 제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지 않았다면 제 20대 시절은 화려한 연애 경력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을지도 모르죠. (아무도 안 믿지만 이래뵈도 20대 시절 나름 인기남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기 위해 제대로된 연애 한번 하지 못하며 20대를 낭비했습니다.

그리고 IMF의 충격과 세기말의 뒤숭숭한 분위기로 혼란스러웠던 1999년 어느날, 저는 드디어 기다렸던 운명적인 사랑을 만났습니다. 아니 만났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요? 2년 간의 연애 끝에 당차게 차였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당시 저는 정말 찌질했습니다. 제대로된 연애 경험이 없으니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IMF 시절이라 직장조차 없었고, 돈도 없었기에 제 찌질함은 극에 치달았습니다.

[러브픽션]을 봤습니다. 원래는 볼 생각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는데 개봉 첫 주 흥행 돌풍을 일으켰고, 입소문도 꽤 좋은 편이라서 오랜만에 한국에 오신 나희천사님에게 한국영화로 좋은 추억을 안겨드리고자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구주월(하정우)에게 제대로 감정이입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찌질함... 어쩜 당시 저와 그리도 비슷하던지...

 

 

완벽한 여자? 완벽한 사랑? 그딴건 없다.

 

소설가인 구주월은 완벽한 여자를 찾아 헤맨 나머지 서른살이 넘도록 제대로 된 연애 한번 해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렸던 것처럼 그 역시 사랑에 대한 비현실적인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엔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자신의 모습을 꾸미고, 그러한 모습의 뒤에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꺼려하는 본연의 모습을 감추고 있습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하다보면 서로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남들에게 보여주기 꺼려하는 내 모습들을 보여주게 되고, 또 상대방의 그러한 모습도 보게되는 것입니다. 대부분 그러한 상대방의 모습을 보며 사랑에 대한 환상이 깨지게 되는 것이죠.

구주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영화 수입업을 하는 희진(공효진)에게 첫 눈에 반해버립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완벽한 여자라고 확신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작된 주월과 희진의 사랑. 하지만 비현실적인 환상을 가진 그의 사랑이 잘 진행될리는 만무합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꺼려했던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되고, 과거를 알게 되며 그는 갈등하게 됩니다. 그리고 점점 희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식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잘못된 환상이 가진 사랑의 비극인 셈이죠.

 

전계수 감독은 매우 영특하게 그러한 부분을 설명해냅니다.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희진의 겨드랑이 털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꺼려하는 모습을 대표합니다.

사실 여성의 겨드랑이 털은 창피한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여성 신체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겨드랑이 털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여성은 드물 것입니다. 화장과 멋진 옷, 악세사리로 남들에게 보여줄 모습을 꾸미는 여성에게 겨드랑이 털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것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꺼려하는 내 본연의 모습들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방귀를 뀌는 모습, 코딱지를 파는 모습, 이빨에 낀 고추가루 등등. 이 세상에 방귀를 뀌지않고 사는 사람은 없고, 코딱지를 파지 않으면 답답해서 살 수가 없으며, 음식을 먹다보면 이빨에 고추가루가 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그러한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을 하다보면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하고, 보여주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이슬만 먹고 사는 요정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실망하게 되고 환상이 깨지게 되죠. [러브픽션]은 그러한 과정을 겨드랑이 털로 설정함으로서 관객의 웃음보를 터트립니다.

 

 

사랑을 하면 찌질해진다.

 

영화를 보다보면 주월이 한심해보일 정도로 찌질해보입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저 역시 그러했습니다. 사랑에 대한, 그녀에 대한 환상이 서서히 깨지면서 나도 모르게 찌질남이 되어 버린 것이죠. 제가 [러브픽션]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러한 점들 때문입니다.

[러브픽션]은 로맨틱코미디 장르의 영화입니다. 관객들이 로맨틱코미디를 보면서 원하는 것은 오로지 사랑에 대한 환상을 만족시켜 주는 것입니다. 잘 생기고, 예쁜 배우들이 함께 위기를 함께 해쳐나가며 알콩달콩 사랑을 이뤄나가는 것. 그것이 로맨틱코미디의 생존 방식이었습니다. 현실에서 하기 힘든 완벽한 사랑을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대리만족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러브픽션]은 그러한 로맨틱코미디의 형식을 오히려 거꾸로 이용합니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사랑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 보다는 사랑에 대한 환상을 깨버립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로맨틱코미디를 기대하며 하정우와 공효진의 알콩달콩한 사랑을 기대한 분이라면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뻔한 로맨틱코미디의 법칙을 뒤집고, 로맨틱코미디의 법칙을 역으로 이용하는 [러브픽션]을 보며 저는 오히려 쾌감을 느꼈습니다.

 

게다가 그러한 쾌감은 현실적인 재미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놀랍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연히 자신의 옛 여친(유인나)과 희진이 많은 부분에서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된 주월의 모습은 저와 정확하게 오버랩됩니다. 사람의 이상형은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짝을 찾아주는 것이니까요.

영화의 후반, 희진에게 찌질하게 구는 주월의 모습 역시 공감되었습니다. 영화의 재미를 위해서 과장되게 표현할 수도 있었지만 전계수 감독은 묘하게 현실성을 유지시킵니다.

그러면서 비현실적인 영화적 상황은 주월이 연재하는 소설의 상황 속에 집어 넣습니다. 기억을 잃은 미모의 여성, 그녀를 사랑하면서 과거를 쫓는 멋진 형사. 솔직히 주월이 쓴 '액모부인'의 설정은 바로 관객들이 원하는 사랑의 환상적인 모습과 맞닿아 있습니다.

전계수 감독은 [러브픽션]에서는 로맨틱코미디의 뻔한 설정을 뒤집는 현실성을 부여하고, 관객이 원하는 비현실적인 사랑에 대한 판타지는 '액모부인'이라는 영화 속의 또 다른 영화로 표현한 것이죠. 2006년에 개봉했던 [삼거리 극장]에서도 느꼈지만 전계수 감독의 이러한 연출력은 분명 주목할만 합니다.

 

 

그래, 인정한다. 배우들의 매력이 이 영화의 90%다.

 

하지만 역시 [러브픽션]의 재미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배우들의 매력도 빼놓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전계수 감독의 연출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로맨틱코미디의 법칙을 비웃는 시나리오가 아무리 좋아도 그것을 영화에 표현하는 배우들이 매력을 지니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예를 들어서 1996년 개봉한 [코르셋]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경영과 당시 치열한 경쟁력을 뚫은 당찬 신인 이혜은을 캐스팅했던 [코르셋]은 로맨틱코미디의 스토리 라인을 고스란히 가져왔으면서도 여주인공을 예쁘거나 귀여운 여성이 아닌 뚱뚱한 여성으로 설정하여 로맨틱코미디 장르의 전복을 시도했었습니다. 하지만 [코르셋]은 이혜은의 무매력(그녀는 이 배역을 따내기 위해 일부러 살을 찌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르네 젤위거가 아니었습니다.)으로 관객의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전계수 감독이 희진역으로 유명 여배우를 캐스팅하려고 했던 이유도 바로 그러한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로맨틱코미디 장르의 전복도 배우들의 매력이 뒤따라주지 않는다면 [코르셋]처럼 그냥 독특한 로맨틱코미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수준에 머물게 되는 것이죠.

 

그러한 면에서 공효진의 캐스팅은 정말 절묘했습니다. 그녀는 분명 예쁜 배우도, 귀여운 배우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녀만의 독특한 매력을 분명 지니고 있는 흔치 않은 배우입니다. 

그녀의 매력은 [미쓰 홍당무]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쓰 홍당무] 역시 로맨틱코미디 장르의 영화입니다. 하지만 영화 속의 공효진의 모습은 정말 '못.생.겼.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미쓰 홍당무]를 좋아하는 이유는 못생긴 영화 속 그녀의 모습에서도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러브픽션]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자신의 겨드랑이 털에 당당한 그녀의 모습은 아마 공효진이 아닌 다른 예쁘고, 귀여운 매력을 지닌 유명 여배우가 했다면 오히려 조금 어색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공효진은 희진을 바로 그녀의 매력으로 동화시켰습니다.

요즘 대세 배우인 하정우, 조연으로 깜짝 출연한 지진희, 유인나, 조희봉, 그리고 하정우 내면의 또 다른 목소리 역을 맡은 이병준까지... [러브픽션]은 전계수 감독의 연출력과 멋진 시나리오, 그리고 매력적인 배우들이 만들어낸 정말 새롭고, 재미있는 로맨틱코미디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로맨틱코미디가 꼭 사랑에 대한 완벽한 판타지에 빠져 있어야만 하는 걸까?

이 영화는 그러한 판타지를 깨도 로맨틱코미디는 재미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