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미셸 아자나비슈스
주연 : 장 뒤자르댕, 베레니스 베조
개봉 : 2012년 2월 16일
관람 : 2012년 2월 27일
등급 : 12세 관람가
극장에서 맞이한 [아티스트]의 영광의 순간
미국 현지 시간으로 지난 2월 26일 열린 제 84회 아카데미에서는 흑백 무성영화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담은 프랑스 영화인 [아티스트]가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주요 5개 부문을 휩쓸며 최종 승자가 되었습니다.
아카데미 수상작이 인터넷 뉴스를 통해 속속들이 발표가 되고 있던 지난 2월 27일. 저는 외근을 나가 있었고, 제 스마트폰을 통해 기술 부문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휴고]가 휩쓸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이미 아카데미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골든글로브에서 드라마 부문 작품상은 [디센던트]가 뮤지컬, 코미디 부문 작품상은 [아티스트]가 탔고, 영화 전문가들은 [아티스트]를 이번 아카데미의 가장 유력한 작품상 후보작으로 손꼽았지만 저는 내심 제가 좋아하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휴고]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타기를 바랐습니다.
메릴 스트립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소식을 접한 시각에 저는 외근 업무를 일찍 끝마쳤고, 회사로 복귀하지 않고 곧장 광화문의 예술영화 전용관인 씨네큐브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오랫동안 벼르고 별렀던 [아티스트]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아티스트]가 2월 16일에 개봉했으니 저는 이 영화를 개봉한지 열흘이 넘고 나서야 본 셈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티스트]는 흥행을 위한 상업영화가 아니다보니 저희 집 근처 멀티플렉스에서 상영하지 않거나, 상영한다고 해도 낮 시간대에만 상영해서 저와 시간대가 안맞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제가 [아티스트]를 보기 위해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티스트]는 흑백, 무성영화입니다. 올드영화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은 제게 [아티스트]는 상당히 낯선 영화인 셈입니다. 게다가 최근 몇 년동안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들, 특히 예술지향적 영화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허트 로커]에 별다른 영화적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도 [아티스트] 관람을 자꾸만 뒤로 미룬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2월 27일. 저는 무엇인가에 이끌리듯이 평소에는 가본적이 없는 낯선 예술영화 전용관에 들어섰고, 찰리 채플린의 단편 무성영화 이후 본적이 없는 낯선 무성흑백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앉은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아카데미의 최종 승자는 [아티스트]라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세계 영화팬이 아카데미 영화제의 작품상 수상작 호명을 지켜보고 있었던 그 시각에 바로 그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아티스트]는 극장에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뭔가 대단한 인연같습니다.
넌 무성영화를 본 적이 있니?
제가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이 80년대 후반입니다. 당연히 저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신나는 액션 어드벤처 영화에 열광했고,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묵직한 갱스터 영화에 숨죽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 그 어디에도 무성 혹은 흑백영화는 없었습니다. 가끔 TV에서 명절 특선으로 방영하던 찰리 채플린의 단편 영화들을 의무적으로 본 것이 제가 본 흑백, 무성영화의 전부입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저는 다른 영화광과는 달리 올드영화에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물론 일부러 유명 올드영화들을 찾아서 본 적도 있었지만 그 중에서 제게 영화적 재미를 안겨준 것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 등 몇몇 극소수의 영화들 뿐이었습니다. 제게 있어서 올드영화는 영화광이 되려면 꼭 봐야하는 숙제같은 영화들이었습니다.
그나마 그런 숙제같은 영화들 역시 6,70년대 컬러영화들이었습니다. 몇몇 흑백영화들도 보긴 했지만 드물었고, 무성영화는 더더욱 일부러 찾아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티스트]는 찰리 채플린의 단편영화를 제외하고는 제가 처음으로 본 무성영화이며, 처음으로 극장에서 본 흑백영화입니다. 아마도 올드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저와 사정이 비슷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저는 [아티스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스스로 대단한 영화광이라고 착각하는 제가 아카데미 화제작인 [아티스트]를 본 후 '나도 이 영화를 봤다.'라고 자기만족을 할 수 있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영화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영화를 봤습니다. 그래서 [아티스트]가 무성영화 시절의 할리우드를 배경으로한 흑백영화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영화 자체가 무성영화라는 사실은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무성영화의 형식을 띈 [아티스트]가 당황스러웠습니다. 배우들은 입만 뻥긋거렸고, 사운드의 빈 자리를 음악이 채우고 있더군요. 영화 속의 상황 역시 몇몇 자막으로 제공되는 대사를 제외하고는 배우들의 표정만으로 이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초반 잠시 당황했을 뿐, 일단 무성영화라는 형식에 익숙해지고 나니 금방 [아티스트]가 전해주는 영화적 재미에 푹 빠질 수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스토리 라인 자체가 복잡하지도 않았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장 뒤자르댕과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된 베레니스 베조의 매력도 출중해서 낯선 무성영화였지만 1시간 40분 동안 [아티스트]에 푹 빠져있을 수가 있었습니다.
무성영화의 장점, 유성영화의 장점
앞서 언급했지만 [아티스트]의 스토리 라인은 매우 단순합니다. 유성영화라는 영화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무성영화시절의 스타 조지 발렌타인(장 뒤자르댕)과 유성영화시절의 새로운 스타 페피 밀러(베레니스 베조)의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만약 이 영화가 다른 영화들과 같은 형식을 띄고 있다면 이런 단순한 스토리 라인은 지루함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사 전달이 원할하지 않은 무성영화에서는 오히려 단순한 스토리 라인이 장점이 되더군요.
그리고 또 한가지 무성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무성영화의 장점은 바로 영화에 대한 집중도가 남다르다는 점입니다. 유성영화의 경우는 귀로 영화 속 캐릭터들의 대사가 들리기 때문에 잠시 한 눈을 팔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사를 귀로 들을 수 없는 무성영화에서는 배우들의 표정 하나 하나가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단 한순간이라도 영화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표정 하나, 몸짓, 주변의 상황들 등 무엇하나 놓칠 수가 없었기에 저는 더욱 영화에 집중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영화 속에 빠져 들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단순한 스토리 라인의 영화에 감정을 이입하며 푹 빠질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무성영화의 장점이라고 밖에 설명이 안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영화가 후반부로 진행되면서 약간 지루해지기도 했습니다. 조지 발렌타인의 몰락과 페피 밀러가 새로운 스타로 등극하는 장면 등 [아티스트]는 정해진 길을 따라 일정한 속도로 걷는 사람처럼 지루하게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제 집중력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예상하지 못한 몇 장면이 튀어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유성영화에 대한 강박관념에 빠진 조지 발렌타인의 꿈입니다. 무성영화로 진행되던 영화에서 갑자기 물건을 내려놓는 소리, 전화벨 소리, 여인들의 웃음 소리 등 각종 소리들을 쏟아냅니다. 그러한 가운데 자신만이 아무런 소리를 낼 수 없다는 끔찍한 사실을 알고 비명을 지르는 조지 발렌타인의 모습은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 섬뜩했고, 기발했습니다.
배경음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리도 존재하지 않던 영화에서 갑자기 소리가 튀어나오니 정말 섬뜩하더군요.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들이 소음으로, 혹은 공포의 울부짖음으로 들렸습니다. 무성영화의 지루함을 단 몇 초만에 깨워버린 소리의 위력인 셈이죠.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역시 소리의 위력을 보여줍니다. 조지와 페피가 함께 추는 탭댄스의 흥겨움... 이건 무성영화라면 도저히 느낄 수 있는 유성영화만의 장점일 것입니다. 이렇듯 [아티스트]는 무성영화의 장점을 토대로 유성영화의 장점까지도 맘껏 과시하는 영화였습니다.
형식이 어떻든, 영화이기 때문에 널 사랑한다.
[아티스트]를 보며 저는 조지 발렌타인의 몰락과 페티 밀러의 헌신적인 사랑에 찡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분명 특별한 것이 없는 사랑인데 그들의 사랑이 제 눈시울을 뜨겁게 했던 것은 유성영화가 무성영화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덕분입니다.
분명 영화라는 매체는 변하고 있습니다. [써커펀치]의 영화 이야기에서 밝혔듯이 1895년 12월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처음으로 일반인들에게 상영된 [기차의 도착]이라는 영화는 1902년에는 조르쥬 멜리에스에 의해 [달세계 여행]이라는 극영화로 발전했고, 1927년에는 [재즈 싱어]가 최초로 유성영화 시대를 열었으며, 1935년에는 컬러 영화가 등장했습니다. 이미 제임스 카메론은 3D 영화를 새로운 영화의 미래로 제시했고, 관객 참여형 영화인 인터렉티브 영화도 미래의 영화로 발돋음하고 있습니다. [써커펀치] 역시 영화와 게임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있는 미래형 영화였습니다.
우리는 이렇듯 급변하는 영화의 환경 앞에서 옛 영화들은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3D 영화를 통해 외계 행성에서 생생한 전쟁을 체험하는 요즘, 갑자기 무성흑백영화라니... 이건 제목 그대로 영화가 아닌 그냥 '아트'로 봐줘야했을지도 모릅니다. 처음엔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막상 [아티스트]를 보고나니 제가 영화에 열광했던 것은 급변하는 환경에 발 맞춘 새로운 형식의 영화 때문이 아닌, 영화 그 자체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 영화가 무성영화든, 흑백영화든, 3D영화든, 아니면 우리가 한번도 본 적이 없던 미래형 영화든, 어쩌면 상관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형식이 어떻든 모두 영화라는 큰 테두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저는 그런 영화에 열광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티스트]는 유성영화가 무성영화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입니다. 조지 발렌타인이 있었기에 페피 밀러가 스타가 될 수 있었듯이 무성영화가 있었기에 유성영화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이 영화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에 대한 도전입니다. 모두들 새로운 영화에 매달리는 시점에서 영화의 원류를 찾아 스크린 속에 재현시킨 미셸 아자니비슈스 감독의 도전은 멋집니다.
[아티스트]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모두들 박수를 칠만한 경이로운 영화입니다. 보수적인 아카데미 회원들이 왜 미국영화의 자랑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휴고]를 외면하고 낯선 프랑스인 감독의 영화인 [아티스트]에게 모든 영광을 안겼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보수적이긴 하지만 그들 역시 영화를 사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형식이 어떻든, 영화에 대한 사랑 하나만으로도 열렬히 박수를 쳐주고 싶은 영화... 그것이 바로 [아티스트]라는 영화의 매력입니다.
이 영화를 사랑하는데 있어서 위의 포스터처럼 영화제의 화려한 수상경력은 필요없다.
그저 재미있는, 잘만든 영화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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