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짧은영화평/2011년 아짧평

[래빗 홀] - 우리의 삶 자체가 '래빗 홀'이 아니었을까?

쭈니-1 2011. 12. 28. 10:23

 

 

감독 : 존 카메론 미첼

주연 : 니콜 키드먼, 아론 에크하트, 다이앤 위스트

 

 

판타지의 공간에 숨어버리고 싶었던 순간들

 

20대 중반, 저는 학교 휴학 중에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한 여자 아이를 만났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그래서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들었던 그녀를 위해서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물론 저 역시 그다지 가진 것이 많지 않다보니 많은 것을 해줄 수는 없었지만...

그런데 어느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제 친구와 몰래 사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다른 친구에게 전해 들었을 때 저는 한 밤중에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펑펑 울었습니다. 슬펐고, 창피했으며,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이 모든 감정이 한데 뒤엉켜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그 무엇이 눈물이 되어 쏟아져 내리는데 정말 주체할 수가 없더군요.

그때 저는 남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했고, 혼자가 되면 세상 모든 아픔을 지닌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다가 울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를 배신한 그깟 여자따위 잊어버리면 그만인데 당시에는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더군요. 술도 많이 마시고, 친구들도 안 만났으며, 그렇게 나만의 공간에 꽁꽁 숨어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세상에서 진짜 참기 힘든 슬픔

 

하지만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나니 내 아이를 잃은 아픔과 비교해서 사랑으로 인한 아픔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끔 골목길을 씽씽 달리는 차를 보며 웅이가 저런 차에 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너무 끔찍해서 참을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여기 한 부부가 있습니다. 그들 부부의 일상은 참 단조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8개월전 네살된 어린 아들을 집앞에서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저는 압니다. 그들은 겉으로 괜찮은 척 가면을 쓰고 있지만 내면에서는 참을 수 없는 슬픔에 엉엉 울고 있다는 것을...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는 듯이 보였던 영화는 가끔 베카(니콜 키드먼)와 하위(아론 에크하트)의 감정이 표출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럴때마다 저는 그들의 아픔이 전해져서 함께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아픔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 만의 공간에 숨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으라고 충고하지만 내 아픔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것은 말 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베카가 그러하고, 하위가 그러합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괜찮은 척 하지만 자기 자신만의 공간에 각각 숨어 있으며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래빗 홀은 그들의 안식처가 될수 있을까?

 

베카는 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교통사고를 낸 제이슨(마일스 텔러)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의 대화를 통해 안식을 얻습니다. 어쩌면 베카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픔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아픔을 견뎌내는 방법에 대해서 서로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위는 모임에서 만난 개비(산드라 오)를 만나고 그녀와의 즐거운 시간을 통해 마음의 안식을 얻습니다. 하위와 개비 역시 아픔을 견뎌내는 방법이 서로 비슷한데, 그렇게 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그 아픔을 이겨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의 제목 '래빗 홀'은 제이슨이 그린 만화의 소재인데 평행우주에 빠져있는 제이슨은 어느 구멍을 통해 다른 우주에 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며, 돌발적인 상황으로 어린 아이를 죽인 자신이 처한 현실 속과는 다른 공간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제이슨의 만화에 베카 역시 푹 빠져듭니다. 

어쩌면 그런 현실 외면과도 같은 '래빗 홀'은 베카에게도 하위에게도 그들이 처한 아픔을 견뎌낼 수 있는 진정한 치료제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 진정한 치료제 따위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유일한 치료제는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래빗 홀'이 아닐까?

 

베카와 하위는 마치 괜찮은 척 생활을 할 것입니다. 주위 친구를 초대해서 파티도 열고, 죽은 아들과 같은 또래의 아이들을 봐도 이젠 괜찮은 척 연기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삶을 이어나가야 하니까요.

하지만 아들을 잃은 아픔은 영원히 가슴 속에 남아 그들을 짓누를 것입니다. 베카의 어머니인 냇(다이앤 위스트)이 그랬듯이... 그 아픔의 무게가 달라질지는 몰라도 그 아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어쩌면 우리 모두 베카와 하위처럼 겉으로 괜찮은 척 하며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자 간직한 아픔의 무게는 다르겠지만 그러한 아픔을 영원히 지워버리지 못한채 우린 그냥 그렇게 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현실이라는 '래빗 홀' 속에서 아픔을 숨긴채 괜찮은 척하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자체는 상당히 잔잔하고 니콜 키드만을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는 과하지 않게 절제되면서 마치 내 주위의 사람을 보는 듯한 착각을 느낄 정도로 현실적이었습니다. 이젠 잊었다고 자신했던 20대 시절 실연의 아픔이 다시 깨어나, 그날의 아픔이 잊은 것이 아닌 세월이 지남에 따라 무게가 줄어든 것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될 정도로 [래빗 홀]은 현실적인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