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1년 영화이야기

[마이웨이] - 전쟁이라는 괴물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쭈니-1 2011. 12. 15. 10:33

 

 

감독 : 강제규

주연 : 장동건, 오다기리 조, 김인권, 판빙빙

개봉 : 2011년 12월 22일

관람 : 2011년 12월 13일

등급 : 15세 관람가

 

 

300억 대작 영화의 조급증이 보였던 대규모 시사회

 

드디어 2011년 최고의 화제작이라 할 수 있는 [마이웨이]가 12월 22일로 개봉 일정을 확정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12월 22일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중 최고의 기대작이라 할 수 있는 [미션 임파서블 : 고스트 프로토콜]이 아직 건재한 시기이며, [셜록 홈즈 : 그림자 게임]과 다크호스 [퍼펙트 게임]이 동시에 개봉하는 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이웨이]에게 자꾸만 악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마이웨이]의 일본어 버전 예고편에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해서 논란이 되었고(이 예고편은 일본 배급사에서 제작된 것으로 논란이 된 이후 수정 조치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이 영화의 주연 배우인 오다기리 조가 부산의 한 식당에서 장난 사인을 해준 것이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12월 13일 기자 간담회에서 오다기리 조는 악의는 없었다, 반성한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습니다.)

워낙 덩치가 큰 영화라서 웬만한 흥행 스코어로는 흥행이 성공했다고 자부할 수 없는 [마이웨이]는 이런 일련의 논란이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지난 일요일 블로그 이웃들과의 정모에서 [마이웨이] 시사회에 간다고 자랑을 했더니 블로그 이웃 중 한 분이 [마이웨이]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더군요. 일본과의 관계가 아직은 껄끄러운 상황에서 벌어진 논란들이 [마이웨이]를 비호감 영화로 둔갑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이웨이]가 12월 13일 대규모 시사회와 기자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비록 평일이긴 하지만 8개관을 갖춘 왕십리 CGV에서 무려 5개관이 대관되어 펼쳐진 [마이웨이]의 시사회는 제 경험으로는 단일 시사회로는 최대 규모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날 시사회에는 이벤트를 통해 시사회에 응모하여 참가한 수 많은 영화팬 외에도 영화사의 초대를 받은 파워 블로거, 연예부 기자 등 수백명(약 1천7백석의 시사회 좌석이 꽉 찼었다고 하네요.)이 참가했으며, 그러한 시사회 일정에 맞춰 장동건, 오다기리 조, 판빙빙이 내한하여 그 열기를 더했습니다.

하지만 시사회와 기자 간담회에 참석한 저는 이런 대규모 행사가 [마이웨이]의 일련의 논란에 대한 분위기 전환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물량 공세로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아주 단순한 의도말입니다. 시사회를 통해 직접 영화를 본 저로서는 이런 물량 공세가 조금은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마이웨이]는 우리나라의 전쟁 영화의 질을 한 단계, 아니 단숨에 몇 단계를 끌어올린 [태극기 휘날리며]의 업그레이드 버전입니다. 개인적으로 전쟁 영화를 싫어하는 제가 [태극기 휘날리며]만큼은 좋아했고, 지난 7월에 개봉한 [고지전] 역시 [태극기 휘날리며]가 있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영화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태극기 휘날리며]를 업그레이드한 [마이웨이]는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사의 무리한 물량 공세가 아니더라도 영화의 작품성만으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영화이지만 한.일 관계라는 민감한 논란 속에 불안한 행보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넘어서다.

 

저는 당연하겠지만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한 축복받은 세대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총과 칼을 내밀며 서로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런 끔찍한 현장에 저는 다행히 없었고, 앞으로도 경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이것은 '적을 얼마나 많이 죽였나?'라는 영웅주의적 문제가 아니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칠 애국심에 대한 문제도 아니며, '내 전우의 원수를 갚으리!'라며 분개할 분노에 대한 문제도 아닙니다. 그냥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 행위일 뿐입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의 근대사는 분노와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대한 일본에 대한 분노는 아직도 그 앙금이 남아 있으며, 6.25 전쟁에 대한 아픔과 두려움은 세계 모든 나라들이 폐기처분한 이념에 아직까지 묶여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라는 부끄러운 자화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태극기 휘날리며] 이전 우리나라의 전쟁 영화는 일본 제국주의를 향한, 혹은 북한 공산당을 향한 분노가 가득 넘치는 영웅주의적 영화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국민의 내면 속에 남아 있는 앙금과 분노, 두려움을 영화 속의 영웅들이 총, 칼로 적을 죽임으로서 해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태극기 휘날리며]는 말합니다. 북한과 우리는 한 형제라고... 비록 6.25 전쟁이라는 아픈 근대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그 누구도 원치 않았던 일부 독재자에 의해 자행된 범죄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형제까리 서로 총을 겨누던 진태(장동건)와 진석(원빈)의 비극은 원치 않은 전쟁에 휘말린 사람들의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영웅도, 죽여야할 적도 없었습니다. 그저 시대를 잘못 태어난 불쌍한 사람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대성공을 가두었던 것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그러한 강제규 감독의 이야기에 공감을 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강제규 감독은 가족애를 끌어 들여 북한군에 대한 거부감을 누그러뜨리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마이웨이]는 바로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우리나라와 북한은 어차피 한 민족이고, 언젠가는 통일을 해야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다릅니다. 일본은 우리와 한 민족도 아닐 뿐더러, 일제 시대의 만행으로 인한 앙금은 그렇게 쉽게 지워질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독도 문제등 수 많은 민감한 문제들로 일본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가족애로 관객의 공감을 쌓을 수도 없습니다. [마이웨이]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준식(장동건)과 타츠오(오다기리 조)의 우정만으로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 관객들의 거부감을 누그러뜨릴 수가 없습니다. 결국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쉬운 길을 선택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제규 감독이 선택한 길은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넘어 세계의 근대사로 뛰어 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의 근대사 속에서 조선의 청년도, 일본의 장교도 그저 멋모르고 전쟁의 한가운데 뛰어든 피해자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강제규 감독은 주인공인 준식보다는 타츠오의 캐릭터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고, 그의 캐릭터 변화에 영화의 상당 부분을 할애합니다.

일본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으로 똘똘 뭉친 타츠오가 여러 전쟁을 겪으면서 결국 전쟁의 실상을 깨닫게 되면서 변화하는 모습이 [마이웨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인 것입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그러한 타츠오의 변화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그 순간이 바로 [마이웨이]가 진정으로 성공을 하는 순간일 것입니다.

 

 

[마이웨이]에서 마라톤의 의미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타츠오의 변화를 이해하고,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조선인을 미워하고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 때문에 전쟁을 옹호하던 그를 용서하게 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단순히 참혹한 전쟁을 통해 타츠오가 변했고, 준식과 우정을 쌓았다는 설정만으로는 일본에 대한, 타츠오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누그러뜨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마라톤으로 보입니다.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화합의 장인 올림픽. 그리고 그러한 올림픽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마라톤. [마이웨이]는 준식과 타츠오를 마라톤이라는 스포츠로 하나로 엮어 놓은 것입니다.

[마이웨이]에서 마라톤은 참 폭 넓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준식의 캐릭터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도 마라톤이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국가와 이념을 넘어 준식과 타츠오가 서로를 이해하고 우정을 쌓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함과 동시에 서로 간의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며, 세계2차대전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원치않던 머나먼 길을 떠났던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으로 대변되기도 합니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대회에서 대한민국의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차지하는 기적이 연출됩니다. 하지만 이미 우리나라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후였고, 손기정 선수의 모든 영광은 조선이 아닌 일본에게 수여되었습니다. 우리나라로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의 역사인 셈이죠.

그런 치욕의 역사는 [마이웨이]의 초반부에 그려집니다. 일본의 명문가 출신인 타츠오와는 달리 인력거를 끌며 몸을 단련한 준식. 손기정은 준식에게 꿈을 잃지 말라고 조언하고 결국 올림픽 출전권을 두고 준식과 타츠오는 숙명적인 대결을 펼칩니다. 이 경기에서 준식은 타츠오에 승리를 거두지만 준식은 실격 처리가 되고 우승은 타츠오에게로 돌아갑니다. [마이웨이]는 마라톤을 통해 일제시대의 우리 국민들이 당했을 치욕을 이렇게 그려낸 것입니다.

 

[마이웨이]의 그 끔찍한 전쟁통 속에서 준식은 마라톤의 꿈을 잃지 않습니다. 그런 그의 강인함은 준식이라는 캐릭터의 성격을 묘사합니다. 강제규 감독은 억지로 전쟁에 끌려나온 준식이 꿈을 잃지 않는 장면으로 준식의 캐릭터를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한 마라톤은 후반부에는 준식과 타츠오를 서로 연결시켜 줍니다. 라이벌이었고, 서로의 적이었던 두 사람은 의도하지 않았던 소련군이 되고, 다시 독일군이 되면서 서로에게 의지하고 친구가 됩니다. 이제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단 하나의 목표가 된 그들에게 한.일 관계의 불편함, 일제의 치욕은 더이상 벽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관계는 또 다시 달리기로 표현됩니다.

[마이웨이]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 장면인 노르망디 해변에서 독일 병사들의 축구 장면. 축구공을 잡기 위해 서로 경쟁하듯이 뛰는 준식과 티츠오의 그 해맑은 웃음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렇기에 가장 안타까운 장면이 될 것입니다.

마라톤은 모두들 아시겠지만 고대 그리스 병사가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그리스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약 40km를 달려 '우리가 이겼노라'라는 승전보를 알리고 쓰러져 죽었다는 일화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는 승전보를 들고 고향으로,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 험난한 여정 속에서 아마 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태운 것이죠.

[마이웨이]에서 준식과 타츠오의 이야기는 그러한 마라톤의 유래와 비슷합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너무 먼 곳까지 가게된 그들은 쉬지 않고 달립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지막 노르망디에서의 살기 위해 달리는 장면은 자신의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모두 태워버렸던 무명의 그리스 병사처럼, 준식과 티츠오를 바라보는 제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마이웨이]는 마라톤을 영화의 전체를 걸쳐 폭넓게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적은 전쟁 그 자체였을 뿐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강제규 감독은 우리의 적은 북한도, 공산당도 아닌 전쟁 그 자체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이웨이]에서도 그러한 그의 주제의식은 유효한데 서로 원수일 수 밖에 없었던 준식과 타츠오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의지하면서 적이 아닌 친구가 됩니다.

일본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으로 전쟁광이 된 타츠오가 변하게 된 계기로 보여준 소련 장교의 광기와 타츠오의 과거의 광기가 겹쳐지는 모습에서 그러한 강제규 감독의 주제가 잘 표현됩니다. 전쟁을 위해서라면 아군에게도 총을 겨누고 죽이던 그들의 모습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전쟁에 먹혀버린 괴물이었던 것이죠. 

여기에서 전쟁에 먹혀버린 괴물 연기를 했던 또 한명의 주요 캐릭터가 있으니 바로 종대(김인권)입니다. 준식의 둘도 없는 친구인 그는 그 누구보다도 순수했던 인물입니다. 자신의 신념에 흔들림이 없는 준식과는 달리 살기 위해서라면 비굴함도 감수할 수 있는 인간적인 캐릭터였습니다. 하지만 소련군의 포로 수용소에서 완장을 찬 그의 모습에서 더 이상 인간미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남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 그는 친구도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 있는 전쟁에 먹혀버린 괴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소련의 포로 수용소 이전에 타츠오가 했던 그 잔인했던 행동들을 준식의 절친한 친구인 종대가 하고 있는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것은 주인공이 준식에게 적은 일본인 타츠오가 아닌 바로 전쟁 그 자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이웨이]에도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연으로 홍보가 된 중국인 여성 저격수(판빙빙)의 비중이 너무 작았습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동양인을 그리는 과정에서 한.중.일 모두의 캐릭터를 잡고 싶었던 강제규 감독의 의중은 이해가 되지만 굳이 준식과 타츠오의 사이에 중국인 저격수가 끼어 있을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게다가 여성 저격수라면 이미 [고지전]에서 사용한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우리 영화 사상 최고의 특수효과를 선보이긴 했지만 가끔 어색한 특수효과 장면도 눈에 띄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장면이 몽골의  노몬한 전투 중 소련군의 기습 공격 장면에서 준식과 티츠오가 폭발에 함께 두 몸이 하늘 위로 치솟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장면은 CG처리한 것이 확연하게 눈에 띄었는데 다른 전쟁씬의 완벽한 퀼리티와 너무 비교가 되던 옥의 티와도 같은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요 캐릭터들이 죽으면서 자기 할말을 다하는 장면 역시 조금은 어이가 없었는데, 그렇게 죽으면서 '내 가족을 부탁하네.'식의 장면은 예전 '배달의 기수'에서나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할 뿐, 요즘과 같은 시대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촌스러움입니다. 한 명도 아니고 주요 캐릭터들이 죽으면서 모두들 할 말을 다하고 죽더군요. [마이웨이]의 감동을 증폭시키려는 강제규 감독의 과욕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마이웨이]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일단 눈을 의심하게 할만한 전쟁씬의 스펙타클은 300억원이라는 제작비가 결코 적은 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 돈으로 어떻게 저런 장면을 찍었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대한 강제규 감독의 주제의식은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그랬듯이 [마이웨이]에서도 제게 가슴 속 깊이 전달되었습니다. 

이제 [마이웨이]는 조만간 관객의 선택을 기다릴 것입니다. 하지만 [마이웨이]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과연 [마이웨이]가 그 수 많은 악재 속에서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우리나라의 전쟁 영화에 큰 획을 그을 수 있을까요? 이제 모든 것은 여러분의 손에 달렸습니다. 

 

 

   나는 서로가 죽여야 살 수 있는 광기에 휩싸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

과연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전쟁이라는 괴물에 먹히지 않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전쟁이라는 괴물이 우리 인간사에 다시 끼어들지 못하도록 해야한다.

그것이 우리가 자손들에게 남겨줘야할 진정한 유산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