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연상호
더빙 : 양익준, 오정세, 김혜나, 박희본, 김꽃비
개봉 : 2011년 11월 3일
관람 : 2011년 11월 16일
등급 : 18세 이상
머리가 아팠다.
11월 16일... 오랜만에 하루 연차 휴가를 내고 저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평소보다 늦지막하게 일어나 여유롭게 [티끌모아 로맨스]를 보며 맘껏 웃었고, [특수사건전담반 TEN]의 제작발표회에서 아름다운 조안의 미모에 흠뻑 빠졌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했습니다. 상암 월드컵 경기장 건물 내에 있는 홈플러스에 가서 그 동안 마시지 못했던 비싼 세계 맥주를 사서 공원에 앉아 맥주를 들이키며 저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느끼지 못했던 자유를 맘껏 만끽했습니다. [돼지의 왕]을 보기 전까지 말입니다.
상암 CGV에는 무비꼴라쥬 상영관이 있습니다. 다른 상영관에서는 보기 힘든 작은 영화, 혹은 예술 영화을 상영합니다. [특수사건전담반 TEN]의 제작 발표회가 끝나고 이대로 집에 가기 아쉬웠던 저는 무비꼴라쥬에서 상영하는 [돼지의 왕]을 발견했고, 집 근처 멀티플렉스인 목동 CGV, 목동 메가박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돼지의 왕]이 반가워 덜컥 표를 끊고 말았습니다. 아마 그때 부터였을 겁니다. 제게 두통이 찾아온 것은...
영화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저는 [돼지의 왕]을 보는 내내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처음엔 대낮부터 마셨던 그 비싼 세계 맥주 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두통은 영화를 본 후 집에 들어와서도 계속 되었고, 결국 그날 저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씻지도 못하고 곧바로 침대에 들어가 깊은 잠에 빠져 버렸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도 두통이 계속되어 감기몸살이 걸린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결국 두통은 [돼지의 왕]을 본 후 딱 24시간 만에 멈췄습니다.
물론 그 두통이 온전히 [돼지의 왕]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분명 대낮부터 마셨던 맥주 탓도 있었을 것이고, 쌀쌀한 날씨에 따스한 회사 안이 아닌 월드컵 공원에서 어슬렁거렸기 때문에 감기몸살 기운이 약간 있었던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두통의 원인은 여러가지라고 할 수 있어도, 그러한 두통을 촉진시킨 것은 [돼지의 왕]이 분명해 보입니다. 제겐 잊혀졌던, 아니 잊고 싶었던 학창 시절과 군대 시절, 그 폭력의 역사가 나의 머리 속 깊은 곳에서 스물 스물 올라오며 절 괴롭혔던 것입니다.
학창 시절... 나도 돼지였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1학기까지 경기도 남양주군(지금은 거의 서울화되었지만 제가 학교 다닐때만 해도 논밭이 있었던...)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께서 양복점을 접으시면서 서울로 이사를 왔는데, 친구 한 명 없는 서울 생활이 참 낯설었습니다.
그렇게 중학교에 진학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친구가 없었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활발하게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도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교 내의 일진에게 표적이 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제게도 무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공부 잘 하게 생긴 외모였습니다.(실제로 잘 하지는 못했습니다. 딱 중간이었습니다.) 싸움 잘 하는 아이들도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은 잘 건드리지 않죠.(공부 잘 하는 아이들의 경우는 선생님의 비호를 받거든요.) 대신 저는 시험 시간에 싸움 잘 하는 녀석에게 제 답안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들의 괴롭힘을 면했습니다.
쉬는 시간이면 싸움 잘 하는 녀석들은 교실에서 농구공을 가지고 놀았는데, 농구공으로 아이들을 맞히는 놀이였습니다. 그 녀석들의 농구공을 맞으면 공식적으로 괴롭힘 당해도 되는 표적이 되기 때문에 쉬는 시간이 되면 저는 바짝 긴장을 하곤 했습니다. 녀석들이 제게 농구공을 던질까봐 말입니다.
아마 딱 한번 농구공에 맞은 기억이 납니다. 농구공이 저 머리 위로 날아오는 그 순간의 공포를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그것은 농구공에 맞아 아플까봐 두려웠던 것이 아닌 나도 이제 괴롭힘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녀석들의 낄낄거리는 웃음 소리와 함께 마치 슬로우 비디오로 날아오는 딱딱한 농구공. 제 중학교 시절은 그랬습니다.
[돼지의 왕]은 아내를 죽인 황경민(오정세)이 중학교 시절 친구였던 정종석(양익준)을 찾아가며 시작합니다. 그들은 삼겹살에 소주를 기울이며 중학교 시절을 회상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회상에는 아름다운 추억 따위는 없습니다. 돼지일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슬프고 아픈 기억만이 공존할 뿐이었습니다.
더이상 잔인할 수는 없다.
[돼지의 왕]은 경민이 살해한 아내의 시체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이 영화가 잔인하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래봤자 애니메이션인데... 라고 생각했던 제게 처음부터 잔인한 장면으로 뒷통수를 칩니다.
하지만 이 첫 장면의 잔인함은 뒷 부분의 잔인함과 비교해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영화는 경민과 종석이 만나고, 함께 과거를 회상하며 점점 잔인함의 끝으로 내닫습니다.
그 잔인함 속에는 사지절단도 없고, 피가 난무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어린 아이들의 폭력만이 있을 뿐입니다. 권력과 힘을 가진 녀석들. 그들 앞에서 무기력했던 힘없는 돼지들. 온갖 폭력을 당하면서도 찍 소리도 할 수 없었던 그들. 녀석들에게 반항하면 할수록 오히려 조여오는 절망의 늪. 그 현장을 확인하는 그 순간 저는 그 어떤 영화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잔인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기에 '돼지의 왕'이었던 김철(김혜나)의 반란을 마음 속으로 응원했는지도 모릅니다. 녀석들에게 당하는 경민과 종석을 멋지게 구해주는 김철. 경민과 종석이 그러했듯이 저 역시 김철이 녀석들을 멋지게 뭉개뜨리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연상호 감독은 제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습니다. 김철이 '돼지의 왕'이 되어 녀석들에게 반항하는 그 순간부터 김철은 끊임없이 추락합니다. 게다가 그 추락의 뒤에는 김철을 '돼지의 왕'으로 추대했던 종석과 경민이 있었음이 밝혀집니다. 그 순간 제가 느낀 감정은 나 역시 종석, 경민과 같은 마음이었다는 무시무시한 진실이었습니다.
스스로 녀석들에게 대항할 용기가 없으면서, 누군가 나서서 녀석들을 혼내주길 바라는 돼지의 나약한 마음. 그렇게 왕으로 추대하고 그 왕이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생각. 우리가 돼지 일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폭력은 대물림된다. 자신보다 나약한 존재에게...
그렇게 녀석들의 폭력 속에서 괴롭힘을 당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던 경민과 종석. 과연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화의 초반 경민은 자신의 아내를 죽입니다. 종석은 자신의 애인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합니다. 그들에게도 폭력은 대물림된 것입니다. 문제는 그 대물림이 강한 자에 대한 반항이 아닌 오히려 자신보다 약한 자에 대한 폭력이라는 점입니다. 폭력이라는 녀석은 그렇습니다. 강한 놈한테는 약하고 약한 놈에게는 강한 법이죠.
남성이라면 모두들 군대에서 폭력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전 동사무소 방위를 나왔습니다. 현역에 비한다면 편해도 굉장히 편한 군 생활(아니 어쩌면 군 생활이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출퇴근했으니까요.)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동대본부에는 아버지가 안기부 실세였다가 비리 혐의로 쫓겨난 것을 자랑하는 똘아이 선임병이 있었습니다. 다른 동대본부는 널널했는데 저희 동대본부는 그 똘아이 때문에 하루가 멀다하고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그 똘아이의 폭력을 그토록 경멸했던 제가 어느 순간 제 후임병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있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욱 무서운 것은 그렇게 폭력을 행사하면서 저는 쾌감을 느끼고 있더라는 겁니다. 뭔가 강한 존재가 된 것 같은 쾌감 말입니다.
어느 순간 그러한 제 자신을 발견하고 저는 당황했습니다. 폭력이라는 녀석은 제 자신도 모르게 제게 스며들어 절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돼지의 왕]은 학창 시절부터 이어온 계급의 현실과 그렇게 무감각하게 받아들여진 폭력이 어떻게 대물림되어 우리 사회를 망가뜨리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제가 동대본부에서 그랬던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저는 그렇게 대물림된 폭력을 동대본부 생활 이후 단 한번도 밖으로 표출하지 않았습니다. 이성으로 억누르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걱정이 됩니다. 웅이도 어쩌면 저와 비슷한 과정을 거치게 될텐데... 이 돼지의 역사가 더이상 우리 아이들에게 폭력의 대물림으로 되돌아가서는 안되는데... 과연 우리 사회가 이런 돼지의 외침에 귀를 기울일까요? 지금은 그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이러한 돼지의 역사를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은 돼지들 밖에 없다.
과연 개들이 돼지의 외침에 귀를 기울일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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