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정환
주연 : 한예슬, 송중기
개봉 : 2011년 11월 10일
관람 : 2011년 11월 16일
등급 : 15세 관람가
IMF세대였던 나는...
1998년 저는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대학 성적도 나름 좋은 편이었고, 제가 졸업한 학과가 취업률도 높은 곳이라서 저는 졸업과 함께 자연스럽게 취업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그래서 자동세차장 점장 자리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1998년에는 IMF 한파가 몰아닥친 불운의 해였고, 과 사무실의 직원 모집 공고는 이미 씨가 말라 있었으며, 일찌감치 취업을 했던 동기들 마저도 몇 달 일하지도 못한채 정리해고를 당했다며 학교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졸업을 앞둔 저로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선배들은 졸업과 동시에 교수 추천으로 앞 다퉈 취업을 나갔지만 IMF 세대인 저는 졸업과 동시에 취업이 아닌 당장 용돈이라도 벌기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청년 취업자 대책이라고 정부에서 내세운 것은 정보근로화 사업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업이 되지 않은 청년 실업자들과 IMF로 인하여 기업에서 정리해고된 중년 실업자들이 조그마한 사무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정보근로화 사업이라는 근사한 미명아래 잡일을 하고 월 50만원이라는 용돈을 벌었습니다. 저 역시 그 중 하나였고, 거의 1년 정도 그 짓을 했습니다.
저와 함께 정보화근로사업을 했던 많은 동기들은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었습니다. 비싼 대학 등록금을 내고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을 했는데 한달 용돈도 안되는 50만원을 벌면서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잡일을 하고 있었으니 자괴감에 빠질 수 밖에 없었죠.
게다가 정보근로화 사업은 무기한으로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할 수 있는 기한이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정보근로화 사업을 관두게 되면 마땅히 취업할 곳이 없는 사람들은 항상 불안감을 느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저는 낙관적인 성격이었다는 점입니다. 함께 정보근로화 사업을 하던 후배가 제게 죽고 싶다고 하소연을 할때 저는 그 후배에게 '주위를 둘러봐라.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도 저렇게 수두룩한데... 우린 그나마 행복한거다. 게다가 우린 아직 젊잖아.'라고 충고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거리엔 집을 잃고 거리에서 자는 노숙자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있었고, 아직 부모님이 건재하셨고, 비디오 대여점에서 영화 한편 볼 수 있는 단 돈 1천5백원이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시절의 기억이 추억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아프고 막막했지만 지금 뒤돌아보면 그것도 모두 제 경험이 되었고,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토대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건 희망은 있습니다. 아직 젊으니까요.
천지웅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하다.
주말을 반납하고 일을 해서인지 몸도, 마음도 지쳐있던 저는 하루 휴가를 내고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첫번째가 바로 [티끌모아 로맨스]를 관람하는 것이었는데, 개봉 전부터 왠지 이 영화에 끌렸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너는 펫]의 예매권을 선물 받는 바람에 [티끌모아 로맨스]의 관람은 뒤로 밀린 것이죠.
영화는 소위 말하는 88만원 세대의 모습을 아주 짧게 보여줍니다. 집안이 부자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스펙이 좋은 것도 아닌 평균치보다 떨어지는 청년 백수 천지웅. 그가 취업 박람회에서 취업을 하기 위해 면접을 보는 그 짧은 장면만으로 [티끌모아 로맨스]는 88만원 세대의 취업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88만원 세대의 취업난 장면이 너무 짧아 '이게 왜 88만원 세대를 소재로한 영화인지 모르겠다'라고 항변하는 분도 계십니다. 이 영화는 취업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요즘 젊은 세대의 아픔을 담고 있지만 김정환 감독은 그러한 장면을 구구절절하게 늘어 놓기 보다는 '모두들 알고 있지? 요즘 취업난에 대해서는...'이라며 아예 생략해 버리는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김정환 감독의 화법이 제겐 더욱 마음에 와닿은 것입니다.
실제로 천지웅은 IMF시절 저와 너무나도 닮았습니다.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그는 그렇다고 구홍실(한예슬)처럼 치열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뜰텐데, 뭐하러 고민을 해'라며 좋게 포장하면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정보근로화 사업을 하며 취업을 하기 위해 치열하게 달려들지 않았고, 50만원이라는 돈도 저축해서 후일을 도모하기 보다는 당장 놀고 즐기는데 써버렸습니다.
한심하다고요? 글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젊음입니다. 미래를 지나치게 걱정하며 오늘을 즐기지 못한다면 결국 구홍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천지웅은 구홍실에게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해야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구홍실은 해야할 일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캐릭터이고, 천지웅은 하고 싶은 일에 집착하는 캐릭터입니다.
물론 이 둘을 적당히 섞는다면 이상적인 캐릭터가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가 천지웅이라고 해도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저는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젊으니까요. 젊었을 때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다면 나이가 들어서는 점점 그 하고 싶은 일은 불가능해집니다. 제가 IMF 시절 저를 지금 추억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당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 암흑의 시절을 즐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약 그러한 상황에 처했다면 저는 즐길 수 없었겠죠. 이제 저는 젊지 않기 때문입니다.
획기적인 사업 아이템들에 미소짓다.
[티끌모아 로맨스]는 기본적으로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젊은 이들을 소재로 하고는 있지만 그러한 상황을 그리는 방법은 유쾌함입니다.
특히 천지웅과 구홍실이 돈을 버는 장면들은 제게 많은 웃음을 안겨 줬는데 대학을 나왔으니 멋진 사무실에서 폼나게 일하고 싶은 욕망에 대해서 [티끌모아 로맨스]는 그런 가식을 버리라며, 세상은 넓고 돈 벌 방법은 많다고 그러한 방법들을 유쾌하게 배치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러한 장면들이 그저 웃기게만 보이는 것이 아닌 이유는 꽤 현실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식당마다 걸려 있는 TV 맛집 출연 장면 판넬들과 연예인들의 사인을 보며 '저건 진짜일까?'라고 의심을 한 적이 있었고, 결혼식장에서 하객이 부족하다며 신부 친구 사진 찍을 때 좀 나와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으며, 인사동의 어느 가게에서 옛날 물건이라며 전시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보기엔 쓰레기일수도 있는 것들이 다른 사람에겐 전시품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던 제게 구홍실과 천지웅이 돈을 버는 장면들은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라며 무릎을 치게 만듭니다.
김정환 감독은 그러한 장면들 사이에서 천지웅과 구홍실이 서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에피소드를 배치했는데, 신인 감독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꽤 섬세했고, 노련했습니다.
여기에서 같은 날 개봉한 [너는 펫]과 비교를 해보면, 제 개인적으로는 [티끌모아 로맨스]의 완승입니다.
일단 [너는 펫]은 캐릭터가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럭셔리한 직업과 생활 공간을 가지고 있고, 일반인은 꿈도 꿀 수 없는 인간 펫이라는 새로운 사랑법을 제시했습니다. 뭐랄까 나와는 다른 세상의 사랑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티끌모아 로맨스]는 제 젊은 시절의 이야기였고, 요즘 세대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영화인 탓에 과장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러한 과장법은 영화에 대한 공감을 해치지 않을 정도의 수준일 뿐입니다.
배우들의 매력에서도 [너는 펫]이 장근석의 원맨쇼라면 [티끌모아 로맨스]는 송중기와 한예슬이 함께 매력을 발산하며 시너지 효과를 증폭시켰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감동 면에서도 로맨틱 코미디의 뻔한 결말을 준비했던 [너는 펫]보다는,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옛말이 떠오를 정도로 현명했던 천지웅의 선택에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청춘이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
뒤돌아보면 IMF 시절, 제게도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 처지 때문에 그 찬란한 젊은 시절 연애한번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티끌모아 로맨스]에서 구홍실도 이야기했지만 사랑에는 돈이 드는 법입니다. 혼자라면 얼마든지 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거리도 연인과 함께라면 자가용은 못태워 주더라도 택시 정도는 태워주고 싶은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며, 아무리 주머니가 비었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고가의 선물을 해주고 싶어집니다.
정보근로화 사업을 하면서 저도 사랑 고백을 받았습니다.(제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아본 사랑 고백이었습니다.) 함께 정보근로화 사업에 참여했던 학교 여후배였는데, 둘 다 주머니가 비었다보니 제대로된 연애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함께 영화를 보고 싶어도 극장비가 없었고, 맛난 것을 먹고 싶어도 지갑엔 라면값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사고로 손을 다치는 바람에 정보근로화 사업을 관두게 되었고 그마나 용돈마저 없어지자 저는 결국 그 후배에게 이별을 고하였습니다.(제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상대에게 먼저 이별을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내 처지에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한 것이죠.
사랑하는 남자 앞에 주저하는 구홍실의 모습을 보며 '내가 저랬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 혼자라면 당시 내 처지가 하나도 부끄럽지 않고 당당했지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너무 창피했고, 내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지 않으며 무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저는 천지웅이 부러웠습니다. 비록 천지웅은 88만원 세대의 아픔 속에서 좌절을 맛보고 있었지만, 그는 당당하게 사랑했습니다. 물론 취업했다고 거짓말도 하고 50원이 모자라 결정적인 순간 고개를 떨구었지만 그런 그의 모습에서 청춘만이 가질 수 있는 풋풋함이 느껴졌습니다.
[티끌모아 로맨스]는 해피엔딩입니다. 물론 그 둘은 가진 돈을 모두 잃었지만 그것은 그 둘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 되었을 것이며, 이제 그 둘은 당당하게 사랑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하게 된 구홍실은 해야할 일 속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될 것이며, 천지웅은 하고 싶은 일 속에서 해야할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니까요. IMF 시절 비디오 대여로만 있으면 아무 것도 부럽지 않던 제가 사랑을 하면서 취업을 하고 지금은 어엿한 한 가정의 가장인 된 것처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금 다시 IMF 시절로 돌아간다면 당시처럼 난 즐길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든 것은 내가 역시 늙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대들이여, 뭐가 두려운가? 그대들은 내가 가지지 못한 젊음을 가지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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