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정용기
주연 : 김주혁, 이윤지, 이시영, 오정세, 공형진
개봉 : 2011년 11월 2일
관람 : 2011년 11월 3일
등급 : 15세 이상
인연은 없다? 아니, 있다.
지금 현재 솔로라서 벌써부터 추운 겨울을 혼자 보낼 것을 걱정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그렇다면 잠시 제 이야기를 들려 드리죠. 제 이야기에 분명 희망을 얻으실것이라 확신합니다.
저는 상당히 내성적인 성격 탓에 그 찬란한 20대를 짝사랑 몇 번으로 보낸 모태 솔로였습니다. 그러다가 20대 후반에 정말 용기를 내서 함께 일하던 한 살 연상의 여성에게 장난 반, 진담 반(실패할 경우 장난이었어 라고 무마할 요량으로...)으로 고백을 했는데 운좋게 통해서 첫 연애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2년 간의 연애는 제 무능력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그녀는 제게 달랑 핸드폰 문자 메시지 하나로 이별을 통보하고 제 앞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렇게 1년간을 저는 찌질한 실연남으로 보냈고, 2002년 한일 월드컵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다니던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하는 최악의 경우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제 인연은 바로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회사는 짤렸고, 모아둔 돈은 없고, 취직은 안되고(아니 할 의욕이 없고), 집에서 빈둥대던 저는 학교 후배의 권유로 인터넷 산악 카페에 가입을 하였습니다. 그 전까지 제 취미는 오로지 영화 보기와 영화 리뷰 쓰기였습니다. 한마디로 움직이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제가 선뜻 산악 카페를 가입했다는 자체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뭔가에 홀린 듯이 가입했고 영화 보기를 뒤로 미룰 정도로 열심히 참가도 했습니다.
산악 카페 가입 후 두번째 산행에서 구피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구피 역시 그 카페에 가입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 다른 카페에 가입하려다가 실수로 가입하게 된 것이었죠. 그렇게 우린 만났고, 또다시 여러 우연이 겹치며 연인이 되었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 하나 따지고 보면 이건 운명적인 인연으로 밖에 설명이 안됩니다. 누군가가 정교하게 짜놓은 계획에 맞춰 우린 만났고, 그 이후에도 무슨 운명처럼 우리의 인연은 서로 끊기지 않고 연결되어 짧은 시간 안에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까요. 구피는 당시만 생각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미쳤지. 어쩌다가 백수한테 엮여서...'
이것이 제가 말하고 싶은 인연입니다. 20대 때 저는 [로미오와 줄리엣]같은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운명같은 사랑을 믿고 기다리는 순진한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은 운명적인 사랑 따위는 안 믿습니다. 제 첫번째 실연을 통해 저는 사랑은 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처럼 저도 그녀에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항변했지만 나중엔 인정했습니다. 사랑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인연은 믿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딘가에는 나와 운명의 끈이 연결된 그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제겐 그것이 구피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분명 이 세상 그 어딘가에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도 예기치 않은 순간 '짠!'하고 나타나기 위해서...
로맨틱 코미디를 구피와 극장에서 보다.
남자인 저는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지만 여자인 구피는 로맨틱 코미디를 극장에서 즐기는 것은 시간 낭비, 돈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커플즈]의 개봉 소식을 들은 저는 구피에게 '가을인데 나도 극장에서 로맨틱 코미디를 보고 싶어!'라고 주장했고, 구피는 역시나 '혼자 보러가!'라며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연인들이 득실대는 극장에서 혼자 로맨틱 코미디 보긴 싫어. 내가 홀아비도 아니고.'라며 항변했고, 결국 '피곤해, 졸리워~'라며 투덜거리는 구피를 끌고 극장으로 향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사실 저는 [커플즈]에 많은 것을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싱글즈]처럼 달콤한 로맨스와 코믹한 장면으로 가을 남자(?)인 제 가슴을 촉촉히 적셔 주기만을 기대한 것이죠.(흠! 다시 생각해보니 제가 [커플즈]에 많은 것을 원한 것 같긴 합니다. ^^)
영화가 시작되고 유석(김주혁)의 사연이 소개됩니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나리(이시영)와의 사랑. 하지만 나리는 문자 메시지 하나만 찍 날리고 사라집니다.(이 부분에서 잊혀졌던 상처가 욱신 욱신... 여자들이여! 이별 통보를 제발 문자 메시지로 하지는 맙시다.)
이유도 모르는채 실연을 당한 유석은 나리를 찾아 헤맵니다. 그러다가 최악의 하루를 맞이하게 되고 그러한 가운데 애연(이윤지)과 만나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유석과 애연이 만나는 장면을 보며 너무 우연이 지나치다고 하실지도 모르겠네요. 맞습니다. 유석과 애연의 만남은 모두 우연입니다. 하필 유석과 애연이 간 은행에 강도가 든 사건도 우연이고, 유석이 그 와중에도 치한으로 몰리는 것도 우연이고, 나중에 막걸리집에서 마주치는 것도 우연이며, 하필 서로 술값을 지불할 돈이 없는 것도 우연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우연들이 겹쳐지며 인연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구피가 그랬듯이 말이죠.
제게 문제는 우연의 남발에 의한 인연이 아닙니다. 유석과 애연의 만남이 제게 아무런 감흥을 안겨주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유석과 애연의 만남은 뭔가 부족한 밍숭맹숭한 음식 같았습니다. 게다가 영화의 마지막에나 있을 법한 유석의 용기있는 고백이 영화의 거의 초반에 이루어지며 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를 도대체 어떻게 끌고 가려고 이러는거지? 저는 영화의 초반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가기 싫다는 구피를 억지로 극장에 끌고 왔으니 그만큼 영화는 재미있고, 로맨틱해야 하지만 유석과 애연의 사랑은 그런 제 기대를 채우기에 상당히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돈가방을 든 연인들.
하지만 제 당혹스러움은 영화의 중반이 되면 될수록 점점 커져 갔습니다. 유석과 애연의 이야기가 잠시 막을 내리고 유석의 부탁으로 나리를 찾아 그 뒤를 쫓던 복남(오정세)의 이야기가 펼쳐지며 저는 '아차!'싶어졌습니다.
그것은 이 영화가 뜬금없이 조폭 코미디로 흘러갔기 때문입니다. 나리가 사실 꽃뱀이었고, 그러한 나리의 새로운 상대가 흉악스러운 조폭 병찬(공형진)입니다. 게다가 나리는 병찬의 돈가방을 훔치며 사건을 크게 벌여 놓습니다.
이건 로맨틱 코미디를 보러 왔는데 조폭 코미디가 펼쳐지는 지극히 황당스러운 일이 제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조연배우 오정세의 맛깔스러운 연기도, 이시영 특유의 유별난 연기도 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정용기 감독에 대한 원망만 들었습니다.
정용기 감독은 소위 말하는 가문 시리즈인 [가문의 위기], [가문의 부활]로 유명해진 감독입니다. 지난 추석 시즌에 4편인 [가문의 수난]이 개봉되며 조폭 코미디의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는 가문 시리즈는 하지만 저질 조폭 코미디라는 비난을 항상 감수해야 합니다. 다시말해 가문 시리즈를 맡은 감독은 흥행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얻을 수 있지만 저질 조폭 코미디 감독이라는 오명도 써야 하는 셈이죠.
정용기 감독이 바로 그런 케이스입니다. 사실 제가 정용기 감독을 처음 발견한 것은 [인형사]라는 공포 영화였습니다. 2004년 당시 그래도 여름 시즌이면 극장에서 공포 영화를 최소한 한 두편 정도는 봐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제게 [인형사]는 꽤 감각적이고 멋진 공포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인형사]는 흥행에 실패했고 정용기 감독은 가문 시리즈로 흥행 감독이 되었습니다. 이후 [원스어폰어타임], [홍길동의 후예] 등 꽤 괜찮은 코미디 영화를 연출했지만 조폭 코미디 감독이라는 오명이 제 뇌리엔 깊숙히 박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중반 부분은 저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아! 내가 속았구나. 난 [싱글즈]와 같은 로맨틱 코미디를 원했는데, [커플즈]는 로맨틱 코미디의 탈을 쓴 조폭 코미디였구나.'라고 생각한 것이죠. 정용기 감독으로서는 억울하겠지만 정용기 감독에 대한 선입견이 이런 섣부른 판단의 원흉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섣부르게 판단을 하고 오해를 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커플즈]는 조폭 코미디도 아닐 뿐더러 밍숭맹숭한 로맨틱 영화도 아니었습니다. [커플즈]의 진정한 재미는 '내가 속았구나!'라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부터 새롭게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놀랍도록 치밀한 인연의 재구성
참 멀리도 돌아왔습니다. 제 글을 읽고 있는 분들도 '뭐야, 이 영화가 재미없단 이야기네.'라고 섣부르게 판단하셨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런 섣부른 판단을 잠시 유보해 두시기 바랍니다. 제가 [커플즈]의 후반부를 보며 제 섣부른 판단을 반성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커플즈]는 유석과 애연의 밍숭맹숭한 사랑 이야기로 시작하여, 나리, 복남, 병찬이 서로 얼킨 조폭 코미디로 끌고 가더니, 결국에는 인연에 대한 거대한 퍼즐을 마무리짓습니다.
마치 각각의 에피소드처럼 구성된 이 영화의 이야기는 하나 하나 따로 놓고 보면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인데, 그러한 이야기들을 모두 모아 퍼즐을 맞추고 보면 '와우! 굉장한데.'라는 찬사가 나올 법합니다. 정용기 감독이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독특한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같은 사건이 영화 내에서 몇 번이나 반복됩니다. 그렇게 영화의 사건이 반복되면서 그로인한 새로운 인연들이 드러납니다. 처음엔 별 감흥없이 봤던 장면들이 계속 반복되고 새로운 인연을 드러내는 그 순간 저는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자신들의 인연을 이야기하는 여러 커플들의 이야기가 하나로 뭉쳐지는 순간 느껴지던 그 전율을 저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연이라고 치부했던 그 수 많은 순간들을 인연으로 승화시키며 '당신에게도 인연이 올겁니다.'라고 달콤하게 속삭입니다.
영화의 중반까지 제목이 [커플즈]가 아닌 [돈가방을 든 연인]정도로 바꿔야 한다고 투덜거렸던 저는 그 순간 '그래,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연이 있을거야.'라며 정용기 감독의 속삭임에 동화되어 버립니다.
[커플즈]는 그렇게 제게 만족감을 안겨줬습니다. 초반의 불안함과 중반의 당혹스러움을 넘어 그들을 하나로 합치며 진정한 재미를 완성해낸 정용기 감독의 연출력이 놀라웠고, 각각의 개성이 담긴 매력으로 영화를 이끌어 나간 김주혁, 이시영, 이윤지, 오정세, 공형진의 연기력도 대단했습니다.
올 가을, 로맨틱한 영화 한 편보지 못하고 넘어가나 싶었는데 [커플즈]로 그 모든 아쉬움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로맨틱 코미디는 언제나 엇비슷한 스토리 라인으로 버티는 영화라는 선입견도 사라졌고, 저질 조폭 코미디 감독이라는 정용기 감독에 대한 오명도 제 뇌리 속에서 벗겨질 것 같습니다. 인연이라는 거대한 퍼즐 같은 로맨틱 코미디를 완성해낸 정용기 감독에게 박수를... 짝!짝!짝!
당신도 커플이 될 수 있습니다.
인연이라는 거대한 운명의 힘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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