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류승완
주연 : 류승범, 윤소이, 안성기, 정두홍
개봉 : 2004년 4월 30일
관람 : 2004년 5월 5일
웅이를 장모님께 맡겨두고 편안하게 엄마,아빠 노릇을 하던 구피와 제게 결국 제대로된 엄마, 아빠 노릇을 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장모님께서 병으로 수술을 받으신 겁니다. 아프신 장모님께 웅이를 맡길 수 없던 저희는 결국 웅이를 집으로 데려았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엄마, 아빠 노릇을 해본적이 없는터라 웅이와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전쟁이었습니다. 구피는 하루종일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칭얼대는 웅이를 안고 있어야 했으며, 저 역시도 퇴근하면 곧바로 집으로 달려와 기진맥진해 있는 구피의 바통을 이어 웅이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습니다. 여유롭게 외식을 즐기는 것은 꿈도 못꿀 일이며,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것은 더더욱 꿈도 못꿀 일입니다. 하지만 불평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엄마, 아빠의 일이니까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자식을 위해 일평생을 희생하는 것... 저를 보며 까르르 웃는 웅이를 보며 '영화 그 따위 안봐도 좋아'라고 저는 자신있게 외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결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영화를 못본지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자 조금씩 금단현상이 밀려왔습니다. 그 사이 시사회에 두번이나 당첨되었지만 눈물을 머금으며 회사 동료에게 줘야 했고, 그러면그럴수록 영화에 대한 갈증은 점점 깊어만 졌습니다.
결국 어린이날 구피와 저는 일을 치루기로 했습니다. 전날 늦지막하게 장모님의 댁으로 놀러가 하룻밤자고 아침일찍 일어나 웅이는 장모님께 맡기고 극장으로 향한 겁니다. 비록 영화만 얼른 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제겐 충분했습니다. 한편의 영화가 그 동안 쌓이고 쌓인 영화에 대한 갈증을 확~ 풀어줬으니 말입니다. 결국 구피와 저는 어린이날, 서른이 넘은 나이에 영화라는 특별한 선물을 받은 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번 어버이날엔 저희 어머니께 웅이를 맡기고 영화를 보러갈 생각입니다. 이렇게라도 영화를 봐야죠... ^^;(못말리는 쭈니와 구피)
오래만에 화끈하게 제 영화에 대한 갈증을 풍어준 영화는 바로 [아라한 : 장풍대작전]입니다. 2편의 단편과 2편의 장편 영화만으로 젊은 세대 감독중 가장 촉망받는 감독이 된 류승완 감독과 전혀 배우처럼 생기지 않은 외모로 그 어떤 배우보다도 멋진 연기를 펼치고 있는 류승범 주연. 이 형제의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이는 이 영화는 윤소이라는 신선한 신인 배우와 안성기라는 듬직한 중견 배우가 좌우로 보좌하고, 정두홍이라는 우리나라의 최고 무술 감독에게 조연과 무술 감독이라는 일인이역을 맡기며, 제 관심을 증폭시켰습니다. 게다가 도시무협이라는 새로운 장르까지... [아라한]은 분명 우리나라 액션 영화의 한 획을 그을만한 영화입니다.
1. [화산고]와 비교하면...
[아라한]이 표방한 장르는 바로 도시무협입니다. 전혀 생소한 장르처럼 느껴지지만 솔직히 2001년 겨울 학원무협을 표방한 김태균 감독의 [화산고]와 어느정도 맞닿아 있는 장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화산고]가 진일보한 기술력을 보여주면서도 관객들의 혹평에 시달려야 했던것과 비교하면(저는 재미있게 봤습니다만...) [아라한]에 쏟아지고 있는 관객들의 호평은 분명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렇담 과연 [아라한]의 그 무엇이 [화산고]에 적응하지 못했던 관객들을 환하게 웃게 했을까요?
제가 보기엔 [아라한]과 [화산고]의 가장 다른 차이점은 바로 영화의 현실성입니다. [화산고]는 '화산고'라는 초현실적인 공간을 영화적 배경으로 철저하게 현실과는 담을 쌓으며 새로운 환타지를 완성하려 했습니다. 영화의 캐릭터들은 한결같이 과장되었으며, 배우들 역시 과장된 캐릭터에 맞게 과장된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화산고]는 학원무협이라는 장르를 환타지라는 전혀 새로운 시공간을 통해 완성하려 했던 겁니다.
그에 반에 [아라한]은 현실적입니다. 물론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기본적인 스토리 라인은 현실적이지 않지만 그 속에 담겨져있는 상환(류승범)이라는 캐릭터와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을 무협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영화의 무대는 다분히 현실적이었습니다. 평범한 일반 시민이라면 십중팔구는 상환처럼 억울한 일을 당해보았을 것이며, 영화속 주인공처럼 초현실적인 힘을 바탕으로 자신을 괴롭혔던 악당들을 통쾌하게 쳐부수는 상상을 해보았을 겁니다.(저는 무지 많이 했습니다. ^^;) [아라한]은 바로 도시무협이라는 전혀 현실적이지 못한 영화 장르속에서 현실적인 캐릭터와 시공간으로 관객들의 동감을 구합니다. 이것이 [아라한]의 가장 큰 장점이며, [화산고]와 가장 다른 점입니다.
2. [피도 눈물도 없이]와 비교하면...
류승완 감독이 결정적으로 유명세를 타게된 영화는 [다찌마와 리]라는 조금은 엉뚱한 단편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라는 저예산 영화를 통해 신세대 액션 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피도 눈물도 없이]를 통해 성공적으로 상업 영화에 안착했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피도 눈물도 없이]만을 봤습니다. 혼자서 영화를 보다가 아픈 상처만 받았던 [죽은 시인의 사회]이후 처음으로 제가 혼자 극장에서 본 영화이기도 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그만큼 제겐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던 영화입니다.
하지만 막상 [피도 눈물도 없이]를 보자 제가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저는 류승완 감독의 재기발랄한 액션 영화를 기대했습니다. 빈틈없이 잘 짜여진 시나리오와 전도연이라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의 파격적인 연기 변신, 그리고 이혜영과 정재영의 카리스마... 이것이 제가 기대했던 것들입니다. 그러나 [피도 눈물도 없이]는 그 모든 것들을 채우기엔 약간은 모자란 영화였습니다. 돈가방을 둘러싼 여러 인간군상들의 계획은 여기저기에서 헛점이 보였으며, 이 영화가 표방한 장르인 펄프 느와르는 예상보다는 많이 평범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며 분명 젊은 감독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볼 수는 있었지만 대가라고 하기엔 아직은 2% 부족한 면들을 발견했었습니다.
하지만 [아라한]은 틀립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의 실패를 경험한 류승범 감독은 그 만큼 더 성숙해진 연출력을 과시합니다. 자칫 유치해질 수도 있는 영화의 기본 스토리 라인을 현실적인 캐릭터와 시공간으로 무마시키고, 영화가 조금 무거워질만하면 느닷없는 유머로 관객의 뒷통수를 칩니다. 이제 겨우 3번째 장편 영화를 만드는 30대의 젊은 감독에게서(저와 동갑이더군요. ^^) 관객을 향한 여유로운 자세를 발견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류승완 감독은 마치 수십편의 영화를 만든 감독의 여유로움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마치 '우리 함께 도시무협을 즐기자'라고 유쾌하게 외쳐대는 편안한 친구처럼 [아라한]은 새로우면서도 재미있고, 편안한 그런 영화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영화를 만들때마다 조금씩 성숙해가는 감독의 재능을 발견하는 재미는 그 어떤 화려한 블럭버스터의 재미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라한]은 그 어떤 헐리우드 블럭버스터보다도 제 기대를 충족시켜준 류승완이라는 새로운 대가를 발견케해준 영화였습니다.
3. [품행제로]와 비교하면...
류승범이라는 배우는 참 이상한 매력을 가진 배우입니다. 원빈이나 장동건처럼 남자가 봐도 셈이 날 만큼 그림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권상우나 송승헌처럼 멋진 몸매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배우적인 경쟁력은 바로 평범함속에서 엿볼 수 있는 편안함입니다.
그는 매우 많은 영화에 출연한 것 같지만 사실 그의 필모그라피를 살펴보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같은 저예산 독립 영화에서부터 시작하여, [피도 눈물도 없이], [복수는 나의 것]의 특별출연과도 같은 조연이 전부입니다. 그가 정식으로 상업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영화는 고작 [품행제로]가 전부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은 영화에서 우리와 함께 한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것은 그가 그만큼 편안하다는 증거입니다.
[품행제로]는 류승범이라는 배우를 처음으로 상업적으로 이용한 영화입니다. 조근식 감독은 류승범의 매력을 철저하게 영화속 재미로 승화시키려 노력합니다. 류승범의 편안한 매력은 80년대 촌스러운 배경과 함께 동네 형들의 오버스러운 영웅담을 듣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품행제로]는 류승범의 매력을 전부 끌어내는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의 매력을 어깨에 힘만 잔뜩 들어간 터프한 고딩에서 찾으려했던 것이 절반의 실패의 원인입니다. 아마도 조근식 감독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고딩과 [피도 눈물도 없이]의 터프한 웨이터 채민수의 캐릭터를 반쯤 섞은 것이 류승범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듯합니다.
하지만 류승범의 친형인 류승완 감독은 진정한 류승범의 매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류승범의 어깨에서 잔뜩 들어간 힘을 빼내고 소심하게 보이는 안경을 씌웁니다. 류승범이 연기한 상환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영웅심을 가지고 있지만 결코 불의에 당당하게 맞서는 힘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의진(윤소이)을 사랑하지만 멋지게 사랑고백할 용기도 없고, 그녀의 가방을 몰래 뒤져볼뿐입니다. 이것은 소시민인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류승범이라는 너무나도 평범한 외모를 가진 배우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류승범은 이 모든것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연기합니다. 마치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그의 연기는 자연스럽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천연덕스러운 농담을 건네도 류승범의 그 편안함에 의해 그 어색한 장면들이 자연스러운 웃음으로 이어집니다. 류승완 감독이 이끌어낸 류승범의 매력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아라한]의 그것과 일치한 것입니다. 우린 류승완이라는 젊고 유능한 감독과 함께 류승범이라는 진정 매력적인 배우를 이 영화를 통해 만난 것입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무협 액션과 류승완 감독의 대가의 면모가 느껴지는 연출력, 류승범의 편안한 연기까지... [아라한]은 분명 무엇하나 흠잡을데 없는 영화입니다. 정두홍이라는 걸출한 무술감독이 창출해내는 이 영화의 액션씬은 어두컴컴한 창고 액션만을 전전하는 우리 영화의 액션을 이 영화가 얼마나 업그레이드시켰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에 불과합니다. 마치 [매트릭스]를 연상시키는 빌딩 추격씬과 마지막 장풍 한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감출줄아는 액션 센스까지...
윤소이의 연기가 간혹 눈에 거슬리는 딱딱함을 보여주지만, 그러한 사소한 단점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장점에 감춰집니다. 우리나라의 액션 영화가 헐리우드 액션 영화와 비교해서 별다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급발전을 거두고 있다는 발견만으로도 이 영화는 분명한 가치가 있는 영화입니다.
앞으로 류승완 감독의 영화를 기다리게 될 것이며, 류승범의 새로운 연기를 기대하게 될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액션의 수준을 계속해서 업그레이드시키고 있는 정두홍 무술 감독의 새로운 시도와 어색한듯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의 연기를 그리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있기에 전 계속해서 우리 영화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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