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미야자키 고로
더빙 : 나가사와 마사미, 오카다 준이치
개봉 : 2011년 9월 29일
관람 : 2011년 10월 1일
등급 : 12세 이상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와는 극장 관람 인연이 없다.
제가 30대 후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힘이 컸습니다.
학창 시절 우연히 봤던 [인어공주]를 시작으로 저는 [라이온 킹], [알라딘] 등 디즈니의 샐 애니메이션에 흠뻑 매료되었고, 디즈니 샐 애니메이션이 하향세에 접어 들었을 때는 픽사의 애니메이션이 등장하면서 여전히 저를 극장으로 유혹했습니다.
그렇게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덕분에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흠뻑 빠졌던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로 집에서 뒹굴며 시간을 보내던 시절 색다른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발견하였었습니다. 바로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이었죠.
당시에는 시간이 많았기에 하루 종일 영화를 볼 수 있었는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을 몽땅 다운로드 받아서 몇날며칠을 집안에 틀어박혀 본 기억이 납니다. 당시 봤던 영화가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 [마녀 배달부 키키], [붉은 돼지], [모노노케 히메] 등이었습니다.
디즈니의 샐 애니메이션이 급속도로 기울어져 가고 픽사의 3D 애니메이션이 대세였던 시절, 저는 비록 다운로드였지만 여전히 샐 애니메이션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명성을 다운로드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시절이 지나고 2002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국내에 개봉하면서 드디어 제게도 그의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저의 극장 인연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후에도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벼랑 위의 포뇨] 등이 국내에 개봉했지만 저는 이들 영화 모두 극장에서 보지 못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에 열광하면서도 그의 영화는 이상하게 저와 인연이 닿지 않았던 것이죠.
그 대신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이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연출을 하지 않은 영화들인 [게드 전기 : 어시스의 전설], [마루 밑 아리에티]는 극장에서 봤습니다. 거참 이상하죠? 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만 저와 이렇게 인연이 닿지 않는 것인지...
미야자키 고로 감독의 영화와는 극장 관람 인연이 많다.
사실 따지고 보면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본 것은 [코쿠리코 언덕에서]까지 딱 세 편인데, 그 중 두 편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아들인 미야자키 고로 감독의영화입니다. 미야자키 고로감독이 연출한 영화가 두 편임을 감안한다면 저는 그의 영화를 모두 극장에서 본 셈입니다.
2006년 [게드전기 : 어시스의 전설]을 저는 꽤 재미있게 봤었는데,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아들의 첫 연출작인 [게드전기 : 어시스의 전설] 시사회 현장에서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영화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으로 유명합니다. 애니메이션의 거장의 눈에는 아들의 영화가 영 못마땅했나봅니다.
하지만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좀 다릅니다. [게드전기 : 어시스의 전설] 때의 충격 때문이었는지 미야자키 고로 감독은 5년이 지나도록 차기작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직접 기획과 각본을 맡은 [코쿠리코 언덕에서]로 미야자키 고로 감독을 적극적으로 밀어줬다고 하네요. 시사회 현장에서는 감동의 눈물까지 흘렸다고 하니 미야자키 고로 감독은 드디어 아버지의 인정을 받은 셈입니다.
[게드전기 : 어시스의 전설]과 [코쿠리코 언덕에서]를 모두 관람한 제 개인적인 소감으로는 이 두 영화는 스타일 자체가 상당히 달랐습니다.
[게드전기 : 어시스의 전설]은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와 함께 세계 3대 판타지로 추앙 받는 어슐러 K 르 권의 원작 [어스시의 마법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어시스의 마법사]의 영화화를 오랜숙원으로 생각하여 20년 동안 원작자를 끈질기에 설득했지만 어술러 K 르 권은 번번히 거절했다고 하네요.
어술러 K 르 권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게 영화화를 허락한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들이 전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은 이후였습니다. 그렇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졌으니 [게드전기 : 어시스의 전설]은 웬만해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눈에 찰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게드전기 : 어시스의 전설]은 상당히 철학적인 영화였습니다.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들이 그다지 어렵지 않고 친숙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마야자키 고로 감독이 원작의 철학과 영화적 재미를 아버지처럼 자유자재로 변환시키고 융합시키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들을 위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선택은 스케일을 줄인 드라마?
모르긴 몰라도 하야오 감독은 아들인 고로 감독에게 처음부터 스케일이 큰 대작을 맡긴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릅니다. 우선 작은 영화에서부터 차근 차근 실력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고로 감독의 역량을 평가한 듯이 보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스튜디오 지브리 영화 중에서도 상당히 작은 소품에 불과합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이 어느정도 판타지적 소재를 가지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판타지적 소재를 아예 완전히 배제하고 1963년을 배경으로 한 소녀와 소년의 첫사랑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1963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촌스럽습니다. 영화의 처음... 제작사의 로고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마치 오래된 영화를 복원해서 보는 것처럼 필름이 거칠어 보였고, 아침을 맞이하는 우미(나가사와 마사미)의 장면에서는 어색한 동작들이 보였습니다. 요즘 기술의 발전으로 애니메이션도 실사 영화보다 정교해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어색함은 기술력의 부족보다는 의도된 어색함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판타지적 소재로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던 이전의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마치 한 편의 TV 드라마를 보는 듯한 잔잔함으로 영화를 이끌어 갑니다.
최근 보았던 우리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처럼 왜 굳이 이걸 실사가 아닌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애니메이션으로의 경쟁력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로 감독의 첫 영화인 [게드전기 : 어시스의 전설]은 물론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 중 그 어느 것과 비교해서도 특출난 점이나 영화적 재미가 떨어져서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당혹스럽기만 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이 영화에 전혀 영화적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의 스튜디오 지브리의 영화와 비교한다면 분명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게드전기 : 어시스의 전설]을 보고 실망한 후 [코쿠리코 언덕에서]로 고로 감독을 적극 지원한 것을 보면 그에겐 이런 정공법이 담긴 드라마 연출이 어울린다고 생각한 듯 한데, 그렇다면 고로 감독이 스튜디오 지브리를 물려 받고 수장이 된다면 앞으로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영화는 꼭 극장에서 봐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고 무리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첫사랑 그리고 옛 것의 소중함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굳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이유가 별로 보이지 않는 제겐 그저 평범한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해도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이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쓰고 기획을 맡은 영화이기에 영화 자체는 흠잡을데가 없을 정도로 잘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제게 잘만들었다와 재미있었다의 의미는 다릅니다.)
이 영화는 두 가지 이야기 축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우미와 슌(오카다 준이치)의 순수한 첫사랑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오래된 동아리 건물 '카르티에라탱'을 지키고 싶어하는 학생들의 열정입니다.
우선 첫사랑의 이야기를 놓고본다면 참 지루합니다. 개인적으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초속 5센티미터]가 가지고 있는 첫사랑의 아련함을 참 좋아하는 편인데,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첫사랑은 그런 아련함보다는 TV 드라마에서 지겹도록 본 출생의 비밀에 얽혀 있을 뿐입니다. 그나마도 미국에 있는 우미의 어머니가 귀국하면서 간단하게 실타래가 풀리고 급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데... [초속 5센티미터] 식의 아련함을 기대한 저로서는 실망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다른 한 축인 '카르티에라탱'을 지키고자 하는 학생들의 열정은 그 동안의 스튜디오 지브리의 주제와 맞물리며 꽤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우미가 처음에 '카르티에라탱'을 들어 설 때의 분위기는 '그들만의 공간'의 느낌이었는데 우미가 대청소를 제안하고 모두들 힘을 합쳐 건물을 꾸미고면서 '우리 모두의 공간'으로 재탄생합니다.
'그들만의 공간'과 '우리 모두의 공간'을 통해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옛 것의 소중함과 그것을 지키는 방법론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 영화를 관람하던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의뢰인]을 보고 쉴 틈도 없이 연달아 [코쿠리코 언덕에서]를 봐서인지 몰라도 지금까지 스튜디오 지브리의 영화를 보며 느끼지 못했던 지루함이 이 영화에는 느껴졌습니다. 60년대 시대 배경을 위한 의도적인 촌스러운 연출, 아련하지도 풋풋하지도 못한 첫사랑의 표현 등... [코쿠리코 언덕에서]를 보며 밖에 나갈 돈이 없어 집안에 처박혀 불법 다운로드 영화나 보던 그 시절, 제 마음을 설레게 했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이 자꾸만 그리워졌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는 달리 미야자키 고로 감독의 역량은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쿠루리코 언덕에서]를 보고나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은퇴한 후의 스튜디오 지브리가 은근히 걱정됩니다.
거장 아버지 밑에서 범재로 살아야 했던 아들의 고충은 이해하지만,
거장의 시대가 막이 내리고 범재에게 그 바통이 넘어가고 있는 현장을 지켜봐야 하는
애니메이션 매니아의 아쉬움도 이해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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