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황동혁
주연 : 공유, 정유미, 김현수, 백승환, 장광
개봉 : 2011년 9월 22일
관람 : 2011년 9월 27일
등급 : 18세 이상
15년 전 그 아이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했던 나.
15년 전의 일입니다. 대낮 지하철에서 어느 할아버지가 얼큰하게 취하셔서 지하철을 타셨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앉으신 자리의 옆엔 초등학생인듯 보이는 남자 아이가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 맞은 편에 앉아 있었고요.
문제는 그 할아버지가 손자가 보고 싶으셨는지 옆 자리의 남자 아이에게 '너 몇 살이니?', '귀엽구나!'라며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잡으신 것입니다. 어찌보면 별일 아닐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그 남자 아이는 술에 취한 할아버지의 갑작스런 행동이 당황스러웠나봅니다. 자신의 손을 잡은 할아버지의 손에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으니까요.
그 순간 그 남자 아이는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저를 간절히 쳐다봤습니다. 하지만 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할아버지가 단지 손자가 보고 싶어서 남자 아이에게 그런 행동을 하고 계신 것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할아버지 그러지 마세요.'라며 끼어들어도 될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사이 제 옆에 앉으신 다른 아저씨가 '얘야. 이리로 와서 앉으렴.'이라며 남자 아이를 부릅니다. 그때서야 할아버지는 남자 아이를 잡았던 손을 놓았고, 남자 아이는 도망치듯이 다른 칸으로 가버렸습니다.
15년 전의 일이었고, 어찌보면 별일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쳐다봤던 그 남자 아이의 간절한 눈빛이 결코 잊혀지지 않네요.
단지 저는 가해자가 할아버지였기에 '설마 할아버지가 나쁜 의도로 그랬겠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피해자인 남자 아이가 불쾌하게 느꼈다면 아무리 할아버지의 행동에 나쁜 의도가 없었더라도 제가 남자 아이를 도와줬어야 했습니다.
결국 저는 외면한 셈이 되었고, 어쩌면 그 남자 아이는 제가 고민하는 그 몇 초의 시간동안 도와주지 않은 저를 원망하며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제 [도가니]를 봤습니다. 지난 주부터 앓았던 감기가 장모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진한 모과차 덕분에 호전될 기미가 보이자 저는 더 이상 [도가니]의 관람을 미루지 못하고 늦은 밤 극장으로 향한 것입니다.
[도가니]를 보는 내내 15년 전의 그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아마 당시 인화학교의 사건을 접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설마 청각장애인학교의 교장과 선생들이 청각장애아에게 성폭력과 학대를 저질렀을리가 없을 것이라고... 아마도 나쁜 의도는 없었을 것이라고... 그런 생각은 혹시 자기 자신을 위한 생각이 아닐까요? 사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끔찍한 사건에 대해서 귀찮아서 외면하고 싶은 자신을 위한 변명은 아닐까요? 새삼 15년 전 제 외면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진정 무서웠던 것은...
[도가니]는 처음부터 아예 작심하고 저를 충격에 빠뜨립니다. 청각장애인 학교의 미술 교사가 되어 무진으로 향하는 인호(공유). 하지만 짙은 안개로 인하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시각 어린 남자 아이가 비틀거리며 위태롭게 기찻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남자 아이를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다.
짙은 안개로 인하여 차로 고라니를 치는 인호와 기차에 치이는 남자 아이의 장면이 교차되고 그렇게 저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어린 남자 아이의 죽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 영화의 잔인함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집니다. 인호의 눈 앞에서 펼쳐지는 자애학교의 충격적인 실상은 영화적 재미를 위한 밀고 당기는 것이 없이 그냥 막무가내로 제 앞에 펼쳐집니다. 무진이라는 도시를 둘러싼 안개의 답답함처럼, 막무가내로 펼쳐지는 이 영화의 잔인함에 저는 숨이 탁탁 막힐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화를 보며 막힌 숨을 뚫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사건보다 몇 배는 축소해서 표현했다는 이 영화의 장애아동성폭행 장면은 빨리 막을 내립니다.
초반의 장면들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잔뜩 긴장하며 영화를 봤던 저는 인호와 유진(정유미)이 청각장애아인 연두(김현수), 유리(정인서), 민수(백승환)와 함께 자애 학교의 교장 형제(장광)와 교사인 박보현(김민상)를 고발하는 장면이 예상 외로 빨리 나오자 그만 긴장을 풀어 버렸습니다.
TV의 시사고발 프로에 자애학교의 사건이 보도되고 전국적인 관심 속에 교장 형제와 박보현이 재판을 받게 됩니다. 재판 과정도 제 긴장감을 풀어버리는 한 요소가 되었는데 연두의 침착한 증언으로 교장 형제의 죄가 낱낱이 밝혀지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그래, 이젠 이겼어.'라고 마음을 놓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이 영화의 잔인함은 그 다음부터입니다. 학연 지연으로 엮여 있는 지역 사회의 권력 구조 속에 무너지는 진실의 순간을 제 눈으로 확인하는 그 순간 저는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아났습니다. 장애 아동을 성폭행하는 교장 형제와 선생들보다 더욱 무서웠던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 모든 불편한 진실을 외면했던 바로 그 멀쩡한 사람들의 뻔뻔한 모습이었습니다.
나라면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을까?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공감이 되었던 캐릭터는 인호였습니다. 무진인권단체 소속인 유진의 경우는 장르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라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지만 무능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인호는 마치 내 자신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자애 학교의 충격적인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는 인호 앞에 그의 어머니가 나타납니다. 남편 둿바라지를 하다가 죽은 아내와 남겨진 병에 걸린 어린 딸. 어머니는 인호를 설득합니다. 모른채 하라고. 자기 자신부터 챙기라고. 세상은 원래 그런거라고.
그런 어머니의 설득에 인호는 흔들립니다. 어쩌면 당연합니다. 모른채 할 경우 그에게 돌아갈 이득이 너무 컸습니다. 몇 년만 참고 모른채 하면 어엿한 선생이 되어 서울로 발령을 받을 수도 있고, 돈을 벌어서 병에 걸린 딸과 늙은 어머니를 부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장실에서 민수를 폭행하는 박보현 선생 앞에서 교장에게 주기 위한 난초를 들고 서있는 인호의 모습은 그래서 진정 슬펐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며 인호는 더욱 현실 앞에 갈등하게 됩니다. '저 얘들이 더 중요하냐? 네 딸이 더 중요하냐?'라고 묻는 인호의 어머니를 원망할 힘조차 없었습니다.
합의를 해준다면 거액의 돈과 서울의 교수 자리를 약속하는 은사와 교장의 변호사 앞에서 인호는 '죄송합니다.'라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현실이었으니까요.
돈 앞에서 너무나도 쉽게 합의를 해준 유리와 민수의 가족들을 원망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현실이니까요.
그렇습니다. 힘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은 유혹에 약합니다. 외면의 댓가로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고, 무능력한 생활을 떨쳐 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진 자의 침묵은 도대체 무얼로 이해해야 할까요? 단지 더 갖고 싶어서? 더 누리고 싶어서?
마지막 경찰의 물대포 속에서 무너져 내리는 인호의 마지막 울부짖음. 영화 내내 자신의 감정을 꾹 참고 자제했던 인호였기에 참고 참았던 인호의 마지막 울부짖음은 제게 더 큰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유혹을 뿌리치고 지금까지 잘버티고, 잘 싸웠는데 가진 자의 욕심과 외면으로 인해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 그들의 안타까운 몸부림은 그렇게 내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당신은 이 영화에 돌을 던질 수 있는가?
만약 이것이 그저 허구를 소재로한 영화였다면 저는 결코 이 영화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흥행을 위해 더욱 자극적인 소재를 채택하여 어린 배우들을 극한 상황까지 몰고가는 이 영화의 화법을 저는 결코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영화의 소재는 허구가 아닌 사실입니다. 그것도 실제 사건은 이 영화에서 표현한 것보다 훨씬 잔인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 영화에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이 영화의 흥행으로 많은 사람들이 광주 인화 학교의 사건을 다시 수사하고 관계자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결국 [도가니]로 인하여 침묵하고, 외면하고,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깨어났던 것입니다.
왜 좀 더 일찍 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지, 왜 좀 더 일찍 한 목소리를 내며 관계자 처벌을 요구하지 못했는지, 그저 뉴스 한토막, 신문 한 줄을 읽으며 무심코 넘겼던 제 자신의 무관심에 죄책감이 느껴집니다.
그들은 단지 보통 아이들보다 약간의 장애가 있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사회를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닌 사회가 우릴 변하게 하지 못하기 위함이다'라는 유진의 편지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의 관심으로 사회를 꼭 변화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저렇게 해맑은 아이들이 '나는 세상에 쓸모 없는 사람이다, 나는 당해도 된다'라는 생각이 들게끔 변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도가니]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았던 감기가 다시 도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이들의 울부짖음과 그 속에서 희희낙락하는 가진 자들의 역겨운 웃음소리. 그리고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아무 것도 해내지 못한 인호의 무기력함이 제 가슴을 답답하게 짓눌렀습니다.
과연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더 잔인해질 수 있는 걸까요? 자신의 성욕을 위해 장애 아동을 성폭행하던 이들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 그들의 범죄를 모른채 눈감았던 이들도,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었기에 더욱 섬뜩하기만 했습니다.
우리 맞서 싸울 수는 없어도 외면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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