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환경
주연 : 차태현, 김수정, 유오성, 박하선
개봉 : 2011년 9월 7일
관람 : 2011년 9월 17일
등급 : 12세 이상
극장에 여럿이 갔다가 혼자서 영화를 보다.
매달 셋째주 토요일, 저는 회사 동호회 모임이 있습니다. 뭐 특별한 주제를 가지고 만든 동호회는 아니고 친목을 위한 동호회라서 산에도 갔다가, 볼링도 쳤다가, 낚시도 갔다가, 맛난 것도 먹었다가, 가끔은 영화도 봅니다. [해결사], [슈퍼 에이트]가 바로 회사 동호회에서 본 영화들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저야 매주 한 편 이상은 꼭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자칭 영화광이지만 다른 동호회 회원들은 1년에 극장에서 영화를 한 편 볼까 말까한 분들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영화를 고를 때는 저와 다른 회원들은 충돌을 일으킵니다.
9월 모임에선 영화를 보기로 일찌감치 정했고, 상영 영화 중에서 [챔프]를 보자고 모임 회장님과 사전에 약속까지 했는데 막상 극장 앞에 모인 회원들은 '요즘 [최종병기 활]이 재미있다는데...'라고 술렁거립니다. 저야 당연히 [최종병기 활]이 개봉하자마자 봤지만 다른 회원들은 아무도 이 영화를 본 분들이 안계시더군요. 무려 600만명이나 관객이 든 영화인데...
결국 이렇게해서 [챔프] 팀과 [최종병기 활] 팀으로 나눠 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저와 [챔프]를 보기로 철썩같이 약속한 모임 회장님이 저를 배신하고 [최종병기 활]을 고르시는 바람에 저만 홀로 [챔프]를 봐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에 처해 버렸습니다.
'어차피 혼자 영화보러 자주 다니니 내 걱정은 마시고 [최종병기 활]이나 잘 보세요.'라고 다른 회원들을 떠나 보냈지만, 홀로 덩그러니 남아 [챔프]를 보려고 기다리고 있으려니 외로움(?)의 눈물이 날려고 합니다.
하긴 동호회 회원들과 [챔프]를 봤다면 영화를 보고나서 욕만 진탕 얻어 먹을 뻔 하긴 했습니다. 그날 모인 회원들 중에서 영화에는 무조건 액션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챔프]는 그 분들의 취향과 전혀 거리가 멀었거든요.
암튼 극장에는 여럿이서 갔다가 영화는 막상 홀로 보고나니 기분이 그리 썩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챔프]는 분명 제 두 눈에 눈물 몇 방울을 맺히게 했지만 영화를 보고나서의 느낌은 '감동적이다'라기 보다는 '재미없다'라는 느낌이 더욱 강했습니다.
그래, 나 울고 싶었다.
사실 동호회 모임 영화로 애초부터 고를 영화가 없었습니다. 동호회 모임으로 선택한 역곡 CGV에서 모임 날짜에 상영하는 영화 중에서 제가 안 본 영화라고는 [챔프]과 [가문의 영광 4 : 가문의 몰락], [파퍼씨네 펭귄들]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동호회 회원들의 취향을 고려해서 [가문의 영광 4 : 가문의 몰락]을 선택하려 했지만 의외로 유치한 영화는 싫다는 의견이 많아 [챔프]를 고른 것인데 결국 저 혼자 보게 된 것이죠.
기왕 이렇게 혼자 영화를 보게 된 이상 저는 [챔프]를 정말 재미있게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와서 동호회 회원들이 [챔프]를 안 본 것에 대해서 후회를 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저는 [챔프]를 보고나서 '이렇게 감동적인 영화를 놓치다니... 후회하게 될 겁니다.'라고 동호회 회원들에게 큰소리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감동을 받을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너무 노골적으로 눈물을 강요해서 오히려 감동이 덜했다는 평을 일찌감치 들었지만 노골적으로 눈물을 강요하면 저 역시 노골적으로 울어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네, 맞습니다. 저는 [챔프]를 보며 여러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제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 한 줄기를 닦아내느라 옷 소매가 축축해 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성공한 것 아니냐고요? 어찌보면 그럴수도 있겠죠. '감동 = 눈물'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면 분명 전 [챔프]에 감동을 받은 셈이니까요.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최종병기 활]에 대해서 이야기 꽃을 피우는 동호회 회원들 앞에서 저는 [챔프]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긴 했는데, 그 눈물이 영화에 감동을 받아서 흘린 눈물이라기 보다는 예승역을 맡은 아역 배우 김수정이 너무나도 실감나게 우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영화 자체를 놓고 본다면 [챔프]는 전혀 감동적이지도, 슬프지도 않았습니다. 교통 사고로 아내를 잃고 기수로서의 모든 영광마저 잃은 승호(차태현)의 사연도 그다지 슬프지 않았고, 마지막 질주마저도 그저 담담했습니다. 분명 영화 자체를 감동적으로 끌고갈 여지가 충분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환경 감독은 서두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인생은 추입이라더니...
[챔프]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인생은 추입이다'라는 말이죠. 영화의 초반 승호가 후배 성현(백도빈)에게 해 준 말이고, 영화 중간 중간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며, 마지막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아예 화면 가득 커다란 글씨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추입... 앞서가는 기수를 부러워하지 않고 초반에 힘을 아껴뒀다가 기회가 왔을 때 막판 고삐를 당겨 역전한다는 경마 용어라고 하네요. 실제 승호와 우박이는 처음부터 앞으로 치고 나가지 않고 처음엔 뒤쳐져 가다가 막판에 앞으로 치고 나가는 전략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막상 영화는 그러지 못합니다. 이환경 감독은 뭐가 그리도 급했는지 처음부터 자꾸만 관객의 눈물을 쏫게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한 눈물을 아껴뒀다가 마지막 순간에 흘려도 충분한데 이환경 감독에겐 그런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챔프]는 처음부터 오버 페이스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지난 겨울 개봉해서 흥행에 대성공을 가두었던 차태현 주연의 [헬로우 고스트]가 전형적으로 추입 전략을 썼던 영화입니다.
사실 [헬로우 고스트]는 영화의 거의 80% 이상이 웃기지 않는 코미디로 구성된 영화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슬픈 반전을 내세워 대 역전승을 거둔 것이죠. [헬로우 고스트]를 보는 순간 내내 '이 영화 왜 이렇게 재미없어?'라고 투덜거렸던 저는 마지막 순간의 대 역전극에 '우와 재미있는데...'라고 태도가 돌변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챔프]는 아닙니다. 처음부터 슬플 거리는 전부 펼쳐 놓습니다. 승호는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었고, 엄마 없이 큰 예승은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기수라고 철썩같이 믿습니다. 그런데 승호는 점점 시각을 잃어 갑니다. 이건 뭐 아예 처음부터 '난 이렇게 슬플테니 너희는 알아서 울어줘.'라고 선전포고를 한 셈인 것이죠. 너무 대놓고 선전포고를 하니 오히려 슬프지가 않습니다. '인생은 추입이다.' 이 영화는 진정 그 말을 새겨들었어야 했습니다.
내 눈물의 8할은 예승이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챔프]에게는 김수정이라는 천재 아역 배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혹시 기억하시나요? 이동준 주연의 [클레멘타인]이라는 영화를... 할리우드의 B급 액션 스타 스티븐 시걸을 캐스팅하여 화제를 모았던 [클레멘타인]은 그러나 정말 어처구니없는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클레멘타인]의 시사회 장에서 많은 관객 들의 눈물을 흘리게 한 배우가 있었으니 바로 아역 배우인 은서우였습니다. 영화 자체는 어처구니없었지만 어린 아이가 눈물을 흘리니 관객들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게 된 것이죠.
[챔프]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챔프]는 [클레멘타인]처럼 어처구니없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영화를 보며 흘린 눈물의 대부분이 영화 자체 때문이 아닌, 아역 배우의 눈물 연기 때문이라는 점이 너무나도 닮았습니다.
예승이가 처음으로 아빠의 눈이 안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울던 그 장면은 정말 아무리 감정이 매마른 사람이라도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 만큼 강력했습니다. 특히 김수정의 눈물 연기가 너무나도 완벽했기 때문에 더욱더 제 눈물샘을 자극했는데, 눈물 연기만큼은 [클레멘타인]의 은서우를 능가하였습니다
영화를 보며 예승 때문이 아닌 장면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것은 승호가 죽은 아내의 납골당에서 '더이상 당신의 얼굴이 안보인다'며 울먹이던 순간 뿐이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환경 감독은 김수정의 눈물 연기를 최대한 자제시켰다가 마지막 클라이맥스 순간에 터트렸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눈이 거의 보이지 않던 승호와 절름발이 말 우박이의 마지막 질주 장면에서 참고 참았던 그 눈물을 한꺼번에 쏟아냈더라면 김수정의 눈물 연기가 더욱 빛을 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급한 이환경 감독이 그러지 못한 것이죠.
결국 김수정의 눈물 연기 덕분에 뜨거운 눈물은 제 두 뺨에 흘러 내렸지만 그것은 영화의 감동과 연결이 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순간 승호의 선택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고, 예승과 승호가 함께 코믹 댄스를 추던 마지막 장면도 생뚱맞았으며, 실제 절름발이 경주마 루나의 마지막 우승 장면은 [챔프]가 실화라고 우기는 영화의 마케팅을 더욱 어이없게 만들었습니다.
[챔프]는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제 두 눈에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영화는 드물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눈물을 영화의 감동과 연결시키지 못한 채, 인위적인 감동만을 강요한, 제겐 너무나도 아쉬운 영화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시력을 잃어가는 기수 승호와 절름발이 말 우박이어야 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면 기억에 남는 것은 예승이의 눈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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